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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 | 리뷰

굴레를 벗어나

김어진 | 2015-12-16

 

오만 가지 시시한 사람들이나 월급쟁이가 되는 것 같지만, 조직의 한 조각 됨이란 그리 만만하지가 않다. 회사원은 자유와 봉급을 교환한다. 시스템이 만들어준 옷에 몸을 구겨 넣고 거대 장치의 작은 톱니바퀴가 되기 위해 포기를 배워야 한다. 쉽게 말해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는’ 슬픈 숙명. 


마찬가지로 노동자를 부당 해고하고, 소비자를 기만하고, 시장 독점으로 중소기업의 씨를 말리는 업체가 ‘착한 기업’ 아이덴티티 디자인을 요구해 온다면 에이전시나 인하우스 디자이너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일은 제 신념과 맞지 않으니 할 수 없습니다”라고 거절한다면 멋있겠지만, 슬프게도 드라마에서나 가능할 법한 시나리오다. 그렇다고 무릎을 꺾으며 배긴 굳은살이 나의 감수성마저 무디게 해주길 바랄 디자이너는 없을 터. 덕분에 디자이너는 저마다의 유토피아적 공간으로 스튜디오를 꿈꾸곤 한다.

에디터 | 나태양( tyna@jungle.co.kr)
자료제공 | 지콜론북

〈작업으로 말하는 사람들〉 표지 스프레드 이미지

〈작업으로 말하는 사람들〉 표지 스프레드 이미지


〈작업으로 말하는 사람들〉이라는 꽤 두툼한 책을 쓰고 엮은 김어진은 전문 글 작가가 아닌 디자이너다. ‘핸드프린트(Handprint)’ 시절의 김경철-김어진 2인 체제에 권준호가 합류해 지금은 세 명의 멤버로 ‘일상의 실천’을 꾸려 나가는 중이다. 인권 및 환경단체와 일하고 강정마을이나 세월호 같은 사회적 이슈에 대한 목소리를 낸다는 이유로 ‘좌파 스튜디오’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기도 하지만, 그 역시 한때는 디자인 에이전시에 입사해 팀장이라는 타이틀을 꿈꾸던 20대 청년이었다. 첫 장 노란 색지에 펼쳐지는 에세이는 자전적일지언정 ‘범 디자이너적’ 고민을 담고 있다. 작업으로 발언할 수 없는 작업자, 불합리에 침묵하는 비겁자, 술자리 안줏거리로 사상(思想)을 휘발시키는 나날들. 해소되지 않는 갈증에 시달리기를 5년, 김어진은 과감히 울타리 밖으로 나선다.

〈작업으로 말하는 사람들〉 에세이 펼침면

〈작업으로 말하는 사람들〉 에세이 펼침면


하지만 자유와 광명이 독립 선언과 동시에 패키지처럼 딸려오는 물건은 아니다. 독립 디자이너가 되는 일의 방점은 ‘더 많은 자유의 확보’보다는 ‘주체성을 어떻게 회복하느냐’에 놓인다. 조직의 관성에 최적화된 이에게 처리할 수 없는 무제한의 자유란 카오스 상태와 다르지 않다. 그들의 몸은 여전히 한계선 안에 존재할 때 아늑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김어진은 진정 작업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면 그 자신의 손으로 수동성이라는 때를 벗겨내야 함을 깨닫는다. 자신의 조형을 논리와 당위로 증명하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 또한 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는 관습의 반복 속에서 ‘화석’처럼 굳어지는 이들을 반면교사 삼아 다시 한 번 이론서와 원서를, 계산기와 자를 꺼내 든다. 출발한 지점으로 돌아가 길을 새로 쓰기 위해서다.

〈작업으로 말하는 사람들〉 디자이너 소개 펼침면 디자인

〈작업으로 말하는 사람들〉 디자이너 소개 펼침면 디자인


자, 짧은 에세이를 애피타이저 삼아 본식으로 들어가 보자. 인터뷰집의 본령에 충실한 중반부에는 좀 더 푸짐한 상이 차려져 있다. 김어진은 강경탁, 김가든, 김의래, 노트폴리오, 더블유씨, 물질과 비물질, 오디너리 피플, 일상의 실천, 제로랩, 한주원 등 스튜디오 및 관련 업체 10팀을 만나 허심탄회한 대화를 터놓는다. 이름이 제법 익숙한 디자인 스튜디오라 해서 고고한 자태로 상아탑을 지키고 있을 거라 상상한다면 오산. 그들도 그저 그림 그리는 게 좋아 디자인을 시작한 환쟁이라는 점에서는 여느 누구와 다르지 않다. 

동종 업계의 애환을 아는 ‘동지’가 인터뷰어로 나선 덕분인지 인터뷰에 임하는 열 팀도 치장하려는 욕심이 없다. 저자 스스로 “자조 섞인 자기반성”이 동기가 되었다고 밝혔듯이, 〈작업으로 말하는 사람들〉은 작업자를 둘러싼 ‘아우라’보다는 그 한 꺼풀 환상 뒤에 감춰진 민낯을 들여다보고 싶은 욕망에서 출발한 책이다. 인터뷰이 저마다의 배경, 갈등, 이상, 철학을 비롯해 클라이언트와의 관계 설정이나 국내 디자인 교육의 현실, 작업 비용, 사업으로서의 소규모 스튜디오 운영 같은 제법 현실적인 논의들도 뒤따르지만, 이 책에는 특별히 구미를 당기는 또 다른 지점이 있다. 바로 조직을 떠난 디자이너가 취할 법한 ‘대안적 삶’의 선택지가 펼쳐진다는 것.

