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1-02
이른바 얼터너티브락alternative rock 세대에게 ‘대안’이라는 말은 향수와 씁쓸함을 동시에 일으킨다. 적어도 ‘우리’는 ‘대안’이라는 말을 왜 썼으며, 써야만 했는지 공유했다고 믿고 싶은데다, 그 끝이 어떤 식으로 끝났는지도 알고 있다고 쉽게 믿어 버리는 경향이 있다. 커트 코베인이 죽어버린 것과 동시에, 아니 더 정확하게는 스매싱 펌프킨즈Smashing pumpkins가 한국에서의 콘서트를 마지막으로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동시대에 음악을 하고 싶지 않다’며 팀을 해산했을 때 얼터너티브란 단어의 효력은 다 한 것처럼 느껴졌다. 너 아직도 얼터 듣냐, 라는 말은 지나버린 알싸한 청춘의 끝을 아직 놓지 못해 철 지나버린 애 어른이 되었구나, 라는 말처럼 들리곤 한다. 대안, 얼터너티브란 그렇게 특정 시대를 공유하고 향유하며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였다. 최소한, 음악에 있어서 만큼은.
취재| 남궁경 기자 (knamkung@jungle.co.kr)
한국에서 ‘대안문화’라는 것이 싹튼 건 단연 홍대 인근을 중심으로 한 클럽 문화를 통해서다. 들뢰즈나 라캉, 해체라는 이름 혹은 단어가 낯설지 않은 컬쳐 피플들은 엄숙함이 차지하고 있는 영역의 경계를 타고 미끄러지며 그들만의 문화가 대중들에게 일정 정도 파급력을 행사하는 것을 느긋하게 즐길 수 있었다. 새로운 세기를 맞이했을 때 얼터너티브 락이 결국 일정 시대를 향유한 고정적 의미로 고착되어 버린 것과 마찬가지로 홍대라는 지역적 특성과 대안이라는 단어는 고착화의 단계를 지나 사장되어 버릴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클럽 문화가 간혹 변질되거나 간혹 침체되는 모습을 보이는 와중에도 대안 문화의 자생력이 완전히 시들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 둘씩 생겨나 이제는 분류가 가능한 정도의 수량으로 늘어난 대안 공간들은 이를 뒷받침한다. 프린지 페스티벌 등 독립문화예술의 자생력을 키우려는 움직임들이 작은 씨앗들이 되어 공간에 뿌려지고 있는 셈이다. 이제 막 한 살을 맞이한 대안공간 미끌은 건강하게 뿌리내리고 있는 씨앗들 중 하나다.
대안공간 미끌은 프로젝트 그룹 스푸마톨로지가 운영하는 대안 예술 공간입. 프로젝트 그룹 스푸마톨로지_Sfumatology는 미술, 영화, 음악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 장르를 넘나드는 창작 모임이다. 이들은 한계와 경계를 허물어뜨리거나 포괄하는 방식으로 나아가는 현대미술의 특성을 적극적으로 끌어안는다는 취지 하에 열린 공간을 마련했다고.
자크 라캉의 ‘미끄러지는 기표’에서 따온 ‘미끌’이라는 이름은 예측 불가능한, 넘어짐조차 놀이로 만드는 미묘한 움직임의 순간을 포착한 말이기도 하다. 대안공간 미끌은 기성의 예술 시스템 안팎을 끊임없이 미끄러지며 새로운 대안 마련을 모색해 왔다. 실험성과 열정을 지닌 신진 작가 및 독립 기획자를 지원하고, 이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폭넓은 활동이 제도 내에 긍정적인 방향으로 수용되고, 동시대 미술계에 진정한 대안적 담론을 창출하게 되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외부에서 흘러 들어온 공기로 내부의 공기가 정화되듯, 이들은 경계선상에서의 담론으로 중심부를 움직이고자 한다.
한 살 먹은 대안공간 미끌이 1주년 기념으로 준비한 전시회의 타이틀은 ‘ 펀치드렁크 웍스 Punch Drunk Works’(2006. 12. 21 - 2007. 1. 7). 펀치드렁크 웍스란, 복싱 선수와 같이 수십 여 년에 걸쳐 뇌에 많은 충격과 손상이 누적된 사람에게 급,만성적으로 나타나는 뇌세포손상증세를 뜻하는 말이다. 타이틀만 들으면 다 같이 뇌세포손상증세를 겪어보자는 말인가, 의아함을 갖게 하지만, 여기서의 펀치드렁크 웍스는 ‘손상’보다는 ‘쾌감’과 ‘자극’을 향한 강한 충격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즉 예술의 향유를 통한 쾌감 역시 긍정적인 면에서 뇌의 자극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며,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가운데 능동적인 해석과 창조의 에너지를 경험하는 것은 복서들이 서로의 뇌를 강타 하는 물리적 자극만큼이나 감상자의 뇌를 새로운 영역으로 각성하고 확장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번 전시는 개관 후 1여 년간 대안공간 미끌과 인연을 맺어온 여러 작가들, 그리고 이제 막 미술계에 새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한 여러 신진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들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기회다. 습관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삶을 일깨우는 것이 예술의 역할이듯 이번 전시를 통해 즐거운 펀치드렁크를 경험해 보는 것도 좋을 듯. 잠들어 있는 뇌의 환기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전혀 다른 것으로 보이게 만들어 줄 수도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