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전체보기

분야별
유형별
매체별
매체전체
무신사
월간사진
월간 POPSIGN
bob

컬쳐 | 리뷰

[디자인정글 편집인의 시선] 낡은 축구장에 새로운 삶을 심다 — 타이베이에서 발견한 도시재생의 지혜

2026-09-15

얼마 전 페이스북에서 흥미로운 사진 몇 장을 보았다. 낡고 녹슨 거대한 축구장 관중석에 채소와 꽃이 빼곡하게 자라고 있었다. 사람들이 앉아 경기를 보던 계단마다 화분과 재배상자가 놓여 있고, 지지대를 타고 넝쿨이 자란다. 그 사이 좁은 길에서는 사람들이 물을 주고 채소를 돌본다. 처음에는 합성사진인가 싶을 정도로 낯선 풍경이었다.

 

알고 보니 대만 타이베이의 중산축구장이었다. 1989년 문을 연 이 축구장은 2000년대 후반 축구장으로서의 기능을 마친 뒤 여러 용도로 활용되어왔다. 이후 낡은 시설을 모두 철거하고 새로운 건물을 짓는 대신 기존 관중석 일부를 활용해 시민들이 농사를 짓는 도시농업 공간으로 변신했다. 지금은 약 1,400개의 재배상자를 500명가량의 시민이 함께 가꾸고 있다고 한다. 가족과 학생, 젊은 직장인과 은퇴자들이 채소와 과일, 허브와 꽃을 키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축구장의 흔적을 지우지 않았다는 점이다. 계단식 관중석은 햇빛을 받기에 좋은 텃밭이 되었고, 흙을 관중석 전체에 붓는 대신 재배상자를 사용했다. 콘크리트 계단도, 철골 지붕도, 세월의 흔적도 그대로 남아 있다. 과거 사람들이 축구 경기를 보기 위해 모였던 장소가 이제는 식물이 자라고 이웃이 만나는 거대한 계단식 정원이 된 것이다.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게 진짜 도시재생 아닐까.’

 

<부수지 않고 ‘사용법’을 바꾸는 디자인>

 

우리나라에서 ‘도시재생’이라고 하면 아직도 건축공사를 먼저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낡은 건물을 철거하고 새로운 문화시설을 짓고, 광장을 만들고, 벽화를 그리고, 조형물을 세우고, 카페와 상업시설을 들여놓는다. 물론 지역에 따라 이런 물리적 개발도 필요하다. 그러나 도시재생을 너무 오랫동안 ‘낡은 공간을 새것처럼 만드는 일’로만 생각해온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타이베이 중산축구장의 흥미로운 점은 오히려 많이 디자인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낡은 관중석을 새것처럼 단장하지도 않았고, 거대한 랜드마크를 새로 세우지도 않았다. 대신 그 공간에 새로운 ‘사용법’을 넣었다. 사람이 앉던 곳에 흙과 식물이 들어가고, 관중이 지나가던 통로에서 주민들이 만나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공간의 형태를 뜯어고치기보다 그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과 프로그램을 바꾼 것이다.

 

나는 이것이 오히려 훨씬 수준 높은 디자인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디자인은 반드시 새로운 형태를 만드는 일만은 아니다. 이미 존재하는 공간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곳에 새로운 쓰임을 부여하는 것도 디자인이다. 특히 인구가 줄고 빈 공간이 늘어나는 시대에는 ‘무엇을 새로 만들 것인가’보다 ‘이미 있는 것을 어떻게 다시 사용할 것인가’가 더 중요한 디자인 과제가 될 수 있다.

 

낡고 녹슨 거대한 축구장 관중석에 채소와 꽃이 빼곡하게 자라고 있었다. 사람들이 앉아 경기를 보던 계단마다 화분과 재배상자가 놓여 있고, 지지대를 타고 넝쿨이 자란다. 그 사이 좁은 길에서는 사람들이 물을 주고 채소를 돌본다. 처음에는 합성사진인가 싶을 정도로 낯선 풍경이었다. (사진: SNS)

 

 

<가장 좋은 수확물은 채소가 아니라 ‘관계’다>

 

이 텃밭에서 상추와 토마토, 오이와 허브가 자란다는 사실보다 내게 더 흥미로운 것은 따로 있다. 그곳에서 사람 사이의 관계가 함께 자란다는 것이다.

 

오늘날 도시는 수많은 사람을 아주 가까운 곳에 모아놓았지만, 반드시 사람들을 연결해주지는 않는다. 아파트에서는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면서도 옆집 사람의 이름조차 모른다.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고도 서로 휴대전화만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물리적인 거리는 가까워졌지만 사람 사이의 거리는 오히려 멀어진 셈이다.

