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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숙정 사진전 - 기억의 풍경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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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

2010-11-10 ~ 2010-11-23




■ 전 시 명: 황숙정 사진전 ‘기억의 풍경‘ Landscape in my mind


■ 기      간: 2010년 11월 10일(수)~23일(화)


■ 오 프 닝: 2010년 11월 10일 오후 5시


■ 관람시간: 10:00am-06:00pm


■ 장      소: 갤러리 나우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92-13 3층)


 


[ 작업노트 ]


북한강가에 살면 거의 날마다 새벽안개 너머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서울에 살다가 양수리 지나


한강 상류로 더 올라가는 강가로 이사한 뒤부터는 3, 4년째 북한강변을 집중적으로 촬영해 오고 있다.


새벽시간, 인기척이 없는 고요한 시각에 바라보는 세상은 내게 새로운 느낌을 준다. 늘 보던 낯익은


풍경이 새벽안개에 싸여 마치 처음 보는 풍경인양 낯설다. 그 낯선 느낌이 내게 오히려 편안함을 주고


깊은 명상에 잠기게 한다. 따뜻한 집에서 벗어나 낯선 풍경 속에 홀로 내던져진 느낌은 외로움을 주기


도 하지만 자유로움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 어느 날은 나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이 맺히기도 했고 또


어느 날은 강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셔터를 누르는 것조차 잊고 내 안으로 깊게 빠져들기도 했다.


안개 낀 풍경이 왜 그렇게 좋았는지 다 설명할 순 없다. 그러나 이것만은 말할 수 있다. 마치 면사포


속 신부처럼 안개 속 풍경은 실제보다 늘 아름답고 신비롭다는 것을. 그래서 아무리 거친 현실이어도


감싸 안으면 허물이 덮이고 깨끗해지리라는 것을. 안개는 사물을 똑똑하게 보이지 않게 만들지만, 보


이지 않기 때문에 그 너머를 상상하고 느낄 수 있음을 깨달았다. 세상은 눈으로 바라보는 대상이 아


니라 느끼고 상상하는 세계라는 생각을 하면서 북한강의 안개 낀 풍경에 내 마음을 담았다.


자연도 인간에게도 지저분한 일면이 엄연히 존재한다. 그런데 안개 속 자연처럼 덮으면 깨끗해지고


고요 속에 묻힌다. 새벽마다 강변의 안개를 바라보며 내 삶을 뒤돌아보고 인간의 허물에 대해서도 생


각해보았다. 그리고 덮기로 했다. 그랬더니 또 다른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여기, 그 세상을 내놓는다.


2010년 11월


 


[ 평  론 ]


 


반사하는 감정의 여운을 따라


우리가 어떤 자극으로부터 실제로 경험하지 않은 현상이나 사물에 대하여 마음속으로 그려보는 것을


“상상(imagination)”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은 엄밀히 말해 서로 다른 두 가지 상황을 가지는데, 하


나는 분명한 상황이나 개념을 가지는 존재로서 구체적인 상(像)의 상상(想像)이고, 또 하나는 모호하고


불분명한 조짐으로 드러나는 존재로서 형태가 없는 상(象)의 상상(想象)이다.


 


전자의 상상은 흔히 우리가 상용하는 말로서 실제 경험하지 않은 것을 의식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소위 구조화 된 개념(Forme structuré e)을 말한다. 반면 후자의 상상은 존재론적이고 감각적인 측면을


가지는데 우선 어원적으로 “코끼리를 상상한다”라는 말에서 유래하는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이 말은


중국 한나라의 한비자가 쓴 글에 나오는데, 어떤 이유에서 인지 몰라도 중국 전국시대 코끼리는 용이나


해태와 같은 상상의 동물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한 번도 보지 못한 코끼리의 형태를 땅에서 발견된 뼈


를 보고 각자 나름대로 상상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때의 상상은 의식의 영역 밖에서 부유하는 각자의 감각적인 조짐을 지칭하게 된다. 그것은 예


컨대 꿈이나 환상, 영적인 의식(gnose), 음악의 인상(impression), 혹은 일상에서 갑자기 돌출하는 이해


할 수 없는 조짐이나 충동과 같이 비록 인지할 수는 없지만 “어떤 형태의 구조를 집어치우고 근본화 되


고 추상화 된 형태를 가지면서 잠정적이고 예언적인 또한 예견치 않은 무엇(numen 라틴)”을 말한다. 재


현의 영역 특히 순수예술에서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상상이 구체적인 매체로 전이(轉移)될 때 우리는 이


를 작품이라고 하고 또한 이러한 행위에 예술의 본질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여기 작가 황숙정의 사진은 바로 이러한 무형의 상상을 자극하는 감정의 물결들이다. 첫 눈에 어디서 많


이 본 장면들 예컨대 눈 내리는 강과 야산, 부슬부슬 비 내리는 창가, 축 늘어진 나뭇가지에 드리워진 금


빛 물결, 안개 자욱한 허공 등은 그 어떤 구체적인 상황도 장소도 지시하지 않는 “아무 장면들”이다. 이러


한 장면들은 소통의 영역에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결정적 시간의 단절이나 현실의 축적을 위한 시각적


인 기록이 아니라 음유시인이 던지는 주술과 같이 응시자 각자의 상상을 자극하는 일종의 자극-신호(signes-


stimulis)로 이해된다.


