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전체보기

분야별
유형별
매체별
매체전체
무신사
월간사진
월간 POPSIGN
bob

컬쳐 | 리뷰

작업의 모태를 엿보는 ‘이불-시작’ 전

2021-03-26

세계적인 작가 이불의 초기 작업을 한자리에 모은 전시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는 1987년부터 10여 년간 남성 중심의 왜곡된 사회 구조와 여성의 성 상품화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과 관련된 작업을 선보여온 작가의 활동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자리를 마련한다. 

 

서울시립미술관 로비에 설치된 〈히드라〉 (사진: 홍철기)

 

 

‘이불-시작’ 전에서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작품은 〈히드라〉이다. 서울시립미술관 로비에 설치된 〈히드라〉는 ‘시티스 온 더 무브(Cities on the Move)’ 프로젝트에 초청돼 2년간 7개 도시를 순회하며 세계 미술계에 이름을 알렸던 작품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1996년 처음 소개된 풍선 모뉴먼트를 2021년 버전으로 새롭게 제작해 선보인다. 풍선 모뉴먼트 구조물 사방으로 펌프가 연결되어 있으며 관객들이 펌프를 직접 밟아 바람을 불어넣을 수 있다. 4만 회 이상 펌프를 밟아야 10m 높이의 작품이 완성된다. 


관객의 참여로 거대한 괴물 형상 위에 아시아 오리엔탈리즘을 자처한 여성의 이미지가 인쇄된 풍선이 부풀어 오르는 모습은 여러 층위의 사회적 권력을 유머러스하게 패러디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담겨있다. 

 

 소프트 조각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전시실 1 전경 (사진: 홍철기)

 

 

작가 이불의 ‘소프트 조각’ 개념을 중심으로 이뤄진 전시실 1은 기존의 전통 조각 재료인 돌과 철, 브론즈에서 벗어나 천과 솜으로 된 그로테스크한 의상 조각들이 전시된다. 어두운 전시장에는 인체를 분절하고, 뒤틀고, 일부분을 이어 붙여 신체를 계속해서 변용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기괴한 조형미가 느껴지는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는 작가가 1988년 첫 개인전에서 선보이고 2011년 재제작한 〈무제(갈망)〉 연작과 〈몬스터:핑크〉이다. 사람의 살처럼 부드러운 촉감을 가졌으나 불완전한 존재를 재현한듯한 작품은 여성의 신체에 대한 여러 상징을 투영하고 기존의 관념을 역설한다. 


소프트 조각 이외에도 대학 시절 인체의 재현 방식을 실험하던 작품 관련 기록과 퍼포먼스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동작과 에너지가 표현된 드로잉 6점도 함께 전시된다. 

 

작가 이불이 1988년부터 1996년까지 선보인 퍼포먼스 중 12점의 영상 기록을 선보인다. (사진: 홍철기)

 

 

‘퍼포먼스 영상’을 선보이는 전시실 2에서는 1988년부터 1996년까지 작가 이불이 기획하고 실연한 33회의 다양한 퍼포먼스 중 최소 편집으로 보존된 12점의 영상 기록이 대형 스크린에서 상영된다. 그는 퍼포먼스를 통해 남성 중심 사회가 구축해온 권위, 위계, 경계를 흔들었다. 


1989년 동숭아트센터에서 벌거벗은 작가가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신음하는 연극적 퍼포먼스 〈낙태〉는 당대 여성이 반강제로 감내했던 수난의 가학적 고백을 담아냈다. 자신의 몸을 미술적 언어로 삼아 발언했던 퍼포먼스는 다시 봐도 파격적이었다.

