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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 독립공원에는 서대문 형무소만 있고 독립공원은 없다

2012-12-27


본래 독립공원은 1897년 11월 20일, 민간단체인 독립협회에 의해 근대 국민국가로서의 의지를 천명하기 위해 조성된 공원이었다. 그러나 독립협회 해산 이후 관리되지 못한 채 자취를 감춘 독립공원은 1992년과 2009년을거치면서 한국 근대사의 상흔을 새긴 기념비적인 역사공원이 되어 돌아왔다. 서대문 독립공원이 서울 도심 곳곳에 위치한 목가적 풍경의 공원과 다르게 체감되어야 하는 이유는, 박물관이나 기념관의 유리너머로 읽는 기록으로서의 역사가 아니라, 역사적 상상력을 환기시키는 공간을 걸으며 몸으로 읽는 역사성은 체감의 층위와 깊이를 달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서대문 독립공원에는 서대문 형무소만 있을 뿐, 독립공원은 없다.

글 | 오주은 d-페다고지 기획 & 리포터
에디터 | 길영화(yhkil@jungle.co.kr)

19세기 말 공원에 대한 시선

19세기 말 일본과 청나라에서 유입된 서구 열강들에 관한 소식은 근대사회로의 전환을 꾀하는 조선사회의 계몽주의자들에 의해 빠르게 흡수되었다. 풍문처럼 떠돌다가 사라지는 소문들도 있었지만, 대중적인 관심의 중심에 자리한 소식들도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서구 시민사회의 공원문화에 관한 것이었다. 한국 최초의 정부기관지 한성순보는 1851년 영국 하이드 파크에서 열린 대영박람회를 영국 수정궁(英國水晶宮)이라는 이름으로 소개하며 다음과 같이 보도한다.

「영국의 수도로부터 남방 40km에 수정궁이라는 공원이 있다. 이것은 수십년 전에 백작 팩스톤이 세운 것으로 철재 기둥과 대들보를 만들고 상하사방에는 유리를 끼운 것이다. 멀리서 바라보면 금벽으로 휘황하게 빛나며, 보는 사람의 마음과 눈을 기쁘게 한다. 그래서 수정궁이라 이름했다. 국민모두에게 유람을 허락하고 있으며 전망대에 올라가서 조망하고 싶은 자는 입장료를 납부하고 들어 갈 수 있다. 국민들이 같이 어울려 즐기고 웃고 떠는 것도 이 땅의 일이다. <1884년 5월 11일, 한성순보 제23호>」

비록 정부사절단, 해외 유학생들과 여행자들이 중국과 일본에서 경험한 공원이 영국과 독일 등 제국주의 열강이 식민지에 심은 표식이라고 할지라도 한성순보의 기사에서 보듯이 공원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곳으로서 선망, 그 자체였다. 1876년 개항 이후 1880년대 중반에 이르러 공원은 박물관, 동물원, 식물원 등을 포괄하며 근대화 된 도시에 존재해야 할 공공의 시설물로 등장하게 된다. 더욱이 이는 이미 서구발 근대화의 바람을 맞은 중국과 일본이 공원을 근대도시를 상징하는 주요시설로서 위치시키고 활용하고 있었기에 공원의 사회적 효용성에 대한 인식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러한 인식을 구체화 할 수 있는 공원개설에 관한 계획이 19세기 말 조선에서도 추진되기에 이른다. 그 추진세력은 이채연을 비롯한 개화기 정부관료들과 서재필을 필두로 한 민간단체인 독립협회였다.


1897년의 독립공원

독립협회는 제1회 회보에‘독립문과 독립공원을 건립하는 것을 협회의 목적으로 한다’는 공문을 발표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1876년 협회가 발족되면서 도시 공원녹지의 필요성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했으며 독립협회 주도로 논의된 도시공원의 기능은 기념비적이면서 동시에 실용적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근대사회로의 전환이라는 격변기에 국민계몽을 목적으로 출발한 협회 의식이 명징하게 투여된 것으로 이 때 독립문과 독립공원에 새겨질‘독립’이란 밖으로는 자주국가로서의 의지를 표명하기 위한 것이었고 안으로는 민권 중심의 자유 민주주의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청국이 일본과의 국제 전쟁에서 패배한 후, 조선시대 내내 중국사신을 영접하였던 영은문을 무너트리고 세운 독립문은 중국과의 사대관계를 청산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어떤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의 간섭도 받지 않겠다는 의지의 선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독립문을 중심으로 시민들의 성금에 의해 조성되기 시작한 독립공원은 왕권 중심의 가부장제의 특권을 철폐하고 민권이 실질적으로 펼쳐지는 장(場)으로서의 구현을 의미했다. 이는 독립이라는 뚜렷한 공동체적인 지향점을 공원을 통해 대내외적으로 명시하고 지속시키고자 한 기획으로, 독립문이 독립을 시각적으로 상징하였다면 독립공원은 독립의 가치를 일상적으로 생산하고 공유하며 체험할 수 있는 장소로서의 상징성을 가진 공간이었다.


