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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 | 리뷰

차지량의 이동을 위한 회화 展

2008-04-08


전방위 아티스트 차지량의 첫번째 개인전이 명동에 위치한 쌈지 일러팝갤러리에서 열렸다. 디자인정글 이달의 디자이너 코너에 소개된 지 약 6개월 만에 갖게 된 그의 이번 첫 전시회는, 우표를 뿌리로 이야기가 파생되고 그림이 전개되는 독특한 형식의 연작 ‘이동을 위한 회화’를 모두 만나볼 수 있다. 이달 30일까지다.

취재 | 이상현 기자 (shlee@jungle.co.kr), 사진 | Ham

이동을 위한 회화 展
2008. 4.5 ~ 2008. 4. 30
쌈지 일러팝
서울 중구 명동2가 54-37 명동안나수이 3층
02.773.2775
www.ssamzie.com


명동의 무시무시한 인파를 뚫고, 안나수이 매장에 위치한 쌈지 일러팝갤러리를 찾았다. 작가가 제작한 천진난만 입간판을 확인한 뒤, 매장 안쪽 계단을 따라 3층까지 오른다. 올라와보니 전시장에는 켜켜이 쌓인 소포 상자들만 버티고 서있다. 다소 황당한 마음을 누그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면 차지량이 친절하게 설명을 해 놓은 전시 안내도를 확인할 수 있다.

“열어라 참깨”를 외치는 건 아니고, 소포 상자 중 가장 덩치가 큰 녀석을 ‘등짝을 밀 듯’ 가만히 손으로 밀어본다. 녀석이 고분고분 비켜준다면 입구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이젠 신발을 벗고 허리를 굽혀 전시장으로 들어갈 차례. 조숙한 여인네나 발에 땀 많이 차는 남정네라면 저어할 노릇이지만, 차지량 왈 “냄새 나도 괜찮아.”


이제 보니 등짝을 밀린 녀석은 작가의 그림 속에 종종 등장하던 소포 로봇. “오랜만이다, 와줘서 고마워”라고 인사를 하는 듯 녀석이 친근하다. 냄새 나는 발을 꼼지락거리며 본격적으로 전시장을 둘러본다. 박스 상자로 바닥을 깔고 도배를 한 전시장 벽에 초기작에서부터 근작에 이르는 ‘이동을 위한 회화’ 연작이 모두 걸려있다. 디자인정글에 소개되었던 이전 작업이 다소 서정적인 ‘화풍’이었다면, 이번에 소개된 근작은 더욱 활기차고 건강해 보인다.

전 이명박 서울 시장의 도시 개발을 비꼬는 ‘서울시에게’나 기름 유출로 서해안을 망가뜨린 ‘삼성 중공업에게’ 보내는 작품 등에선 꽃과 나무와 새를 주요 모티브로 삼아왔던 작가의 굵어진 목소리를 느낄 수 있다. 또한 안 그래도 얇은 심을 곱게 갈아서 열심으로 그렸던 화법도 아이의 그림인 양 자유롭게 풀어진 점도 눈에 띈다. 그리고 친구들과 보냈던 청춘의 시절들을 담아왔던 그림도 여전한데, 그간 더욱 즐겁고 신나는 일들이 많았었는지 유머와 활기가 넘쳐난다.


작가 차지량의 그림을 보는 건, 한 통의 편지를 받는 것과 비슷하다. 단순하게는 그림에 우표가 붙어 있고, ‘누구누구에게’라는 제목이 달려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보다 그의 작품이 편지처럼 다가오는 이유는, 별이 빛나는 창가에 앉아 밤새도록 썼다 지우며 제 마음을 담기 위해 문장을 고르는 소년처럼 그가 진심으로 작품에 '마음'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번지르르한 멋진 말로 설교와 훈계를 늘어놓거나 지지리 궁상맞은 관념어로 자신의 현실을 토로하는 편지가 아니다. 다만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으며 너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상대의 안부를 묻고 서로의 안녕을 기원하는, 그런 다음에 “보고 싶어 죽겠다”는 기분 좋은 투정으로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편지가 바로 차지량의 편지인 것이다.

그의 작품을 본 사람들이 그 편지의 '받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마음이 동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리라. 편지를 읽듯 찬찬히 그림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아무에게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내밀한 마음의 주소, 꽃도 나무도 없이 버석버석 말라가는 사막과도 같은 개인의 삭막한 내면에 물이 흐르는 듯한 촉촉한 생기가 도는 순간을 경험한다. 눈을 지긋이 감으면 "오랜만이다. 찾아와줘서 고마워"라는 말이 입안을 맴돈다. 그리고 '너'의 안부를 가만히 묻는다.


이날 전시 오프닝 현장에는 따뜻한 마음을 전달받은 그의 친구들과 팬들이 찾아왔다. 차지량은 그들을 위해 ‘짜파게티 요리사’가 되어 땀을 뻘뻘 흘리며 ‘자장맛 라면’을 요리했고 첫번째 개인전을 축하하기 위해 친구들도 한증막에 온 듯 땀방울을 떨구며 키보드를 두드리고 바이올린을 켜고 노래를 불렀다.

그 사이에 기자도 가만히 앉아 있으니 그들의 친구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드는 엉뚱한 생각, 이 전시장이 커다란 소포 상자처럼 느껴졌다. 머나먼 나라로 날아가는 소포, 명동의 무성한 소음이 서서히 잦아질수록 우리는 하늘로 두둥실 떠오른다. 우표가 이렇게나 많이 붙어 있으니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그의 작품이 보내는 사람 차지량과 받는 사람이 함께했던 추억, 즉 젊음의 빈 노트에 채워진 우리들의 이야기였듯, 커다란 소포 상자를 닮은 이 전시장을 이동을 위한 회화 ‘3D 버전’ 쯤으로 불러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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