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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정글 칼럼] “서점 여섯 곳이 마을을 바꾸었다” — 고창서점마을 1년, 이제 ‘특화마을’을 디자인할 때다

2026-09-18

<책을 파는 서점에서 사람이 찾아오는 마을로… 미술관마을·박물관마을·공예마을로 이어질 수 있는 새로운 지역재생 모델>

 

한 마을에 서점이 하나 생기는 것도 쉽지 않은 시대다. 그런데 전북 고창의 한적한 농촌에 작은 독립서점들이 모여 아예 하나의 ‘서점마을’을 만들었다.

 

2025년 10월 문을 연 ‘고창서점마을’이 어느덧 첫돌을 맞는다. 오는 10월 10일 열리는 1주년 생일잔치 안내문을 보면서 지난 1년을 돌아보게 됐다.

 

고창군 대산면에 자리 잡은 이 마을은 철학, 생태, 여행, 그림책, 그래픽노블, 윤동주 등 서로 다른 주제를 가진 여섯 개의 작은 독립서점에서 출발했다. 국내에서 처음 시도된 형태의 ‘서점마을’이다. 

 

시작은 거창하지 않았다. 문화평론가 이윤호 촌장을 비롯해 뜻을 함께한 사람들이 도시의 과도한 경쟁과 소비에서 조금 벗어나 책과 자연, 사람을 중심에 놓은 ‘소박하고 적정한 삶’을 살아보자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작은 서점을 각자 운영하되 공동 텃밭을 가꾸고, 함께 밥을 먹고, 필요한 것을 나누며 살아가는 일종의 생활공동체 실험이었다. 

 

그래서 필자가 보기에 고창서점마을의 진짜 의미는 ‘서점 여섯 곳이 생겼다’는 데 있지 않다.

 

책이라는 하나의 콘텐츠가 사람을 모으고, 사람들이 모이면서 마을의 정체성이 만들어졌다는 데 있다.

 

 

한 마을에 서점이 하나 생기는 것도 쉽지 않은 시대다. 그런데 전북 고창의 한적한 농촌에 작은 독립서점들이 모여 아예 하나의 ‘서점마을’을 만들었다.

 

 

<책을 팔았더니 ‘관계’가 쌓이기 시작했다>

 

지난 1년의 성과는 숫자로만 설명하기 어렵다.

 

처음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날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나둘 찾아오기 시작했다. 멀리서 책을 찾아오는 독자가 생겼고, 북토크와 공연이 열렸으며, 책을 읽으며 하룻밤을 보내는 북스테이도 만들어졌다. 서점과 농가의 상품을 묶어 보내는 ‘서점마을과 친구들’ 프로젝트에는 개장 반년 무렵 이미 150명 이상이 참여했다. 

 

마을의 첫 공식 축제였던 ‘페이지 원 페스티벌’에는 약 600명이 찾았고, 북토크와 다문화 영화제, 북캠핑 등이 이어졌다. 들판 한가운데 자리한 작은 서점들의 실험이 어느새 사람들에게 ‘이곳을 찾아가야 할 이유’를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더 흥미로운 변화는 마을 주민들의 반응이다. 이윤호 촌장은 KBS 인터뷰에서 주민들이 동네에 카페와 서점이 생긴 것을 좋아하고, 저녁이면 이곳이 마을 사랑방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를 기존의 ‘정주 주민’을 넘어 외부 사람까지 관계를 맺는 ‘관계 주민’의 개념으로 바라봤다. 

 

바로 이것이 중요하다.

 

인구가 줄어드는 지역에서 주민등록 인구만 늘리는 정책에는 한계가 있다. 이제는 그 지역을 좋아하고, 반복해서 찾아오고, 소비하고, 관계를 맺고, 자신의 사람들에게 다시 소개하는 사람을 얼마나 만들어낼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고창서점마을은 1년 동안 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고창군 대산면에 자리 잡은 이 마을은 철학, 생태, 여행, 그림책, 그래픽노블, 윤동주 등 서로 다른 주제를 가진 여섯 개의 작은 독립서점에서 출발했다. 국내에서 처음 시도된 형태의 ‘서점마을’이다.

 

 

<꽃밭도 하나의 콘텐츠가 되었다>

 

이번 1주년을 앞두고 이윤호 촌장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특히 눈길을 끈 대목이 있다.

 

마을 사람들이 비용을 조금씩 모아 약 1천 평의 땅에 수레국화를 비롯한 야생화 씨앗을 뿌렸다는 이야기다. 봄과 여름 사이 꽃이 피어나고 그것이 고창의 저녁노을과 만났을 때, 서점마을에는 책만으로는 만들 수 없는 또 하나의 풍경이 생겼다.

 

생각해보면 이것 역시 디자인이다.

 

건물 몇 채를 멋지게 짓는 것이 마을 디자인의 전부가 아니다. 서점이 있고, 그 앞에 꽃이 피고, 사람들이 책을 들고 걷고, 주민과 방문객이 함께 밥을 먹고, 저녁에는 노을을 바라보고, 밤에는 별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 이 모든 경험을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하는 것이 진짜 로컬 디자인이다.

 

결국 장소의 경쟁력은 시설의 크기가 아니라 그곳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이야기의 밀도’에서 나온다.

 

 

고창서점마을은 반대의 순서에서 시작했다. 먼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에게 책이라는 공통의 관심사가 있었다. 각자의 취향을 담은 작은 서점이 생기고, 그것들이 모여 하나의 마을 정체성이 됐다.

