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8-19
“여기 조금만 더 크게.”
“이건 느낌이 애매한데, 다른 버전도 보고 싶어요.”
“조직 개편으로 책임자가 바뀌었어요. 새 콘셉트로 처음부터 다시 해주세요.”
“수정은 이미 계약에 포함된 거잖아요.”
수정 요청은 디자인 작업의 일부다.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그 요청이 몇 번이든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분위기, 그리고 그 모든 시간과 노력이 무상으로 소모되는 구조다.
디자이너들이 말하는 ‘수정 지옥’은 단순한 반복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디자인의 가치를 부정하고, 노동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창작자의 자존감을 갉아먹는 행위다.
‘좀만 더’라는 말은 가볍지만, 그 반복은 디자이너를 무너뜨린다.
⸻
“우리 팀장님이 바뀌셔서요. 다시 그려주세요.”
프리랜서 디자이너 B씨는 최근 한 중소기업의 BI 리뉴얼 작업을 맡았다.
처음부터 심혈을 기울인 기획과 컨셉, 그리고 시안 3종을 제안했고, 클라이언트 측도 큰 수정 없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프로젝트가 중간 정도 완료되는 단계에서 담당 팀장이 교체되었다.
새로 부임한 팀장은 이렇게 말했다.
“개인적으로 이 방향은 마음에 안 드네요. 새로운 안을 보고 싶어요.”
결국 B씨는 ‘기존 방향은 존중하면서도 새로운 느낌을 살려달라’는 모순된 요구를 받아들여야 했고, 두 차례에 걸쳐 전면 재작업을 진행했다.
그 결과물은 또 다시 반려되었고, 클라이언트는 이렇게 정리했다.
“여러 버전 감사했어요. 하지만 내부적으로 이 프로젝트의 진행을 보류하기로 했습니다.”
대금 결제도, 사과도 없었다. 남은 건 B씨의 밤샘 작업뿐이었다.
디자이너들이 말하는 ‘수정 지옥’은 단순한 반복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디자인의 가치를 부정하고, 노동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창작자의 자존감을 갉아먹는 행위다. (그림: AI 생성)
⸻
수정은 공짜인가?
디자인 계약서에 흔히 쓰이는 문장 중 하나는
“수정은 2~3회까지 포함하며, 이후 추가 수정은 별도 협의한다”이다.
문제는 이 문장이 제대로 지켜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클라이언트는 ‘2~3회의 기준’을 구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아예 무시한다.
“이건 크게 손대지 않는 작은 수정이에요.”
“기존 내용을 살린 거니까, 수정의 횟수로 치지 말아주세요.”
이런 말은 디자이너가 아닌, 항상 클라이언트 입에서 나온다.
디자이너는 수정을 카운트하는 순간, ‘돈 밝히는 사람’처럼 비춰질까 두려워한다.
그래서 참는다. 다시 한다. 또 고친다.
이런 문화가 반복되며, 수정은 ‘무제한의 기본 옵션’이 되어버린다.
⸻
“이건 좀 더 느낌 있게”라는 말의 폭력성
수정 요청이 문제라는 게 아니다.
디자인은 기본적으로 협업이며, 피드백은 필수다.
그러나 문제는 비전문적인 피드백, 모호한 지시, 감정적인 요청이 횡행한다는 데 있다.
“느낌이 이상해요.”
“좀 더 고급지게 해주세요.”
“우리 사장님 스타일이 아니에요.”
이런 피드백은 실행 가능한 기준이 없다. 디자이너는 무한 추측의 세계로 떨어지고, 방향은 흐려진다. 그 과정은 창작이 아니라 억측과 낙담의 반복이다.
더 큰 문제는, 수정에 대한 책임 소재가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어떤 시안이 최종 결정되었는지, 누가 그걸 선택했는지조차 나중에 뒤바뀌는 경우가 허다하다. 결국 클라이언트는 모든 책임을 회피하고, 디자이너만 ‘왜 그랬냐’는 질문을 받는다.
⸻
수정은 재작업이 아니라, 재계약의 영역이다
업계에서 ‘수정’이라는 말은 지나치게 가볍게 쓰인다.
그러나 그 수정은 종종 새로운 프로젝트에 가까운 재작업이다.
디자이너가 투입한 시간, 집중력, 아이디어, 감정 노동은 새로움의 총합이다.
이 모든 것을 단순히 ‘수정’이라는 단어로 퉁치는 건, 명백한 착취다.
우리는 수정이라는 말을 이제 재정의해야 한다.
수정은 당연히 댓가가 지불되어야 한다.
수정은 계약 내에서 명확히 정의되어야 한다.
수정은 디자이너의 자존감과 삶의 질을 보호하는 기준선이다.
⸻
무제한 수정은 폭력이다
디자이너는 감정이 없는 기계가 아니다.
‘한 번만 더’를 외치는 동안, 창작자는 점점 마모된다.
클라이언트의 감정 변화와 내부 정치가 반복될수록, 디자이너의 삶은 예측 불가능해진다.
수정이 반복될수록, 창의는 죽고, 열정은 식고, 결국 업계는 고사한다.
우리는 말해야 한다.
수정은 기본 옵션이 아니다.
디자이너의 시간은 무한하지 않다.
⸻
‘수정요청서’가 필요한 시대
몇몇 앞서 나가는 디자인 에이전시는 이미 ‘수정요청서’를 운영한다.
클라이언트가 구체적인 수정 요구사항을 문서로 제출하고, 그에 따라 일정과 예산이 조정된다.
이런 시스템은 피드백을 체계화하고,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며, 감정적 충돌을 줄인다.
디자인 업계에도 이런 장치가 필요하다.
‘말로만 피드백’하는 시대는 끝나야 한다.
이제는, 책임 있는 수정, 정당한 대가, 존중받는 창작의 시대가 와야 한다.
⸻
기획취재_정석원 편집주간 (jsw0224@gmail.com) / 최유진 편집장 (yjchoi@jungle.co.kr)
#을의눈물 #수정지옥 #디자인갑질 #클라이언트의횡포 #디자인업계현실 #수정요청서 #디자인권 #무제한수정은폭력이다 #디자인정글기획취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