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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예술, 건축의 균형 있는 조화 '글렌스톤 미술관'

2019-10-11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를 떠올릴 때 흔히 백악관, 국회의사당, 박물관이 연상된다. 스미소니언 계열의 권위 있는 미술관들이 몰려 있기 때문이다. 워싱턴 D.C.의 정돈된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면 목가적인 시골 풍경이 펼쳐진다. 수도와 맞닿은 메릴랜드 주 전원에 미국 최대 규모의 개인 미술관이 자리 잡고 있다. 의외의 장소에 숨겨진 보석 같은 미술관, 글렌스톤(Glenstone Museum)이다. 

 


Ever Is Over All, 1997, Pipilotti Rist (Photo: glenstone.org)

 


Untitled, 1992, Robert Gober (Photo: glenstone.org)

 


Large Flowers, 1964, Andy Warhol (Photo: glenstone.org)

 


Fountain, 1964, Marcel Duchamp (Photo: glenstone.org)

 

 

현대 미술작가 전용관 설치 
글렌스톤 미술관은 2차 세계대전 이후 현대미술을 주로 전시한다. 앤디 워홀 작품을 비롯해 알렉산더 칼더, 잭슨 폴록 등의 작품을 보유하고 있다. 변기 시리즈로 유명한 마르셀 뒤샹의 〈샘〉은 1917년에 제작한 원본이 분실되고 현재는 복제품들만 존재하는데, 8번째 에디션 복제품 중 하나를 글렌스톤이 소장하고 있다. 미술관 크기에 비해 전시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이유는 작가별로 전용관을 따로 만들어 작품을 배열하기 때문이다. 어떤 작품은 밝게 트인 자연광 아래에서 감상해야 제대로 된 질감이 보인다. 반면 어떤 작품은 빛을 최대한 차단한 채 몇 발자국 떨어진 위치에서 작품이 뿜어내는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글렌스톤은 마이클 하이저, 온 가와라, 마틴 파이어 등 현대 미술가들의 8개 전용관마다 조도를 다르게 설계해 작품을 감상하기 최적화된 환경을 만들었다. 

 


Fear Eats the Soul, 2011, Rirkrit Tiravanija (Photo: glenstone.org)

 


리크리트 티라바니자 특별전
현재는 ‘리크리트 티라바니자: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Rirkrit Tiravanija: FEAR EATS THE SOUL)’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태국 출신 예술가 리크리트의 과감한 작품 활동을 담은 전시다. '미술은 아직도 보는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면서 관객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작가가 제안하는 요리법을 배우고, 티셔츠에 실크스크린을 새기도록 권한다. 작가는 판을 벌여놓고 자리를 비킬 뿐, 관람객들이 서로 대화하고 움직이면서 그 빈자리를 채우는 방식이다. 리크리트 작가는 1990년 뉴욕 폴라 알랜 화랑에서 ‘팟타이’라는 제목의 첫 개인전을 열고 본격적으로 음식을 주제로 한 시리즈를 이어갔다. 미술관에서 실제로 음식을 만들어 나눠먹는 이른바 무료 급식 퍼포먼스는 상당히 파격적이었다. 리크리트는 사회적 계급 차이와 각기 다른 문화적 산물을 초월하는 수단으로 요리를 택했고, 음식을 나눠 먹음으로써 엄숙한 규범을 깨부수자고 주장한다. 이번 전시는 내년 초까지 열린다.  

 

 

 

 

The Pavillion of Glenstone Museum (Photo: glenstone.org)

 


왼쪽부터 에밀리 레일스, 미첼 레일스 (Photo: glenstone.org)

 


억만장자 미술 애호가 부부의 개인 미술관
미국 최대 규모의 개인 미술관은 누가 어떻게 만들었을까? 억만장자 미술 애호가 미첼 레일스(Mitchell Rales)는 1990년대부터 미술품 소장과 경매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다 1998년 러시아 여행 중 헬리콥터 폭발 사고에서 극적으로 살아났다. 이 사고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미첼은 삶의 우선순위와 가치가 무엇인지 고민하다 소장품을 사회에 공헌하기로 마음먹었다. 미술사학을 공부하고 뉴욕 랠리 갤러리(J.J. Lally & Co. Oriental Art) 큐레이터로 일한 에밀리(Emily)와 재혼한 뒤 2006년부터 글렌스톤 미술관을 무료로 대중에게 공개하고 있다. 

 

레일스 부부는 뉴욕 프릭 미술관(Frick Collection)의 현대판을 만들고 싶었다. 프릭 미술관이 13세기부터 19세기까지 유럽 화가들의 그림, 엔틱 가구, 도자기에 집중한다면 글렌스톤 미술관은 20세기 이후 현대 미술 작품을 가져다 놓는다. 대신 전시 경험이 15년 이상인 중견 작가들의 작품만 수집한다. 작품성이 입증된 저명한 현대 추상 미술 작품으로만 미술관을 채우겠다는 전략이다. 미첼의 막대한 자본과 에밀리의 고상한 예술 감각이 결합해 글렌스톤은 오늘날 21세기 현대미술의 집합체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했다.   

 


The Pavillion of Glenstone Museum (Photo: glenstone.org)

 


증축공사 마치고 재개관한지 1년째
글렌스톤 미술관은 지난해 가을, 대대적인 확장 공사를 마치고 새로운 파빌리온관을 세웠다. 기존의 미술관은 6배 커지고, 수용 가능한 방문객 수는 2만 5천 명에서 10만 명으로 늘어났다. 증축에 앞서 레일스 부부는 전 세계 50여 개 박물관을 방문했고, 코펜하겐 외곽의 루이지애나 박물관, 스위스 바젤의 베일러 재단 미술관, 텍사스 휴스턴의 메닐 컬렉션 미술관 등에서 영감을 얻었다.  