 

 

<이제 지자체가 ‘건물’이 아니라 ‘특화마을’을 만들 때다>

 

고창서점마을을 보면서 전국의 지방자치단체가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 있다.

 

지금까지 지역재생 사업은 대체로 비슷했다. 오래된 건물을 리모델링해 문화센터를 만들고, 전망대를 세우고, 광장을 만들고, 벽화를 그리고, 카페를 넣는다. 전국을 여행하다 보면 이름과 위치만 다를 뿐 어디선가 본 듯한 공간을 자주 만나게 된다.

 

시설은 있는데 찾아갈 이유가 약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공간은 만들었지만 콘텐츠와 사람을 함께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창서점마을은 반대의 순서에서 시작했다. 먼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에게 책이라는 공통의 관심사가 있었다. 각자의 취향을 담은 작은 서점이 생기고, 그것들이 모여 하나의 마을 정체성이 됐다.

 

필자는 앞으로 지자체의 역할도 여기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자체가 직접 서점을 운영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특정 분야에 열정과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이 지역에 모여 작은 생태계를 만들 수 있도록 토지와 빈집, 폐교, 창고 같은 공간을 연결하고 초기 정착을 돕는 ‘플랫폼’ 역할을 해야 한다.

 

큰 시설 하나에 수십억 원을 투입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여러 명의 작은 창작자와 운영자가 마을 안에서 지속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고창서점마을의 첫 1년은 아직 작은 시작이다. 하지만 이 작은 실험이 던지는 질문은 결코 작지 않다.

 

 

<‘서점마을’ 다음에는 ‘미술관마을’도 가능하다>

 

그렇게 생각하면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서점 여섯 곳이 모여 서점마을이 될 수 있다면, 작은 미술관 열 곳이 모인 ‘미술관마을’도 만들 수 있다. 한 집에서는 그림을 보여주고, 다른 집에서는 사진을 전시하고, 또 다른 집에서는 조각이나 공예품을 보여주는 것이다.

 

‘박물관마을’도 가능하다. 오래된 농기구를 모은 집, 장난감을 모은 집, 카메라를 모은 집, 생활용품을 모은 집, 지역의 기록을 모은 집이 각각 작은 박물관이 되고 마을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에코뮤지엄이 될 수 있다.

 

공예가들이 모이면 공예마을이 되고, 디자이너들이 모이면 디자인마을, 음악가들이 모이면 음악마을이 될 수 있다. 식물, 음식, 그림책, 영화, 사진, 목공, 도자기, 한글 등 무엇이든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지을 것인가’에서 ‘누구를 모을 것인가’로 지역정책의 질문을 바꾸는 것이다.

 

사람이 모이면 콘텐츠가 생기고, 콘텐츠가 쌓이면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이야기가 있는 곳에는 사람이 찾아오고, 사람이 찾아오면 카페와 숙박, 식당과 상점 같은 작은 경제가 따라온다.

 

그것이 지속가능한 로컬 브랜딩의 출발점이다.

 

<전국에 ‘작지만 분명한 마을’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고창은 이미 흥미로운 토양을 갖고 있다. 서점마을에서 약 26㎞ 떨어진 곳에는 2006년 폐교를 활용해 시작한 ‘책마을해리’가 있고, 최근에는 황윤석도서관까지 들어섰다. 각각 별개의 시설처럼 보이지만 이들을 연결하면 고창이라는 지역 전체가 ‘책의 고장’이라는 훨씬 강력한 브랜드를 가질 수 있다. 실제로 고창서점마을 역시 조성 과정에서 책마을해리를 찾아 조언을 구했고, 이후 프로그램과 사람들이 오가며 관계를 이어왔다. 

 

이것이 로컬 브랜딩이다.

 

전국 모든 지역이 거대한 관광지가 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제는 작지만 분명한 ‘이유를 가진 마을’이 필요하다.

 

“책을 좋아하면 고창의 그 마을에 가봐.”
“작은 미술관을 좋아하면 그 마을에 가봐.”
“옛 물건과 이야기를 좋아하면 그 박물관마을에 가봐.”

 

사람들의 입에서 이런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순간, 지역에는 브랜드가 생긴다.

 

고창서점마을의 첫 1년은 아직 작은 시작이다. 하지만 이 작은 실험이 던지는 질문은 결코 작지 않다.

 

지역소멸 시대에 우리는 무엇으로 사람을 지역으로 불러들일 것인가. 거대한 건물과 축제로 불러들일 것인가, 아니면 취향과 관계와 이야기가 있는 작은 마을로 불러들일 것인가.

 

필자는 후자의 가능성을 더 기대한다.

 

고창 서점마을의 첫돌을 축하한다. 앞으로 이곳에 책이 더 많이 쌓이는 것만큼이나 사람이 쌓이고, 관계가 쌓이고, 이야기가 쌓이기를 바란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나라 곳곳에 서점마을뿐 아니라 미술관마을, 박물관마을, 공예마을, 디자인마을 같은 저마다 다른 얼굴을 가진 특화마을들이 생겨나기를 기대한다.

 

그때 지방자치단체가 해야 할 일은 가장 큰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사람들이 모여 가장 오래 머물 수 있도록 판을 만들어주는 일일 것이다.

 

지역을 살리는 것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고, 사람을 불러들이는 것은 결국 그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글_ 정석원 편집인
사진 출처_ 고창군 홈페이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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