개항 이후 외국 거류민들을 위한 여타의 공원 조성이 모의되는 과정에서 독립공원의 설립이 독보적이었던 점은 조성공사를 위한 발의와 진행, 완공 후의 이용에 이르기까지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뒷받침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탄생된 공원에서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토론하고 산책하며 생경한 도시문화로서의 느긋한 휴식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재한 외국인들이 그들의 일기장이나 기행문에 남긴 기록에 따르면 독립문 일대에 펼쳐진 독립공원은 자유로운 토론과 연설, 국민 건강증진을 위한 시설등이 갖추어진 대형 공원이었다. 공원의 규모는 매주 토요일에 개최된 토론회에 참가하는 수백명에서 수천명에 이르는 군중들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의 면적이었으며, 공원의 일부는 야외경기를 할 수 있는 운동장으로도 기능했다. 운동기구들이 갖추어진 산책로가 있었고 다양한 종의 수목과 화훼 등을 식재하여 관상용뿐만 아니라 재배를 위한 실용적인 목적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또한 실질적인 연주가 이루어졌는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유원지로서의 여흥을 돋우기 위한 밴드 연주를 계획하는 등, 공원을 이용하는 시민들에게 다채로운 즐거움을 제공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기록들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근대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요구되었던 독립정신이 펼쳐진 독립공원은 1898년 12월 25일 협회가 강제 해산되면서 독립문만 남긴 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는 물리적으로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도시시설로서의 공원의 사라짐을 의미했으며 정서적으로는 민권 중심의 독립을 열망했던 수많은 이야기들의 사라짐을 의미했다.


1992년과 2009년의 독립공원

잊혀진 독립공원이 처음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92년 8월 15일 광복절이었다. 그러나 광복 47주년을 기념하여 개원한 독립공원은 근대 자주독립 국가로의 열망을 담은 모습이기보다는 일제에 의한 주권 찬탈의 상흔을 새긴 모습이었다. 경성감옥, 서대문감옥, 서울형무소, 서울교도소 등 몇 차례나 이름이 바뀌었던 서울구치소는 일제시대 독립투사들이 옥고를 치른 10개 동의 건물을 보존하며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으로 탈바꿈했고, 여기에 더해 애국지사들을 추모하기 위한 순국선열 기념탑과 서재필 동상이 세워졌다. 탑골공원에 있다가 철거된 3.1운동 기념탑이 독립공원 내에 복원되었으며, 독립협회 사무실 겸 집회 장소로 사용되었던 독립관은 순국선열을 위한 위패 봉안실 및 전시실로 이용되었다. 이에 따라 1979년 성산대로 개설시 지금의 자리로 옮겨 온 독립문은 독립공원이 애국애족(愛國愛族)의 주제로 조성됨에 따라, 일제강점기 독립투쟁의 서사를 응축한 기념물로서의 상징을 가지게 된다. 결국, 100여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 재조성된 독립공원에는 자주적인 근대국가로의 선언이었던 독립은 없었다.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을 중심으로 수렴된 독립운동의 기록만이 자리했다. 이것은‘일제에 항거한 역사적인 사건으로서의 독립’이라는 하나의 소실점을 기준으로 일제강점기와 무관했던 독립의 상징물과 3.1 독립운동의 시각성을 가진 상징물을 단일한 시점으로 배치한 결과였다.


