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23
최근 대통령이 각 부처와 산하기관으로부터 주요 현안을 직접 보고받는 장면이 연일 전해지면서 국민의 전폭적인 호응을 얻고 있다. 형식적 보고가 아니라, 구조를 점검하고 병목을 확인하며, 현장의 목소리를 듣겠다는 의지로 읽히고 있는 것이 매우 보기 좋았다.
이 시점에 꼭 한 가지가 포함되길 바라는 사안이 있다. 바로 공공 디자인용역 입찰 구조다. 대통령이 보고를 직접 받는 지금, 이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내고자 한다.
디자인은 사소한 외주가 아니다. 공공정책의 얼굴이고, 국가 메시지의 언어이며, 세금이 시각적 자산으로 전환되는 지점이다. 그런데 그 시작점인 입찰 구조가 오래도록 방치되어 왔다. 이제는 대통령에게 직접 묻고 싶다. 이 구조를 그대로 두고 공정과 혁신을 말할 수 있는가.
이재명 대통령이 17일 세종시 정부세종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산업통상자원부·지식재산처·중소벤처기업부의 업무보고를 받고 있다 (사진출처: 대통령실, 구글)
1. 공정이라는 말이 가장 많이 훼손되는 현장
디자인용역 입찰은 공정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업계가 체감하는 현실은 정반대다. 공정은 선언문에만 있고, 현장에는 의심이 남는다. “이미 정해진 결과”라는 말이 회자되고, 그 말이 결과로 입증되는 순간을 우리는 반복해서 보아왔다.
문제는 개인이 아니다. 몇몇 ‘나쁜 사람’의 일탈도 아니다. 구조가 의심을 생산하고, 제도가 불신을 확대한다. 이 상황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무책임하다.
2. 제안서 심사, 평가인가 연출인가
제안서 심사는 평가처럼 보이지만, 종종 연출에 가깝다. 심사위원 수는 많고 점수표는 정교하다. 그러나 그 점수를 만드는 사람의 구성은 늘 비슷하다. 특정 학맥, 특정 자문 라인, 특정 인물들의 순환.
업계에서는 심사위원 명단을 보면 결과를 예측한다. 이 말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 현실이 문제다. 심사가 결과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결과를 정당화하는 절차로 기능할 때 제도는 이미 실패한 것이다.
3. 사라지지 않는 소문, 제도의 실패 신호
심사위원 사전 접촉, 특정 업체 내정, 금품 제공에 대한 풍문. 사실 여부를 이 글에서 단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있다. 이 소문들이 너무 오래, 너무 널리, 너무 구체적으로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정상적인 제도라면 소문은 힘을 잃는다. 그러나 불투명한 제도에서는 소문이 진실처럼 작동한다. 지금의 디자인용역 입찰 환경은 후자다. 이것은 업계의 도덕성 문제가 아니라, 국가 제도의 신뢰 문제다.
4. 승자독식, 그리고 철저히 방치된 패자들
디자인용역 입찰은 철저한 승자독식 구조다. 1등만 모든 것을 가져간다. 2등은 탈락이다. 2등 이하의 노력은 기록조차 남지 않는다.
그러나 제안서를 준비하는 과정은 이미 완성도 높은 디자인 노동이다. 기획, 리서치, 콘셉트 개발, 시각화, 발표 자료 제작. 이 모든 비용은 수행사가 선투자한다. 탈락하는 순간, 그 비용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으로 처리된다.
이 구조는 특히 중소 디자인 서비스 기업을 소모시킨다. 입찰에 참여할수록 회사의 체력은 약해진다. 이것이 과연 지속 가능한 산업 구조인가.
5. 리젝트 피를 말하면 왜 불편해지는가
탈락 보상금, ‘리젝트 피‘는 더 이상 낯선 개념이 아니다. 해외에서는 상식에 가깝다. 제안 단계에서 발생한 지적 노동에 최소한의 보상을 하는 것은 발주처의 책임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여전히 금기어다. “탈락했는데 왜 돈을 주느냐”는 반응이 돌아온다. 이는 디자인을 비용으로만 보고 가치로 보지 않는 인식의 결과다. 이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공정은 구호에 머문다.
6. 갑을관계, 이제는 구조적 문제다
발주처와 수행사의 ‘갑을관계‘는 개인의 태도 문제가 아니다. 입찰 구조 자체가 권력의 비대칭을 전제로 설계되어 있다. 선택권은 한쪽에 있고, 생존은 다른 쪽에 달려 있다.
여기에 용역 심사위원이라는 또 다른 권력이 개입한다. 발주처를 등에 업고 완장을 찬 심사위원, 특히 일부 교수 집단의 행태는 업계를 구조적으로 지치게 한다.
7. 자문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지배
자문은 조언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통제와 간섭으로 변질된다. 자문위원이 수행사에게 가르치려 들고, 훈계하고, 설계자처럼 군림한다.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 영향력은 행사한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이 있다. 발주처보다 자문위원의 한마디가 더 큰 부담이 되는 구조는 이미 비정상이다. 자문은 자문으로 끝나야 한다. 그 선을 넘는 순간, 그것은 갑질이다.
8. 전문가는 누구인가, 국가가 답해야 한다
전문가는 누구인가. 직함인가, 경험인가. 현장에서 수십 개의 프로젝트를 책임지고 결과를 만들어낸 전문업체 앞에서, 실무 경험이 부족한 심사위원 및 자문위원이 전문가인 척 군림하는 장면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
전문업체가 더 전문가다. 국가가 이 상식을 제도로 확인해 주어야 한다.
9. 대통령에게 바라는 네 가지
이제는 감히 요구한다. 선언처럼 말한다.
첫째, 디자인용역 입찰 심사 구조를 전면 점검하라.
둘째, 심사위원 풀을 공개하고 순환시켜라.
셋째, ‘리젝트 피’ 제도를 공식 의제로 올려라.
넷째, 심사 및 자문위원의 역할과 권한을 명확히 제한하라.
이 네 가지 없이 공정은 절대 존재할 수 없다.
10. ‘을의 눈물‘은 개인의 하소연이 아니다
‘을의 눈물‘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산업 구조의 경고다. 디자인을 소모품처럼 쓰면서, 창의성과 혁신을 말하는 국가는 설득력을 잃는다.
대통령이 직접 보고를 받는 지금이 적기다. 이 문제를 문화·산업·공정의 교차 지점에서 다뤄야 한다. 디자인용역 입찰 구조 개선은 업계만을 위한 요구가 아니다. 국가 경쟁력의 문제다.
다시금 이재명 대통령에게 외친다.
부디 이 문제를 외면하지 말아달라.
공정은 ‘선언‘이 아니라 ‘구조‘로 증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글_ 정석원 편집주간(jsw0224@gmail.com)
#이재명대통령에바란다 #디자인용역입찰 #디자인산업구조개혁 #공공입찰개혁 #리젝트피도입 #심사위원제도개선 #디자인노동의가치 #불공정관행정산 #디자인정글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