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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 | 인터뷰

[디자인정글 특별초대석] 평생 미디어 디자인 현장을 지켜온 1세대 편집디자이너, 조의환 

2024-03-19

조의환은 한국 편집디자인 분야 1세대로 한국 편집디자인의 역사를 이끌어왔다. 1981년 월간 <마당>을 통해 본격적으로 편집 디자이너로 활동을 시작한 그는 동아일보의 월간 <멋>, <음악동아>의 창간 아트디렉터로 일했다.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겨 <월간조선> 리디자인과 <가정조선>의 창간 아트디렉터를 맡았고, 조선일보 출판국 미술부장, <FEEL> 편집장, 조선일보 디자인연구소장을 지냈으며 이후 조선일보 편집국 편집위원으로 조선일보 가로짜기 리디자인과 가로짜기 신문 전용 신서체 개발을 총괄했다.

 

조의환 디자이너

 

 

조선일보는 주요 일간지 중 마지막까지 세로쓰기를 유지했었고 따라서 가로짜기로의 변화는 가장 늦은 신문이었다. 조선일보 가로짜기 리디자인과 전용 서체 개발에는 조선일보 디자인연구소와 편집디자인 전문회사와 서체개발사의 참여가 처음으로 시도되었다. 이는 우리나라 신문디자인에 최초의 디자이너 집단의 주도적 참여라는 점에서 디자인사에 의미가 있다. 

 

조선일보 가로짜기 리디자인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전용 서체 개발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경영진을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조선일보의 본문 서체 개발은 납활자시대부터 오래도록 이어져 온 조선일보 서체개발 역사를 이어간다는 의미도 있지만 CTS(Computerized Typesetting System)환경에 가독성 높고 기존 독자들에게 거부감 없는 최적의 서체를 개발한다는 목표가 있었다. 생산방식의 변화(좁은 의미의 조판방식의 변화)는 신문과 같은 속보성 매체에는 편집 제작 시간의 단축과 통일성을, 독자에게는 가독성 높고 미려한 지면을 제공하는 품질 향상이 목표여야 한다. 

 

조선일보 1면 가로짜기 전과 후 

 

1987년 7월호 <월간조선> 표지

 

 

조의환은 납활자 - 사진식자 – 전산사식 – CTS로 이어지는 조판방식의 격변기에 잡지 아트디렉터로 일하며 생산방식의 변화를 시도하였고 전통의 시사교양지 <월간조선>은 언론자유의 물결을 타고 심층취재, 탐사보도 등으로 면모를 일신하여 시사 교양지로는 획기적인 45만부의 판매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월간조선>은 전에 없던 방식인 이복식 선생의 일러스트레이션으로 표지를 디자인함으로써 시사교양지의 표지에도 변화를 일으켰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아! 고구려' 

 

 

그는 그래픽 디자이너였지만 전시디자이너와의 협업으로 여러 대규모 전시를 기획, 성공적으로 개최하기도 했다. 조선일보가 주최한 ‘아! 고구려’(국립현대미술관), 정부수립50주년기념전 ‘우리들의 이야기’(예술의전당), 6.25전쟁 50주년 특별기획전 ‘아! 6.25’(전쟁기념관), ‘엄마 어렸을 적에’,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등 현대사와 관련된 여러 대형 전시를 기획, 연출했다. 그가 선보인 전시들은 입체적인 연출로 전시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을 새롭게 바꾸는 역할을 했다.

 

조의환 디자이너가 찍은 제주의 풍경

 

 

그는 사진작가이기도 하다. 그의 사진에 대한 관심은 대학시절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제주에 터를 잡기도 했던 그는 ‘주(主)로서의 시선’을 통해 제주의 다른 풍경을 보았고, 오름, 들판 등 제주 곳곳을 살피며 농부와 자연이 대지에 연출해 놓은 그림을 사생하듯 카메라에 담았다. 그의 이러한 사진은 조선일보에 ‘조의환의 제주 스케치’라는 이름으로 연재가 되었다. 그의 입체적인 디자인, 변화를 이끄는 디자인은 사물과 세상을 바라보는 그만의 특별한 시각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른다.  

 

마당, 멋, 음악동아, 월간 멋, 월간조선, 가정조선, FEEL, 조선일보 등 평생을 활자매체를 떠난 적 없는 그는 현재 사진가인 동시에 여전히 책을 디자인하는 현역 디자이너다. 오랜 시간 비정치적인 인권단체의 활동을 돕는 디자인 재능기부도 해오고 있다. 