그런데 이렇게 독립의 의미를 균질하게 시각화 한 독립공원은‘민족 정체성 회복을 위한 문화공간으로의 재조성’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2009년 11월 20일 재개관함으로서 민족의 성지라는 이미지를 더욱 공고히 하게 된다. 당시 재개관과 관련된 보도자료는‘노후하고 역사성이 부족한 독립공원을 새롭게 단장하여 역사적 산교육장으로서 확고히 자리매김하고, 관광객 유치를 위한 명소로서의 역사공원의 기능을 지향’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서대문 독립공원 디자인 공모 당선작 < 함께하는 생각 >을 바탕으로 진행된 공사는 독립공원의 노후한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한 차원에서 독립문 주변의 오래된 주택과 상가들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독립마당’이라는 광장을 조성한다. 또한 공원으로의 접근성과 통행의 불편함을 초래한 많은 수의 가파른 계단은 완만한 각도의 낮은 계단을 형성하며 독립문에서 역사 박물관까지 연결되는 공원의 중심축을 형성한다. 비가 오면 진흙탕으로 변했던 산책로는 전통 수종을 심은 환하고 넓은 숲길이 되었다. 더불어‘부족한 역사성’의 요인으로 지적되어 온 일본식 연못과 수목은 전통 조경양식에 따라 네모난 형태의 방지 연못으로 조성되고 수목은 소나무와 같은 전통수종으로 식재되었다. 또한 1992년 독립공원 조성 당시 일제 잔재의 흔적을 지운다는 이유로 구치소 벽에서 분리되었던 붉은 벽돌은 다시 형무소 역사관의 상징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시각 요소로 기능하며 건물 외벽과 역사박물관 잔디밭을 장식하는 건축재로 활용되었다.

이처럼 2009년에 재개관 한 독립공원은 1992년의 독립공원과 분명 달랐다. 그러나 그 다름이란, 민족의 정체성을 도모하는 독립운동의 상징들을 토목공사로 넓어진 광장과 다양한 수종의 나무들로 조성된 산책로에 배치함으로써 낭만적인 역사적 풍경을 자아내는 것에 국한된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이는 '원하지 않았으나 실제했었던 역사적 사건인 독립운동의 트라우마'를 대중이 기대하는 잔디와 나무와 연못이 있는 유럽식 정원의 조형방식으로 치유하고자 한 것으로 미국의 공원 설계 비평가 린다 폴락에 의하면 '매력적인 목가적 조경방식에 의한 사실의 은폐’인 것이다. 공원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서대문 역사 전시관에서 무겁고 아픈 독립의 상흔을 마주한 다음 돌아서 나와, 벤치에 앉거나 혹은 작은 숲길로 연결된 계단을 오르내리고 광장을 걷는 것으로 독립의 의미를 되뇌인다. 그러나 이것은 공원 전체를 아우르는‘공간’이 아니라 특정한 기념비적인 조형물이나 건축물, 기념관 내부의‘시각’기록물들을 통해서만 경험하는, 즉 매우 단선적인 역사적체험일 뿐이다.

지금, 서대문 독립공원은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며 중요한 가치로 자리매김해 온 독립의 다중적인 맥락을 담아내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갖는다. 이는 1897년 독립공원이 조성되었을 당시 지향했던 독립의 의미를 간과함으로써 서대문 독립공원이 품을 수 있는 독립의 스펙트럼을 창조적으로 확장시키지 못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즉 독립의 가치에 대한 가장 강력한 휘발성을 발산해 온 독립운동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근대 자주국가로서의 독립에의 열망과 해방이후 민주화 운동이라는 이름의 독립의 가치 모두를 아우르는 기념비적인 역사공원을 간직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했다는 측면에서 더욱 그러하다. 결국 독립공원이 지향하는 민족의 성지로서의 역사는 오로지 서대문 역사 박물관에서만 체감되는 역사인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서대문 독립공원에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독립공원은 없고 경성감옥에서 시작되어 서대문 형무소로 이어지는, 역사 박물관이 있는 도심 속 또 하나의 근린공원으로 인식될 뿐이다.


참고문헌
빌 브라이슨, 거의 모든 사생활의 역사, 까치, 2010
줄리아 처니악 외, LARGE PARK, 도서출판 조경, 2008
조경비평 봄, 디자인 경쟁시대의 조경, 도서출판 조경, 2006
임석재, 서울, 건축의 도시를 걷다 I, 인물과 사상사 2010
강신용, 한국 근대 도시공원사, 대왕사, 2004
서울시 푸른도시국 2008년 8월 10일 보도자료 : 서대문 독립공원, 위풍당당 역사적 성지로 재탄생
서울 서대문 독립공원 홈페이지 http://parks.seoul.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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