 

전시실 2에서는 12점의 영상 기록이 대형 스크린에서 12점의 영상이 동시에 상영된다. (사진: 홍철기)

 

 

〈수난유감-내가 이 세상에 소풍 나온 강아지 새끼인 줄 아느냐?〉는 1990년 ‘제2회 한·일 행위예술제’에 초청돼 김포공항에서 시작해 일본 각지를 오가며 12일간 진행한 퍼포먼스이다. 여러 겹의 손과 촉수들이 뒤틀리고 파편화된 기이한 형태의 소프트 조각을 입고 도쿄 주요 거리를 거닐고 다니는 작가의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예측할 수 없는 반응들이 함께 담겨있다.

 

작가 이불은 소프트한 재료로 만든 조각을 입고 1990년부터 약 5년간 셀 수 없이 많은 전시와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근대를 상징하는 방독면을 쓰거나 군화 같은 소품이 반복해 등장하기도 하며 둔부를 과장한 레슬러 복장을 하거나 소복에 긴 머리를 풀어헤친 여자, 색동 한복을 입은 황후와 같은 캐릭터들이 대항적 주체로서 등장한다.


이후 작가는 상징적인 기호와 정치적 함의를 지닌 오브제와 캐릭터가 등장하는 비판적 퍼포먼스로 이행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 이불의 퍼포먼스가 어떻게 변모하는지를 확인해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한다. 

 

 

전시실 3에서는 작가의 퍼포먼스 기록과 미공개 드로잉을 만나볼 수 있다. (사진: 홍철기)

 

 

‘기록’에 관한 전시가 이어지는 전시실 3에서는 사진 기록 60여 점과 미공개 드로잉 50여 점, 오브제와 조각 10여 점 등이 전시된다. 벽면 가득 퍼포먼스를 기록한 사진이 빼곡하게 전시되어 영상으로 기록되지 않은 여러 미술적 활동들을 엿볼 수 있다.

 

〈장엄한 광채〉(부분), 1991/1997, 생선, 시퀸, 과망간산칼륨, 폴리에스테르백, ‘프로젝트 57: 이불/치에 마쓰이’, 뉴욕 현대미술관, 미국 (사진: 로버트 푸글리시 작가 제공)

 

 

이번 전시에서는 〈장엄한 광채〉의 사진 기록과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작품 설치에 대한 고충이 느껴지는 드로잉이 함께 전시된다. 

 

〈장엄한 광채〉는 1997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화려한 시퀸(sequin)을 수놓은 ‘썩은 생선’으로 전시장에 공개되었지만, 악취로 인해 작품이 철거된 전력으로 유명하다. 시간의 경과에 따라 생선이 부패하면서 발생시킨 냄새의 감각을 담은 작품으로 시각 중심의 미술사에서 추방당한 또 다른 감각인 후각을 불러들인다. 작가는 생선을 여성 상징화 생물로 보았으며, 죽은 물고기에 시퀸으로 장식한 행위는 한국의 경제성장 이면에 가려진 여성 노동자들의 가내수공업 등을 의미한다. 

 

서울시립미술관 2021 (사진: 홍철기)

 

 

전시 이외에도 작가 이불의 초기 작품을 연구하는 에세이, 사진 기록, 자료 등이 수록된 450여 페이지의 모노그래프가 출간된다. 모노그래프는 ‘여성의 신체’, ‘문화 정치적 공간’, ‘근대성의 바깥’ 등 세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퍼포먼스 중심의 초기 작품들 내용으로 구성된다. 

 

‘이불-시작’ 전시 기간에는 온라인 전시투어 영상이 서울시립미술관 공식 SNS 채널을 통해 제공된다. 전시 트레일러, 작품설치 과정, 전시 전경 등을 담은 영상을 볼 수 있다. 전시는 5월 16일까지 열리며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 1층에서 펼쳐진다.

 

글_ 한혜정 객원기자(art06222@naver.com)
사진제공_서울시립미술관 

 

facebook twitter

#서울시립미술관 #이불시작전 #시작전시 #이불전시 #소프트조각 

한혜정 객원기자
경계를 허무는 생활속 ART를 지향합니다.

당신을 위한 정글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