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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 | 월드리포트

모스크, 역사의 상징

김형기 ㅣ 테헤란 | 2013-11-13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무슬림들의 예배장소인 모스크의 특징은미나렛이라고 알고 있는 뾰족한 첨탑과 둥근 돔 지붕으로 기억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양파 모양의 돔 지붕과 첨탑을 가진 인도의 타지마할은 아쉽게도개인의 무덤이며, 오스만제국의 치하에 첨탑이 추가된 이스탄불의 아야소피아는 황금색 모자이크가 빛나는 동로마 제국의교회였다. 


 


글 ㅣ 김형기 테헤란 통신원


 


7세기로 돌아가,  모스크의 시작은 예배하러 모인 사람들이 선지자 무함마드의 집을 사용한 것이 그 기원이 된다. 마당이 넓은 집, 벽 안쪽에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일렬로 기둥을 세운 후, 더운 태양아래 나뭇잎으로 지붕을 만들어 기도하는 이를 위해 그늘을 만들어낸 공간, 그 단촐한 모습이 모스크의 구조에 전부였다. ()들에 둘러 쌓인 중정을 갖는 지금의 형태는 작은 공간이 주랑 공간과 아케이드로 확대되면서 생겨난 것이며, 무슬림의 기도방향인 메카의 방향을 나타내는메흐럽을 제외하곤, 이슬람의 상징처럼 보이는 돔 지붕과 예배시간을 알리는 첨탑 같은 것들은 사실 이후에 추가된 것이다. 




<모스크>는 이슬람 이전에 공공건물이나, 군주둔지, 신전 등에서 사용하던 중동의 건축요소들과, 공간의 필요성 즉사람들이 모인다는 종교건축의 특징과 맞물리면서, 단순한 예배당의 모습이 아닌  역사를 담은 도시의 랜드마크로 재탄생하게 된다.  


 



 


<야즈드 금요모스크>, 이슬람 이전의 이미 <사원>


 


야즈드에 대한 기록은 BC 3000년전으로 메디아 시기에 이미 존재했던 곳으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도시중 한 곳이다. 또한 서양과 인도를 연결하는 향신료 길의 중심에 있었던 야즈드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무역이 기반이 된 웅장하고 훌륭한 도시로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역사적 기록을 제외하더라도, 지금도 물이 흐르는 2400년 전에 지하 수로시스템 만으로, 어떻게 그들이도시라는 이름으로 존재했었는지를 유추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8세기, 사산조 페르시아의 폭정에 신음하던 이란은 이슬람의 침략을 받으며, 큰 충돌 없이 그들의 종교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교도에게 인두세만을 요구했던 이슬람 세력의 지배 방법은, 이란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조로아스터교를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고, 자신의 종교를 자리잡게 하는 또 다른 배경으로 작용한다. 이 시기 야즈드는 유대인과, 조로아스터교, 무슬림들이 함께 거주하는 도시의 형태로 변화하게 되면서, 8개의 지구로 나뉘어진 도시형태를 띠게 된다. 


 


<야즈드의 금요모스크>는 이슬람 침략 이전에 조로아스터교의 사원이었던 곳으로, 이슬람을 믿는 이가 늘어나면서 함께 기도장소로 사용되었다는 기록과, 이후, 그 장소에 모스크를 짓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남아있는 곳이다. 정확하게 과거의 <불의 사원>은 현재의 모스크의 중심은 아니지만, 모스크의 일부에 유적이 존재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일까. 이 모스크 내부에는 그들의 이전부터 사용되었던 그들의 상징들이 이슬람의 타일공예와 함께 캘리그래피 곳곳에 묻어난다. 


 





권력의 역사, 그리고 모스크의 변천


13세기 몽골이 이란을 공격했을 때, 야즈드는 사막에 둘러 쌓인 지형적 조건으로 인해, 가장 마지막 점령지로 결정된다. 생각해보면, 사막 중앙에 놓인 도시는 공격자에게도 전략상 별로인 지역일 뿐만 아니라 방어자에게도 딱히 도망갈 곳 없는 지형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란 북부 호러선 지방의 군주에 손에 잘려나간 몽골 상인의 죽음을 필두로 시작된 몽골의 침략은 이란에게 있어선 역사와 문화는 물론, 3/4의 전체 이란 인구가 몰살되는 충격적인 사건으로 기록된다. 


적군이 사막을 넘어 성곽에 다 달았을 때, 현명한 야즈드의 영주는 시민보호에 대한 약속을 조건으로 항복의사를 밝힌다. 이렇게 지켜낸 야즈드의 문화와 민심은 이후 계속되는 몽골 군주의 치세(14세기 모자파린 시대와 티무르 시대)속에 사막의 도시로 꽃을 피운다. 도시의 확장, 랜드마크의 건설 등 그렇게 그들의 정치적, 제정적 지원 속에 건축물들이 갖는 정치적 연관성을 기반으로 탄생된 것이 지금의 <금요모스크>. 


 


 


셀주크 시대(1037-1220)에 지어졌던 단순한 정방형의 모스크는 14세기 2번의 증축을 통해, 2겹으로 된 돔 지붕과 48m의 미나렛(첨탑)이 더해지면서 당대 최고의 이슬람 건축물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타일장식은 물론이고, 시아파의 성지인 호세인이 살해당한 지역(현재 이라크)에 흙까지 가져와 모스크의 일부 메흐럽(메카를 향하는 방향을 나타내는 벽감)장식으로 사용된 것을 보면 이 모스크에 대한 군주들의 애정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부분이다. 역사 속 사라져간 수많은 군주들, 이제 역사의 기념비가 된 건축물에서 야즈드 사람들은 그들의 이름을 기억한다. 


 



 






1000
년의 역사, 캘리그래피


 


캘리그래피는 이슬람이 우상숭배를 금지하면서 책 안에 삽화를 제외하곤 사람과 동물을 건물에 그리거나 조각하는 것을 금지시키면서 생겨나, 서체, 카펫, 공예 건축의 외벽의 장식으로 사용되며 정점에 이룬다. 장인은 <야즈드, 금요모스크>에 타일 공예로 장식할 코란의 구절을 고르고, 자신이 사랑하는 이슬람 성인의 이름을 넣을 곳을 계획했다. 때로는 도형에 묻힌 아라베스크 무늬 속에서, 그들만이 코드로 한 조각 한 조각에 750년전 비밀을 모스크에 새겼다.


 





<
모스크>는 건물이기 이전에 종교적 결합체이다. 메카를 나타내는 방향은 건물의 축이 되고, 성인들의 이름, 코란의 문구가 쓰여진 캘리그래피는 건물의 형태와 함께 수치로 계산되어 제작에 들어간다. 때로는 지켜야 할 종교적 규율과 규칙들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이미 정해져 있는 것들도 많다. 어쩌면 이런 이유로 모스크를 구조와 역사만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테러와 종교적 편견만으로 이슬람을 바라본 사람이라면, 이런 구조적 설명보다 50℃ 쯤 되는 사막기후에 길을 걷다가 쉬고 싶은 마음에 기도실을 찾아 한번 들어가는 것이 모스크를 이해하는 더 나은 방법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곳에는 도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에 존재하며, 씻을 곳이 있고(무슬림에겐 기도전 몸을 깨끗이 하는 예식이 존재한다), 기도를 위해 깔려진 카펫과 함께 여름 기도공간이 늘 그렇듯, 7~8미터가 넘는 천장고가 만들어낸 시원한 그늘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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