 

그런데 텃밭에서는 자연스럽게 대화가 시작된다. “이 상추는 언제 심었어요?”, “벌레가 생겼는데 어떻게 해야 하지요?”, “고추가 너무 많이 열렸는데 좀 가져가세요.” 거창한 공동체 프로그램을 만들지 않아도 식물을 함께 키우는 과정에서 서로 묻고 가르쳐주고 나누게 된다. 씨를 뿌렸으면 다시 찾아와야 하고, 물을 주고 잡초를 뽑아야 하며, 옆 사람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수확물이 많으면 자연스럽게 나누게 된다.

 

그래서 공동체 텃밭에서 가장 중요한 수확물은 어쩌면 채소가 아닐지도 모른다. 진짜 수확물은 ‘관계’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사람과 땅의 관계, 아이와 자연의 관계, 그리고 주민과 자신이 사는 동네의 관계가 다시 만들어진다. 공동체를 회복시키겠다고 거창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사람들을 억지로 모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무언가를 키우고 기다리고 수확하는 과정에서 공동체가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이다.

 

1989년 문을 연 이 축구장은 2000년대 후반 축구장으로서의 기능을 마친 뒤 여러 용도로 활용되어왔다. 이후 낡은 시설을 모두 철거하고 새로운 건물을 짓는 대신 기존 관중석 일부를 활용해 시민들이 농사를 짓는 도시농업 공간으로 변신했다. (사진: SNS)

 

 

<우리나라에도 이런 공간은 널려 있다>

 

이 사진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우리나라를 떠올렸다. 우리에게 공간이 없어서 이런 일을 못 하는 것일까. 오히려 전국을 돌아다녀 보면 제대로 사용되지 않는 공간이 너무 많다.

 

학생이 줄어 문을 닫은 폐교가 있고, 사람이 떠난 마을에는 빈집이 늘어난다. 사용빈도가 떨어진 운동장과 체육시설, 기능을 잃은 창고와 공장, 폐역과 옛 공공시설도 있다. 도시에는 건물 옥상과 고가도로 아래, 공공시설 주변의 자투리땅처럼 제대로 활용되지 않는 공간도 적지 않다. 특히 인구가 줄어드는 지방으로 갈수록 앞으로 이런 유휴공간은 더욱 늘어날 것이다.

 

그런데 이런 공간이 생기면 우리는 너무 빨리 “여기에 무엇을 지을까?”부터 생각한다. 나는 이제 질문의 순서를 바꿔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함께하게 할까?”라고 먼저 물어보자는 것이다. 건축부터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활동부터 생각하고, 그 활동에 꼭 필요한 만큼의 공간과 시설을 디자인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폐교 운동장은 마을 공동텃밭이 될 수 있고, 사용하지 않는 공공청사 옥상은 도시농장이 될 수 있다. 오래된 시장의 빈 공간은 주민들이 함께 음식을 만들고 나누는 공동부엌이 될 수도 있고, 폐역 주변의 유휴지는 정원과 작은 농장이 결합된 커뮤니티 공간으로 바뀔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유휴공간을 텃밭으로 만들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공간마다 그 지역 사람들이 함께할 수 있는 새로운 ‘쓰임’을 찾아주자는 것이다.

 

<100억짜리 건물보다 100명이 매주 찾아오는 공간>

 

지역을 다니다 보면 적지 않은 예산을 들여 지어놓고도 사람이 찾지 않는 시설을 종종 만난다. 문화센터도 있고 전시관도 있고 체험관도 있다. 건물은 멋있고 간판도 새것인데 정작 사람이 없다. 공간은 만들었지만 그곳을 지속적으로 사용할 사람과 관계와 프로그램을 함께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건설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반복해서 만나고, 함께 무언가를 하고, 자신이 그 공간의 주인이라는 느낌을 가져야 만들어진다. 그런 점에서 텃밭은 매우 원초적이면서도 강력한 커뮤니티 디자인 도구다. 식물은 계속 자라기 때문에 사람도 계속 찾아와야 한다. 씨를 뿌리는 순간부터 물주기와 돌보기, 수확과 나눔까지 사람들의 행동이 지속적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어떤 지역에서는 100억 원짜리 건물 하나보다 주민 100명이 매주 찾아오는 작은 공간 하나가 공동체를 되살리는 데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 도시재생 사업의 성과도 이제 얼마를 투자했고 무엇을 지었느냐보다, 사업이 끝난 뒤 몇 년이 지나도 얼마나 많은 주민이 그 공간을 자신의 일상 속에서 사용하고 있는지를 기준으로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더 흥미로운 것은 축구장의 흔적을 지우지 않았다는 점이다. 계단식 관중석은 햇빛을 받기에 좋은 텃밭이 되었고, 흙을 관중석 전체에 붓는 대신 재배상자를 사용했다. 콘크리트 계단도, 철골 지붕도, 세월의 흔적도 그대로 남아 있다. 과거 사람들이 축구 경기를 보기 위해 모였던 장소가 이제는 식물이 자라고 이웃이 만나는 거대한 계단식 정원이 된 것이다. (사진: SNS)