 


그래서 작가의 사진들은 시를 읽을 때 의미의 조합으로 문맥을 파악해야 하는 잡지 기사와는 달리 늘어진


단어들이 환기하는 음색을 따라가야 하는 경우처럼 우선 이미지 읽기의 개종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이미지


들은 더 이상 의미적인 무엇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단조로운 리듬과 반복에서 흘러나오는 어떤 애절한


연가처럼 은밀하게 어떤 존재(생성 genè se)를 누설하는 여운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사진을 본다는 것, 그것


은 장면을 의미의 조합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발산되는 여운을 음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감정의 여운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구성해 놓은 사진의 여백으로부터 발산된다. 한 폭의 동양화를


상기시키는 작가의 특별한 공간 구성에서 푸른 공산 위에 나타난 몽롱한 둥근 해, 세로로 혹은 가로로 쭉


늘어진 희미한 강가 풍경, 불쑥 가장자리에 돌출한 나무, 대부분의 공간을 차지한 안개와 구름 그리고 빛에


산란하는 뿌연 보라색 하늘, 이 모든 장면들은 주객이 전도되어 오히려 텅 빈 공간이 주제가 된다. 그러나


장면들은 이미지를 떠나 응시자의 의식에 들어가는 순간 응시자 자신의 기억과 상상 공간에서 다시 재구성


된다.


 


언뜻 보기에 사진의 여백은 그림이나 데생 혹은 만화가 보여주는 공간적인 여백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진


의 여백에는 화면의 물리적인 빈 공간으로부터 야기되는 공간 미학뿐만 아니라 수용자의 관점에서 비물질


적인 요소로서 형이상학적인 미학도 존재한다. 다시 말해 여백은 장면의 빈 공간으로부터 화면 밖으로 연


장되는 물리적 공간 구성이 아니라 장면의 어떤 대상으로부터 수용자의 연상이나 기억에 의해 채워지는 형


이상학적인 공간이 된다. 모호한 형상이나 기괴한 형태로부터 연상되는 상상적인 것, 예견치 못한 어떤 푼


크툼(punctum)의 환유적 확장, 불쑥 드러나는 프루스트의 무의식적인 기억, 시퀀스의 갭(gap)을 채우는 관


찰자의 상상 등은 바로 이러한 여백의 또 다른 역할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가 된다.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상상과 몽환적 발산은 엄밀히 말해 작가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극히 분명하고 안정된


“정적(靜寂)의 진술”에 기인한다. 잔잔히 물결치는 빛의 산란, 안개 자욱한 수면 그리고 그 위에 부유하는 나


무는 지극히 평범한 존재의 연속이다. 거기에는 모든 것이 중단된 장면처럼 지속의 순간과 무시간의 연속이


있을 뿐 움직임에 대한 어떠한 환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오랫동안 시간에 거슬러 사라지는 현실을 단


절시키는 사진의 순간 제스처에 익숙해 왔기 때문에 갑자기 나타난 극도의 부동과 정적은 오히려 우리로 하


여금 장면의 공포를 가지게 한다.


 


작가가 보여주는 정적의 진술은 또한 텅 빈 여백으로부터 기억의 열린 공간을 만든다. 그것은 찍혀진 “그것”


의 구체적 상황이 즉각적으로 “나”의 경우로 환원되면서 장면의 진술은 기억의 회상으로 물질에서 탈-물질로


그리고 구체적인 직조에서 상상구체윁 구성으로 이동하는 형이상학적인 전이(轉移)를 말한다. 창가에 맺힌 빗


방울, 소복소복 내리는 눈, 산등 이높이 뜬 해, 뿌연 잿빛 허공 등빛 박할 수 없는 단편의 출현은 우리로 하여


금 모든 의미의 직조와 모든 사고의 유통을 중단시키면서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익숙한 장소 장소리고 그 장


소로부터 연이어 드러나는 낯익은 얼굴 장또한 그 얼굴에 알 수 없는 어떤 욕구가 중첩되어 나타나게 한다.


 


결국 무의식적 상상과 기억의 이중인화가 우리들 고유의 “아무 공간”에 우리를 잠시 머물게 할 때, 각자의 잠


재된 기억들 예컨대 갑자기 솟아오르는 아쉬움, 향수, 욕구와 같은 감정의 침전물은 외부의 자극에 따라 내향


성 폭발을 일으킨다. 그것이 바로 감동의 도화선이다. 이와 같이 작가 황숙정의 사진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


지는 현실의 구체적인 대상이 아니라, 그 대상을 넘어 응시자 각자의 열린 공간에서 은밀히 진행되는 상상(想象)


의 부유물이다. 그것은 또한 작가의 순수 체험에서 형성된 자신의 독백임과 동시에 침묵과 부동의 출현 속에


누설되는 삶의 잔여물이다. 이럴 경우 이미지는 반사하는 감정의 여운을 따라 그려진 신호의 순수 서정시가


된다.


 


이경률 (사진이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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