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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인터뷰

다섯 고양이와 노석미의 삶

2007-04-24


말을 걸고 싶은 그림이 있는가 하면, 말을 걸어오는 그림이 있다.
노석미의 작품은 말을 걸어왔고, 말을 걸고 싶은 방식으로 다가왔다. 소통 혹은 상통.
그 독특한 색감과 매끈하지 않은 붓의 느낌은 인디언들처럼 원초적인 방식으로 말을 걸어온다. 시적인 상징성을 간직하되 빙빙 돌려 말하지 않고 가슴에서 가슴으로 툭 던진다. 노석미 그림 속 그들의 시선은 조금은 바라보는 이를 긴장시키고, 또 한편으로는 뿌듯하게 만든다. ‘나를 보아주는구나’라는 의식에까지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일까, 그를 만난다는 사실은, 최소한 그의 작품에 제대로 눈도장을 찍어본 이들에게는 묘한 설렘을 준다. 그림을 통해 이미 그를 만나봤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그 실체를 확인해야 할 차례니 기대와 실망에 대한 두려움이 교차하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취재 | 남궁경 기자
사진 | 황규백, 안성철 (salt&mute)


그런 기대와 떨림을 갖고 만난 노석미는, 어쩌면 그의 작품을 통해 기대했을 ‘독특한’ 외양과는 거리가 있다. 어느 쪽인가 하면 미야자키 하야오 그림체로 그려진 ‘소년’의 느낌이다. 온갖 화려한 색채가 얼굴에 꽃피워지는 도심의 여성들 속에서 어쩌면 그 반듯함이 눈에 더 띌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얼굴로 방긋 웃으면 보고 있는 이의 마음이 ‘턱’ 놓인다. 긴장과 경계가 풀어지며 마치 그의 그림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또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진다.

그렇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시간이 마냥 즐거운 girl talk일 거라고 기대한다면 말이다. 물론 그와 함께 대화를 나누는 대부분의 시간이 따뜻한 공감과 지혜로운 경험들로 채워진 것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상대방이 무슨 어리광과 나약한 발언을 해도 모두 공감을 표해주는 자애로운 상담가는 아니다. 삶의 태도에 대한 그의 엄격함은 때로 듣는 이를 불편한 부끄러움으로 안내하기도 한다. 그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나약함을 반추하게 되었다면, 말이다. 그리고 그의 작품에 더 큰 신뢰를 보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 이야기들이 쉽게 나온 것이 결코 아님을 알게 되었으니.


흘러가는 것들에 대한 애정, 그리고 그것을 붙잡을 수 없다는 쓸쓸한 자각은 흔들리는 20대였던 그를 일으켜 세웠고, 작품으로 심지를 다지게 했으며, 이제는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영향력 있는 아티스트로 빛나게 만들었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삶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을 흉내 내어, 애정과 관조의 중간 지점, 즉 그가 대상을 바라보는 그 심미적 거리에서 그를 바라보고자 노력해 보았다. 그러나 고백하자면, 그가 권하는, 인스턴트임이 분명한데도 이상하게 입맛에 달라붙는 커피에 취하고 다섯 마리 고양이와 함께 뒹구느라 ‘심미적 거리 유지’에 성공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경계선에 서보려고 했던 의도와는 달리 어느새 마음은 노석미와 다섯 고양이의 삶 경계 안쪽에 살짝 담그고 만 것이다.

볕이 들어와 만드는 그림자와 그의 손길이 묻은 집안 구석구석의 조화가, 가는 시간도 멈추게 할 것만 같은 오후였다……


그에게 작업관을 물어보았다. 말이 조금 웃기긴 하다. ‘작업관’. 어쨌든…
“기본적으로 작가와 작품은 동일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작가의 일상을 표현한 작품이 누군가 작품을 접한 이에게도 그의 일상으로 느껴졌다면 그것이 바로 공감이겠죠. 작품은 그 내부적인 욕구가 보는 이에게 전달될 때라야 완성되는 것 같아요. 공감 그 자체가 작업인 셈이죠.”

노석미는 그의 책 <네가 행복했으면 해> 에서 ‘고양이라는 존재의 슬픔’에 대해 표현했다. 고양이를 길러본 이들은, 그래서 그 존재에 매혹되어 본 이들이라면 그 느낌을 어렴풋이라도 느껴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정리되지 않는 감정에 대해 적확한 표현으로 단상을 던져준 그의 시각이 놀라웠다. 머리를 치게 만드는 하이쿠를 읽었을 때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게 된다. 그, 노석미에게 고양이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정확하게, 고양이를 포함해 그가 관심 쏟고 있는 오브제들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모든 생명체는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아, 늘 그런 건 아니고, 정말 아름다운 순간이 있는거죠. 아름다운 순간을 보고 감동하게 되는데, 그 순간, 시간성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결국 존재 자체보다 시간성, 순간포착이 중요한 거죠. 그런데 고양이는 그런 순간을 자주 보여주는 존재에요. 비단 고양이만 그런 건 아니지만요.”


그의 집은 동두천에 있다. 서울에서 멀다면 멀고, 사실 가깝다면 또 가까운 곳이다. 노석미의 집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은 돈으로 사거나 훔치지 못할 거다. 작품과 오브제와 작가가 일체 되어 있는 공간. 이곳이 아파트라는 사실을 문득문득 잊게 된다.

그에게 예술가로 산다는 것에 대해서 물어보면서도, 평소에 들려온 얘기들과 편견 덕분에 다분히 부정적인 대답을 기대했다. 하지만 기대와 전혀 다른 대답이 돌아왔다. 뭐라고 반론을 제기하지 못할, 강력하고도 엄격하고도 현명한 대답이었다.