 

조의환 디자이너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응용미술과에서 시각디자인 전공으로 졸업했고, 동 산업미술대학원에서 사진디자인을 수료했으며, 한양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에서 신문출판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희성산업(엘지애드)을 시작으로 홍성사, 희명기획에서 광고디자이너로 활동하기도 했다. 사단법인 한국시각정보디자인협회 수석부회장을 지낸 그는 방일영문화재단 한글글꼴지원사업을 창안, 본문용 글꼴 개발자를 후원하는 일을 해왔다. 한양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겸임 교수를 지내기도 했으며, 디자인 전문회사 ‘design 54’를 운영하기도 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탈북자 지원, 북한인권 신장을 위해 활동하는 (사)북한인권시민연합 이사, 아시아지역의 여성과 아동 인권 신장을 위한 휴먼아시아 고문, 여러나라 인권활동가와 연구자들이 설립한 전환기정의 워킹그룹 자문위원, 세계 80여 대학이 회원으로 있는 실크로드대학연맹 고문을 맡고 있다. <사진예술> 편집자문위원이기도 한 그는 지금까지 6번의 개인전 및 다수의 그룹전을 가졌고, 두 권의 사진집과 한권의 사진 에세이집을 냈다. 신문협회상(가로쓰기 신서체 개발 연구 공로, 신문협회 1999년), 자랑스러운 홍익시각디자인 상(시각디자인과 60주년 기념 제1회 수상자, 홍익대학교 2023년)을 수상한 바 있다. 

 

Q. 평생을 미디어 디자인 현장에서 디자이너로 활동하셨다. 


첫 직장이 광고대행사였다. 대학 선배인 안상수 형이 날 뽑아 함께 일했고, 잡지 <마당>에서도 안 선배가 또 날 불렀다. 광고디자인을 그만두고 잡지 디자인을 시작했다. 81년부터 지금까지 계속 잡지, 단행본, 신문 등 미디어 디자인, 활자매체 디자인을 계속해왔다. 조직에서 월급쟁이 디자이너로 그렇게 오랜 시간 활동한 사람이 많지 않다. 대부분 중도에 다른 일을 하거나 스튜디오를 차리거나 교육현장으로 가신 분들이 많다. 직장에서 정년까지 채우지는 못했지만 조선일보에서 27년을 일했으니 여러 기회를 누릴 수 있게 해 준 좋은 직장이었다. 돌이켜보면 평생 무료하게 쉰 적 없이 바삐 살았고 현재도 마찬가지다.

 

Q. 잡지에 대한 관심은 언제부터 시작됐나. 


군대에 갈 때 아버지에게 부탁해 <뿌리깊은나무>를 창간호부터 정기구독해 봤다. 사진에 관심이많았기 때문이었다. 디자인이나 사진 전문서적이 드물었던 가난한 학생의 유일한 취미이자 자료 수집 방식이 명동 중국대사관 앞 헌책방 탐방이었다. 주한미군들이 보고 버린 <라이프>, <플레이보이>, <내셔널지오그래피>, <파퓰러 포토그라피> 등을 사서 봤다. 우리보다 앞선 그들의 인쇄문화를 볼 수 있었다. 그 안에는 일러스트레이션, 광고, 사진 모든 것이 있었다. 잡지를 보며 디자인과 사진 공부를 했고, 나도 모르게 잡지에 익숙해졌다. 

 

당시엔 외국 디자인 잡지 정기구독도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편지를 보내 인보이스를 받고 외환은행 본점에 가서 무역외지급인증 허가를 받아 전신환을 항공우편으로 보내면 잊어버릴 만할 때쯤 책이 왔다. 월급 받아서 상당한 비용을 책 사보는 데 쓸 수밖에 없었다. 나에겐 잡지가 참 끈질긴 인연이자 운명이고 선생이나 다름없다. 정치적 격변기에 대학 생활은 휴교령 등으로 제대로 수업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사회에 나와보니 배운 게 없는 한심한 수준이었다. 운 좋게도 국가 경제 고도성장기에 사회에 진출하다 보니 수월하게 취직도 하고 분에 넘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음악동아> 창간호 

 

<월간 멋> 창간호

 

 

Q. 여러 잡지를 창간 했다. 


81년 <마당>을 시작으로 잡지를 디자인하기 시작했는데, 81년부터 85년까지 총 5권의 잡지의 창간을 함께했다. 당시 서른도 되지 않았던 나이에, 경력 5년 남짓의 디자이너가 경험하기 힘든 일이었다. 디자이너 초년병 시절 함께 일한 선배이자 동료 안상수 선생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짧은 기간에 어마어마한 기회가 주어졌고, 거칠고 용감했고 다소 무모했다. 실험과 모방, 창작이 뒤얽힌 작업을 했던 것 같다.  