 

 

<‘도시재생’에서 ‘생활재생’으로>

 

나는 앞으로 도시재생의 관점도 조금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시재생이라고 하면 랜드마크를 만들고 관광객을 불러들이고 상권을 활성화해야 성공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주민에게 도시가 살아난다는 것은 훨씬 소박한 일일 수도 있다.

 

집 밖으로 나갈 이유가 생기고, 동네에서 인사를 나눌 사람이 한 명 더 생기는 것. 아이와 할아버지가 같은 공간에서 무언가를 함께하고, 내가 심은 토마토가 자라는 모습을 보기 위해 일주일에 두세 번 집 밖으로 나오는 것. 이런 변화 역시 훌륭한 도시재생이다.

 

나는 이런 접근을 ‘생활재생’이라고 부르고 싶다. 건물과 거리를 새것으로 만드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사람들의 일상과 관계를 되살리는 것이다. 특히 초고령사회와 인구감소 시대에는 지역경제 활성화 못지않게 사람들을 집 밖으로 나오게 하고, 다른 세대와 만나게 하고, 자신이 사는 동네와 다시 관계를 맺게 하는 일이 중요해질 것이다.

 

타이베이의 낡은 축구장은 그것을 아주 단순하면서도 강렬하게 보여준다. 축구장은 텃밭이 되었고, 관중은 농부가 되었으며, 관람석은 이웃을 만나는 장소가 되었다. 삐까뻔쩍한 상업시설을 들여놓거나 모든 흔적을 지우고 새 건물을 짓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흙을 만지고 씨앗을 심고 물을 주고 수확하면서 버려질 뻔했던 공간은 다시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들어왔다. (사진: SNS)

 

 

<디자이너는 ‘무엇을 만들까’보다 ‘무엇을 하게 할까’를 물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 디자이너의 역할도 달라져야 한다. 그동안 공간을 디자인한다고 하면 형태와 색채, 재료와 사인, 조명과 시설물을 먼저 생각했다. 하지만 앞으로의 공공디자인과 로컬디자인에서는 그보다 앞서 “사람들이 이곳에서 무엇을 함께하게 할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좋은 공공공간은 준공식 날 사진이 가장 멋진 공간이 아니라 사람들이 계속 찾아오는 공간이다. 좋은 도시재생 역시 사업이 끝났을 때 가장 화려한 곳이 아니라 5년, 10년 뒤에도 주민들이 사용하는 곳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디자이너는 공간의 모양만 디자인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공간에서 벌어질 행동과 경험, 더 나아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까지 디자인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타이베이의 낡은 축구장은 그것을 아주 단순하면서도 강렬하게 보여준다. 축구장은 텃밭이 되었고, 관중은 농부가 되었으며, 관람석은 이웃을 만나는 장소가 되었다. 삐까뻔쩍한 상업시설을 들여놓거나 모든 흔적을 지우고 새 건물을 짓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흙을 만지고 씨앗을 심고 물을 주고 수확하면서 버려질 뻔했던 공간은 다시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채소만 자란 것이 아니다. 사람이 모였고, 관계가 자랐고, 공동체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도시재생의 진짜 마법은 어쩌면 이렇게 소박한 곳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낡은 공간에 새 건물을 넣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심는 것.

 

우리나라 곳곳에 방치된 수많은 공간을 바라보며 이제 질문을 조금 바꿔보면 어떨까.

 

“여기에 무엇을 지을 것인가?”가 아니라 “여기에서 어떤 삶이 다시 시작되게 할 것인가?”

 

어쩌면 바로 그 질문에서 새로운 도시재생과 로컬디자인이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글_ 정석원 편집인

 

facebook twitter

#디자인정글 #편집인의시선 #도시재생 #공간재생 #생활재생 #로컬디자인 #공공디자인 #커뮤니티디자인 #유휴공간재생 #관계를디자인하다 

당신을 위한 정글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