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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where, Now here

2008-11-11

지난 10월 8일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이 문을 열었다. 이 집은 백남준이 열고, 닦고, 걸어온 길을 기리며 백남준이 펼쳐 보였던 예술세계를 닮은 문화 매개공간을 지향한다. 어디에도 없던(no where) 공간이 지금 여기(now here) 태어났고, 지금 도약하기 위한 축제의 서막을 알린다.

에디터 | 정윤희(yhjung@jungle.co.kr)
사진 | 스튜디오 salt

백남준이라는 이름에서 단박에 떠올릴 수 있는 것은 현란한 모니터 화면일 것이다. 신기해서 보게 되고, 보다 보면 어지럽고, 보고 나서도 눈 앞에 잔영이 남는 모니터 화면은 백남준의 두번째 이름이나 다름없다. 어느날 갑자기 어디에도 없던 미디어아트를 들고 대중 앞에 나타난 백남준은 타계할 때까지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냈다. 대중은 백남준에게 미디어아트라고 쓴 화환을 걸어주었고, 그가 보여주는 것만 보았다. 대중은 그의 미디어아트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는 관심이 없었고 그저 미디어아트로 주목 받는 백남준만을 보아왔다. 덕분에 백남준은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었다.
뇌졸중으로 괴로워하던 와중에도 ‘어디에도 없던 것’을 만들기에 열중하던 백남준은 결심한다. 진득하게 한 곳에 자리를 잡고, “무슨 음식이나 깨뜨려 먹는 강한 이빨*”을 주기 위한 공간을 만들겠다고. 백남준아트센터는 그렇게 시작됐다. 2001년 경기도와 멀티미디어 아트센터 건립을 합의한 후, 2003년 UIA공인 국제현상설계공모를 통해 독일 건축가 크리스텐 쉐멜과 마리나 스탄코빅이 공동 설계한 작품 ‘매트릭스(The MATRIX)’를 바탕으로 2006년 본격적인 착공에 들어갔다.

외부 전면이 유리 파사드로 구성된 이 건축물의 앞뒤는 상이하다. 앞모습이 ‘예술센터’로서의 위용을 숨김없이 드러낸다면 뒷모습은 오랜 세월 물로 깎은 조약돌처럼 반짝거린다. 이 음전한 조약돌처럼 생긴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온통 직선이다. 아무런 장식 없이 하얀 벽으로 이뤄진 직선들은 오히려 날카로운 느낌 대신 영상을 선보이는 하나의 벽으로만 인지될 뿐이다. 전시되는 대부분의 작품들이 영상이기 때문에 조명을 다소 어둡게 해 놓았다. 그 덕분에 날을 벼린 직선들은 은근한 어둠에 기댈 수 있었다.
그렇다고 마냥 편안하고 아늑한 공간이 되는 것은 또 아니다.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게 도와주는 이 직선들은 현란한 작품들에 집중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직선들이 만들어 놓은 벽과 벽 사이를 지나다 만나게 되는 공간들은 그리 넓지 않아도 공간 자체의 용도를 십분 발휘하고 있다. 여백이라고도 설명할 수 있는 공간의 용도는 실험적인 작품을 더 실험적으로 만들어준다.

지난 10월 8일 개관한 백남준아트센터는 한국에 돌아가는 것이 소원이었고, 한국에 묻히고 싶었던 ‘백남준이 오래오래 사는 집’이다. 이것을 모티프로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이 2001년, 백남준과 아트센터 건립에 대한 협의를 마친 후부터 추진해 온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긴 기다림 끝에 문을 연 백남준아트센터는 장장 120일 간의 축제를 마련했다. 백남준아트센터의 개관으로 타계한지 2년 만에 다시 돌아온 백남준을 환영하는 행사이기도 하다.
이 축제는 백남준에 의해 만들어졌으나 백남준을 뛰어 넘어야 하는 숙제를 안은 아트센터가 그 숙제를 푸는 방법이다. 이솝 우화 중의 한 구절, “여기가 로도스 섬이다, 지금 뛰어라!”에서 차용한 제목 ‘Now Jump’를 타이틀 삼아 진행되는 백남준페스티벌은 백남준아트센터가 ‘지금 여기’에서 예술적 실천을 수행하며 백남준을 넘어선 미래의 예술로 도약하고자 하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 페스티벌은 백남준아트센터와 센터 주변 일대에서 다섯 개의 스테이션으로 진행된다. 기차나 버스가 멈추고 떠나는 정거장인 동시에 방송국, 연구기관, 스튜디오, 지역의 중심지, 거주지, 사회적 지위 등을 의미하는 ‘스테이션’이라는 개념아래 전시와 퍼포먼스, 담론 생산의 플랫폼 등을 모은 것이다. 각각의 스테이션에서는 조지 브레히트, 앨런 카프로 등 플럭서스 멤버들과 요셉 보이스, 존 케이지, 조민석, 잭슨 홍 등의 국내외 작가들이 백남준이라는 이름 아래 모여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를 넘나들던 백남준을 추억하고 현재를 조망한다.

소장품 67점, 사진 및 기록자료 200점, 영상 자료 2,200점, 도서 1,500권이라는 풍부한 아카이브와 예술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행위를 오롯이 담을 수 있는 백남준아트센터에는 마치 백남준이 살아 있는 듯 하다. 뿐만 아니라 초대 관장으로 이영철 전 계원조형예술대학 교수를 임명하였고, 국내 공공 미술기관으로는 이례적으로 외국인 학예연구실장으로 독일 출신의 토비아스 버거를 영입한 데 이어 국제적인 경험이 풍부한 외국의 전문 큐레이터들을 채용하여 국제적인 아트센터로서의 시스템도 갖추었다. 이제 백남준아트센터가 해야 할 일은 새로운 문화 참여 공간으로써,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행위를 실험하며 무한한 잠재성을 키워내는 창조적인 매개공간으로 자리매김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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