 

Q. 이후 신문사로 자리를 옮겨 신문을 디자인하게 됐는데.


조선일보에 입사하기 전부터 언젠가는 신문 디자인을 하게 될 거라 예상했었다. 1984년 조선일보에 입사했는데 신문을 만드는 편집국이 아닌 잡지를 만드는 출판국에 들어갔다. 신문은 디자이너에게 높은 진입 장벽이 있었다. 이를테면 편집기자들이 디자이너와 카피라이터의 역할을 하며 단단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가 가장 오래된 최대 발행부수와 영향력의 신문을 리디자인한다는 것은 디자인적으로만 접근할 수 없는 일이었다. 1997년 조선일보 편집국으로 자를 옮겨 편집위원으로 조선일보 리디자인 프로젝트를 하게 되었다. 리디자인을 한다고 전통과 수많은 애독자들의 익숙함을 한순간에 버릴 수는 없었다. 갓을 쓰고 다니던 사람들에게 갑자기 힙합모자를 쓰고 다니라 할 수 없는 일 아닌가. 이른바 연착륙이라는 선택이 불가피했다.

 

과감한 디자인적 시도를 하기는 어려웠다. 다양한 디자인을 제시했지만 내부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1등 매체는 혁명을 원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신문의 열독자들의 눈에 거슬리지 않으면서 가독성, 심미성을 높이는 활자를 어떻게 개발할까 고민했다. 혼자만의 힘이 아니라 우리나라 디자인계 역량을 총동원해서 변화에 기여해보자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조선일보 가로짜기 리디자인 후 1면

 

조선일보 가로짜기 전용 서체

 

조선일보 가로짜기 전용 신문명조

 

조선일보 본문용 서체 변천

 

조선일보 신구서체 조판 품질 비교

 

 

Q.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했나. 


조선일보 전산화제작(CTS)과 지면 리디자인과 전용 서체 개발 프로젝트였다. 납활자를 이용해 조판하던 것을 컴퓨터로 조판하고 이미지까지 포함해 편집해서 인쇄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1새대 CTS가 텍스트만을 전산으로 조판하는 것이었다면 2세대 CTS는 이미지와 텍스트를 함께 조판할 수 있는 것이었고, 3세대는 광고까지 함께 조판 편집할 수 있는 것이었다. 조선일보는 납 활자 시스템에서 갑자기 3세대 CTS로 전환했다. 

 

전산팀에 프로젝트가 맡겨졌는데, 그들은 속도와 안전성, 편의성, 경비절감, 인원절감 등이 목표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상품의 변화를 끌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난 출판국의 디자인 책임자로 해당부서가 아니었지만 보고서를 제출했다. 납활자로 만든 신문을 전산화한다면 독자입장에서 얻는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데 결과물이 납활자로 만든 것과 똑같다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내용이었다. 좀더 읽기 편하고 아름답게 지면이 바뀌어 독자가 납활자로 만들었던 신문보다 훨씬 나은 신문을 보게 되었다고 느끼게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경영진에 불려가게 되었고 조선일보 가로짜기 리디자인과 신 서체 개발 계획을 입안 추진하는 중책을 맡게 되었다. 

 

Q. 무척 보람을 느꼈을 것 같다.


가장 보람된 일이라 할 수 있다. 단순히 ‘디자인을 했다’가 아닌 거대 신문이 면모를 일신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했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로마자 환경에 맞게 개발된 조판프로그램에서 동양문자 특히 한글 조판의 완성도를 어떻게 끌어 올릴 것인가가 문제였다. 띄어쓰기가 있고 많은 문장부호를 사용하고, 한자도 병기하는 신문 환경에서 완성도 높은 조판 품질을 위해서는 서체 개발에서부터 고려해야 할 것이 많았다. 조선일보 리디자인 프로젝트에 힘을 보탠 서기흔, 홍성택, 권혁수, 석금호 선생 그 밖에도 사진, 일러스트레이션, 인포그라픽 분야에 힘을 보탠 디자인계 여러분이 함께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현장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디자인협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했다. 특히 타이포, 편집분야의 확산과 정착에 대한 생각이 많았다. 한국그래픽디자이너협회(KOGDA) 시절 1990년과 1991년 용평에서 편집디자인 세미나를 열었는데 당대 대부분의 편집 디자이너들이 참여하는 등 큰 호응이 있었다. 3회 편집디자인 세미나는 92년도에 이천에서 열렸다. 편집디자인 세미나는 디자인사에 기록할만한 세미나였다고 자평한다.