“글쎄, 생각만큼 나쁘지 않아요. 어차피 외국에서도 예술가들은 다들 돈 못 벌어요. 다른 점이 있다면 선진국의 경우에는 나라가 가난하지 않으니 소득이 없어도 살 수 있다는 것 정도겠죠. 마치 우리나라는 굉장히 여건이 나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요, 가만 보면 각 나라마다의 장단점이 있는 것 같아요. 일례로 미국은 메인스트림이고 큰 물일 뿐이지 그 안에서의 예술가들은 다들 힘들게 생활하고 있거든요. 가난하다는 것도 사실, 저는 가난했기 때문에 예술을 했어요. 예술 하면서 돈을 많이 벌겠다고 생각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 아닌가요? 그건 어디까지나 선택의 문제인 거고, 돈 문제 때문에 예술 할 여건이 안 된다고 말하는 건 자신에 대해서 너무 나약한 태도인 것 같아요. 사람은 누구나 나약하고, 나약해지는 순간이 있어요. 그 나약함도 바라볼 줄 알아야 관조하게 되고 비로소 자신이 편안해질 수 있는 것 같아요.”


얘기를 듣는 동안 개인적으로 조금 부끄러워졌다. 가난을 두려워하는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게 된 것이다. 간신히 부끄러움에서 헤어나와(쉽지 않았다), 그의 독특한 작품에 대해서, 그의 입을 통해 듣고 싶다고 말했다.

“제 작품은 순간의 포착, 음 기의 느낌을 포착하는 거에요. 기, 에너지죠. 예전에는 소재에 집착했는데, 지금은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게 에너지구나 생각해요. 다른 이들의 작품에서도 그런 순간 포착이 가능할 때 예술적 쾌감을 느끼게 되더라구요.”

이왕 ‘기’에 대해서 얘기가 나온 김에 귀신을 본 적 있느냐는 질문도 해버리고 말았다.
“본 적 없어요. 저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굉장히 단순해서 그런 거 전혀 못 느끼고 살고 있거든요? 그런데 제 주위에 귀신 보는 친구가 있어요…... (지루할까 봐 이하 생략. 정말로 궁금해서 못 견딜 것 같은 분들만 에디터에게 메일 주세요)”

그에게 싫어하는 유형의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율배반적인 사람이 싫어요.”

그의 작품은 아포리즘과 곁들여져 완성되어 ‘책’의 형태로 출간되는 것이 매우 어울린다. 그가 내놓는 아름다운 단상의 원천이 궁금했다.
“저는 책에서 많은 것을 얻어요. 글과 그림은 결국 내러티브를 지향하는데, 연필과 붓이라는 도구의 차이인 것 같아요. 주로 문학, 소설에서 영향과 소스를 얻는 편인데, 문자만 주어진 상황은 많은 상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한편으로 그림은 상상력을 제한하기도 하고 동시에 확장하기도 하지요. 상반된 방향으로 발전이 가능한 것 같아요. 시나 소설의 문장을 통해 연상되는 작업을 할 때도 있어요.”


얘기를 듣다 보니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일지 무지 궁금해졌다.

“음…나쓰메 소세키. 소세키의 경우는 30대 들어서 더욱 좋아진 경우에요. 이제야 이해가 된다고 해야 하나. 100년 전 사람인데도 현대성을 지닌 흔치 않은 작가죠. 변하지 않는 본질을 다루고 있기 때문일 거에요.”

그의 보이쉬한 외모는 어느 순간 번득이는 아름다운 여성성을 드러낸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몇 번인가 노석미는 그런 순간을 보여주었다. 그건, 보통에 비하면 빈번한 편이다. 그런 순간을 ‘자주’ 보여주는 고양이와 동거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다섯 고양이에 둘러싸인 퇴폐 공주의 이미지를 찍고 싶다고, 사진의 ‘퇴폐성 컨셉’을 강조하는 기자를 향해 그가 호쾌하게 웃더니 어디서 났는지 참으로 궁금한 꽃무늬 셔츠를 입고 나타났다. 셔츠 사이로 살짝 보이는 그의 맨살이 참으로 퇴폐적으로 보였다. 말해줄까, 하다가 오히려 말해주는 것이 실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기자의 억지 요구를 모르는 척 들어주는 그의 뛰어난 배려일 지도 모를 일이다. 역으로 기자는 이런, 어쩌면 그의 모른 척, 하는 의도에 말려든 것인지도.
인터뷰와 촬영이 끝나고, 적당히 들썩한 이별인사와 예의를 갖춘 감사의 말도 남긴 채 노석미와 다섯 고양이가 사는 집의 문을 ‘탁’ 닫고 나왔다. 번잡스러운 방문객들이 휘젓고 떠난 공간은 호젓하고도 평화로운 상태로 되돌아가 있을 것이었다. 문득, 처음 보면 깜짝 놀랄 정도로 뚱뚱한 고양이 후추가 떠올랐다. 후추는, 놀랍고 웃기고 아름답고 슬프다. 이 단어들의 순서는 곧 노석미의 글과 그림을 마주했을 때 느끼는 감정의 순서이기도 하다. 고독과 소통을 동시에 열망하는 노석미의 작품은 모순덩어리지만 그래서 그의 작품은 보편적이며 소유욕을 부추긴다. 놀랍고 웃기고 아름답고 슬픈 존재들-노석미와 다섯 마리 고양이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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