증축 공사는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는 건축가 토마스 파이퍼(Thomas Phifer and Partners)가 맡았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세련된 미니멀리즘 디자인으로 유명하다. 특히 내부 인테리어는 황량할 정도로 깨끗하다. 몰입을 방해하는 모든 요소를 제거해 미술품과 자연에만 집중하도록 했다. 글렌스톤 미술관은 인공조명을 적게 쓰는 대신 빛과 그림자를 적절히 사용한 재치 있는 설계가 돋보인다. 각각의 관은 천장을 통해 빛을 받아들이는 구조이다. 작품을 감상하다 무심코 천장을 올려다봤을 때 신비로운 하늘빛을 덤으로 얻는다. ㅁ자 미술관에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는 중정을 뚫고 물을 채워 연못을 만들었다. 연못에 반사된 빛이 통로를 타고 번지면서 독특한 오라를 풍긴다. 전용관을 차례로 감상하다보면 관람객들의 발길이 자연스레 가운데 연못으로 몰린다. 잠시 한숨 돌리고 눈과 머리를 정화한 뒤 다음 작품을 만나게 하려는 건축가의 의도이다. 

 


Untitled, 1992–1995, Felix Gonzalez-Torres (Photo: glenstone.org)

 

Smug, 1973/2005, Tony Smith (Photo: glenstone.org)


 
Split-Rocker, 2000, Jeff Koons (Photo: glenstone.org)

 

 

계절의 변화에 따라 다르게 비춰지는 야외 조각상
40만 제곱미터 크기의 녹지에는 야외 조각상과 조경이 조화를 이룬다. 이곳은 원래 여우사냥터였던 만큼 관람객들이 사색에 빠질 수 있는 고요한 자연 환경과 드넓은 목초지가 자랑이다. 주차장에서 박물관 본관인 파빌리온까지 7분 동안 초원을 가로질러 걸어가야 한다. 그 길이 마치 도시 생활을 뒤로하고 고요한 자연 체험을 떠나는 여행처럼 느껴진다. 레일스 부부는 7분짜리 버진로드를 걸으면서 관람객들이 기대와 설렘, 고요를 동시에 느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가장 먼저, 언덕에 있는 제프 쿤스의 거대한 조각품이 눈길을 끈다. 호숫가 물안개 너머로는 엘즈워스 켈리의 높이 14m짜리 스틸 기둥이 우뚝 솟아 있고,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의 설치물은 하늘을 비추는 두 개의 웅덩이처럼 보인다. 야외 조각품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드문드문 배치돼있다. 그림을 담는 그릇이 미술관이라면 야외 조형물을 담는 그릇은 자연이다. 공간도 하나의 유기체처럼 끊임없이 변화하고 증폭한다. 같은 작품인데도 계절별로 다르게 보이는 것은 그것을 담는 그릇이 계절별로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느긋하게 사색하며 감상하기
웨일스 부부의 광대한 사유지 속에 자리 잡은 글렌스톤 미술관은 지역 주민들조차 잘 알지 못하는 숨겨진 미술관이었다가 지난 겨울, 워싱턴 포스트에 자세히 보도된 이후 방문객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입장료는 없지만 미리 예약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다. 충분히 관람하려면 대여섯 시간은 걸리기 때문에 미리 관람시간을 예약하고 가는 것이 좋다. 매달 1일, 오전 10시에 석 달 치 입장권을 일제히 풀어놓는데 1분 만에 매진된다. 풀어놓는 입장권이 워낙 한정적이다. 붐비지 않는 한적한 관람을 지향하기 때문에 하루 관람객은 많아야 400명 남짓. 여느 박물관과는 달리 느긋하게 사색하며 미술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설계한 배려가 돋보인다. 

 

대부분의 개인 미술관은 기증자 이름을 따서 명명한다. 이곳이 레일스 미술관이 아닌 글렌스톤 미술관인 이유가 궁금하다. 레일스 부부는 이곳이 누구의 것인지 보다 어디에 있는 미술관인지에 초점을 맞춰 공공성을 강조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미술관 주소인 글렌 로드(Glen Road)와 지역의 옛 이름 캐더락(carderock)을 합쳐 글렌스톤이라 지었다. 
웨일스 부부가 바라는 것은 미술관이 유명해지고, 아주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이곳을 진정으로 원하고 미술을 즐길 줄 아는 소수 정예 마니아들만 와주기를 원한다. 미술관 어디에도 그렇게 쓰여 있지는 않다. 다만 미술관을 차근히 살피다보면 주인장의 확고한 취향과 철학이 읽힌다.
    
위치:  12100 Glen RoadPotomac, MD 20854 USA 
시간: 목-일, 오전 10시-오후 5시 
홈페이지: glenstone.org

 

글_ 이소영 워싱턴 통신원(evesy02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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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렌스톤미술관 #워싱턴 #월드리포트 

이소영 통신원
워싱턴 D.C.에 거주하며 여러 매체에 인문, 문화, 예술 칼럼을 쓰고 있다. 실재하는 모든 것이 디자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보다 쉽고 재미있는 소식으로 디자인의 대중화에 앞장서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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