다른 한 가지 보람 있는 일은 디자인계에 처음으로 창작지원 사업을 시작한 일이다. 예술분야는 지원사업이 활발한데 비해 디자인 분야는 전무한 것이 불공정하다고 생각했다. 2003년 방일영문화재단에서 좋은 기회를 주어서 ‘방일영한글꼴지원사업’을 제안했고, 한글 본문 글꼴을 개발하는 폰트 디자이너들을 선정해 2000만원의 창작지원금을 주는 디자인계 최초의 지원사업이 방일영문화재단과 문화예술위원회 그리고 한국시각정보디자인협회(VIDAK)의 주관으로 시작됐다. 이 지원사업으로 지금까지 7종의 새로운 본문용 한글 폰트가 탄생했고 대부분 출시되었다. 지금은 한국타이포그라피학회가 주관을 맡고 있고 여덟 번째 사업 공모가 진행 중이다.

 

6.25전쟁 50주년 특별기획전 '아!6.25', 2000년, 전쟁기념관

 

'아! 고구려', 1993, 국립현대미술관

 

정부수립 50주년 기념전 '우리들의 이야기', 1998, 예술의전당

 

광복 70주년 '사랑하라 대한민국', 2015, 문화역서울284

 

 

Q. 대형 전시 기획도 많이 하셨는데. 


디자인 외에 해온 의미 있는 일 중 하나가 전시기획이다. 지금은 왠만한 전시가 다 입체적 연출로 이루어지지만 내가 처음 전시에 손을 댈 때만 해도 그러한 전시 문화는 없었다. 현대사 등 디자이너가 다루기 힘든 무거운 주제의 전시에 참여하게 된 경우가 많았다. 매체 디자인을 통해 그동안 훈련된 주제에 해석 능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어렵진 않았고 재미있었다, 책이나 전시공간이나 어차피 공간을 다루는 것인데 처음이 어려웠지 경험이 쌓여가니 자신감이 생겼다. 

 

처음으로 기획했던 전시가 ‘아! 고구려’였다. 집안 고구려 고분 사진을 사진부 기자들이 찍어왔고, 그걸 가지고 전시를 하자 했다. 대다수가 사진을 프린트해서 액자에 넣어 전시하는 사진작품전을 생각했다. 하지만 어렵게 찍어온 사진을 그렇게 전시하는 건 아니라 생각했다. 입체적인 전시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스케일을 느낄 수 있도록 실물 크기로 고분을 만들고, 고분 벽화 패턴을 가지고 복식도 재현하고 디오라마도 만들었다. 당대 최고의 패션 디자이너인 오리리널리의 이신우 디자이너에게 의뢰해 뮤지엄 숍 수준의 굿즈 개발도 했다. 최고의 전시 디자인 전문회사인 ‘인타디자인’과 협업했다. 조선일보 문화부와 사진부, 문화사업부가 참여해 내용의 완성도를 높였다.

 

전시는 대단히 성공적이었고 입체적인 초대형 전시와 조선일보의 매체 파워 그리고 고구려에 대한 아련함 등이 성공에 한 몫을 했다. 과천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렸는데, 당시 사당동에서부터 과천현대미술관까지 차가 줄을 이어 늘어설 정도였다. 전국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총 358만명의 누적 관람객이 전시를 보았다.

 

Q. 정말 폭넓게 디자인을 하셨는데. 


좋은 시절을 잘 만나서 가지고 있던 능력보다 과분하게 많은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었고 훌륭한 편집자와 동료들을 만난 것이 행운이었다. 시대가 사람을 만드는 것 같다. 

 

Q. 사진은 언제부터 하셨나. 


대학시절부터 사진을 했다. 배병우 작가가 대학 같은 과 2년 선배였는데 함께 사진을 공부했다. 암실을 차려 놓고 촬영도 다니고 작업을 함께 하기도 했다. 

 

전업 사진가가 아니므로 출장을 갈 기회가 있거나 외국에 나갈 기회가 있으면 열심히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사진에 대한 이해가 생기면서 잡지 편집에서 사진의 해석과 편집에 대한 공부가 늘어갔고 사진가와의 협업이 잘 이루어졌다.

 

 

조의환 작

 

 

Q. 사진의 주제는.


첫 개인전은 윤회, 시간을 큰 주제로 삼았다. 오랜 시간 바닷물에 쓸려 다니다 원래의 형태가 아닌 다른 모습으로 육지에 표류한 나무 쓰레기를 수집해서 스튜디오에서 찍었다. 땅에 뿌리를 박고 살다 사람 혹은 자연재해에 의해 바다로 쓸려가 떠돌다 다시 육지에 상륙한 나무들, 형태가 바뀌어 있는 것들이었다. 어마어마한 시간이 흘러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온 그런 모습말이다. 

 

 

조의환 작

 

 

제주에 있을 땐 자연과 농부가 만든 조형요소를 찍었다. 수많은 사진가와 관광객이 제주를 사진으로 기록하니 남들이 관심 두지 않는 것을 찾았다. 조선일보에 사진과 글을 연재한 ‘조의환의 제주 스케치’는 이방인과 제주사람들이 무심히 보는 것들을 찾아 정보를 주기위해 애썼다. 이방인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을 찾아 헤맸다. 품을 많이 팔았고 공부를 제법 했다. 제주도 구석구석을 다니며 사람을 만나다 보니 새로운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제주 밭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제주사람들에겐 생업이다. 관광 이상으로 중요한 산업이 바로 농사이기도 하다. 그렇게 제주의 밭을 찍게 되었다. 

 

 

 

조의환 작

 

 

Q. 요즘엔 어떤 사진을 찍나.


제주 프로젝트를 끝내고 요즘은 가까운 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위주로 찍고 있다. 산책삼아 고궁에도 가고, 가까운 곳으로 가서 사생하듯 촬영을 한다.

 

오래전부터 담을 찍는다. 담은 여러가지 의미와 기능이 있다. 자신을 보호하는 울타리, 침략자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담너머로 보이는 풍광에 대한 호기심과 관음증이다. 담은 세계 어디를 가나 쉽게 볼 수 있어 여행 중에 심심풀이를 겸해 찍고 있다. 최근엔 동양화의 공간구성이나 해석에도 관심이 많은데 사진이라는 미디어로 새롭게 해석해 보고 싶다.

 

Q. 새로운 전시 계획은.


2022년 개인전을 했고 지금은 고민중이다. 찍어 놓은 작품은 많다. 모두 정리를 해서 아트 북처럼 한 권으로 엮을까, 디지털 프린트로 제본을 해서 한 두 권만 만들까 생각하고 있다. 

 

김녕만 사진집 <장사익 당신은 찔레꽃>

 

 

Q. 요즘은 어떻게 지내시나. 


제주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다시 올라온 지 5년이 됐다. 사진을 찍고 책을 만드는 일을 계속해서 하고 있다. 놀면서 하고싶은 일만 하며 살고 있다. 어디서 내 재능이 필요하다고 하면 비용 관계없이 하고 있다. 단 조건이 있다. 사회에 이로운 일인지, 내가 해줄 만한 일인지 아닌지, 나의 도움이 꼭 필요한지가 기준이다. 알아서 해달라고 일을 맡겨주는 일이면 언제든 한다.

 

세계실크로드대학연맹 WRICOS 2024 Poster 

 

전환기정의워킹그룹 poster 2023 

 

 

한 20년 이상 서 너 곳의 인권단체에 디자인 재능기부를 해오고 있다. 탈북민과 북한인권, 아시아여성아동 인권 활동 단체 등 비정치적 인권 단체다. 세계실크로드대학연맹이라는 단체와 전환기정의 워킹그룹 등 내 나름 바람직한 활동을 한다고 판단되는 몇 곳, 그곳에서 날 필요로 하면 언제든지 재능기부를 한다. 혼자 작업을 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Q. 요즘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은. 


지금까지 해온 내 것들을 어떻게 정리하느냐가 가장 큰 관심사다. 사진을 계속해서 찍고 있는데 이걸 이제 어떻게 할지가 고민이다. 70이 넘으니 5년안에 내 손으로 내가 해온 것들을 다 정리하는 것이 목표다. 누구든 자기의 무언가를 남기고 싶어한다. 하지만 욕심을 내고 싶진 않다. 겸손하게 정리하고 싶다. 

 

Q. 앞으로의 계획은.


재능기부를 하고 있는 세계실크로드대학연맹은 세계 80여 대학이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는 국제기구다. 연맹에서 여는 각종 행사에 필요한 책자, 포스터 등을 디자인한다. 매년 회원 대학에서 총회, 학회가 열리는데 거기에 참석하고 있다. 코로나 때문에 그간 가지 못했는데 올해부턴 다시 활동을 시작한다. 여건이 허락하면 실크로드 대상처럼 여러 나라를 여행하는 게 꿈이다.

 

인터뷰어_ 정석원 편집주간(jsw@jungle.co.kr)
에디터_ 최유진 편집장(yjchoi@jungle.co.kr)
사진제공_ 조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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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진 에디터
감성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디자인, 마음을 움직이는 포근한 디자인 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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