디자이너 한주원의 <도서관독립출판열람실> 작업

디자이너 한주원의 <도서관독립출판열람실> 작업


최근 독립한 강경탁 디자이너의 인터뷰는 그의 작업만큼 정직하다. 그는 4년간 ‘워크룸 프레스’에 근무하며 경험한 디자인 스튜디오의 빛과 그늘, 인쇄물을 향한 동경으로 디자인을 시작한 만큼 엄격한 글과 타이포 철학, 본인의 작업에 대한 아쉬움과 항변(?) 등 조금은 민감한 주제에 가감 없이 ‘썰’을 푼다. 가평에서 스튜디오 겸 게스트하우스 ‘김가든’을 운영하는 김가든은 ‘찌라시’ 디자인 같은 생계형 소일거리부터 시작했다. 불안한 시작에도 불구하고 곧 독특한 색깔로 인디 뮤직 신과 찰떡같은 궁합을 자랑하며 이름을 알렸고, 현재는 아내와 전원생활을 즐기며 ‘가든’의 확장을 꿈꾸고 있다.

‘물질과 비물질’은 그 이름처럼 섞이지 않을 듯한 두 요소의 기묘한 조합이다. 글쟁이로 시작해 현재는 디자이너를 겸하고 있는 김종소리와 디자인을 전공한 정통(?) 디자이너 황은정. 두 사람이 꾸린 신생 스튜디오는 비전공자의 디자인, 공동 작업의 과정, 그리고 디자이너와 에디터의 이상적인 컬래버레이션이라 할 법한 소규모 독립출판의 현실을 공유한다. 

더블유-씨(W/C)의 포트폴리오 일부

더블유-씨(W/C)의 포트폴리오 일부


권영찬과 유재완은 포트폴리오를 저장하기 위해 개장한 아카이빙 사이트 ‘더블유-씨(W/C)’를 통해 얼렁뚱땅 필드에 입성한 케이스다. 아직 학부생 신분인 신출내기로서 경험하는 시행착오와 부당한 시선들, 정규 교육 외 활동으로 스스로 개척하는 가능성 이야기가 풋풋하다. 여전히 서로를 ‘동기’라고 부르는 ‘더블유-씨’의 미래는 ‘오디너리 피플’ 정도가 될까. 대학 동기 다섯 명이 좌충우돌하며 어엿한 ‘네임드’ 스튜디오로 자리 잡기까지, 그 역사 뒤에는 10년이라는 세월이 있다. 팀 결성의 시발점이 됐던 <포스터만들어드립니다>부터 CA 아트 디렉팅 작업, 매일매일 그래픽 리포트 등 굵직한 프로젝트를 되짚어 본다.

〈작업으로 말하는 사람들〉 중 김의래의 ‘책장’

〈작업으로 말하는 사람들〉 중 김의래의 ‘책장’


‘일상의 실천’은 ‘의뢰인이 추구하는 가치에 동의할 수 있는가’를 작업 기준으로 고려하다 보니 기업 프로젝트보다는 비영리 단체와의 협업이 잦은 팀이다. 이들은 ‘사회를 향한 디자인’이라는 멋스러운 슬로건에 뒤따르는 현실적인 애로사항들,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양보할 수밖에 없는 국면들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한편, ‘안그라픽스’, ‘활자공간’ 등 쟁쟁한 디자인 회사들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김의래는 ‘흘러가는 물’에 자연스럽게 몸을 맡기다 보니 스튜디오 밈(mim)을 차리게 됐다. 더불어 유일무이한 디자인 팟캐스트 방송 ‘디자인말하기’의 진행자이자 대안적 디자인 교육 플랫폼 ‘타이포그래피 야학’ 운영자이기도 한 그의 인터뷰는 디자인 교육자로서의 문제의식과 철학에 무게를 싣는다.

오디너리 피플 서정민의 ‘게임’과 이재하의 ‘제약 조건’

오디너리 피플 서정민의 ‘게임’과 이재하의 ‘제약 조건’


각각의 인터뷰에는 디자이너들의 물건들과 포트폴리오가 앞뒤로 부록처럼 끼워져 있다. 디자이너들이 아끼는 유·무형의 작업 툴, 소장품, 좋아하는 공간 사진을 짧은 코멘트와 함께 엿볼 수 있으며, 인터뷰 뒤에는 작품 이미지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포트폴리오 북처럼 한 번에 후루룩 넘겨볼 수도 있지만, 사실상 본문의 레퍼런스로 사용되는 사진들이다. 디자이너가 특정 작품을 언급할 때마다 각주 번호와 함께 페이지를 표기해 이미지와 번갈아 볼 수 있도록 배치한 것이다. 비록 페이지를 찾아 책장을 뒤적거려야 한다는 번거로움은 있지만, 텍스트와 양질의 시각 자료를 함께 제공하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선명히 묻어난다.

〈작업으로 말하는 사람들〉 마지막 장 ‘대담: 디자이너가 바라보는 디자인 교육, 디자인 흐름’ 펼침면

〈작업으로 말하는 사람들〉 마지막 장 ‘대담: 디자이너가 바라보는 디자인 교육, 디자인 흐름’ 펼침면


코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디저트는 ‘대담’이다. 인터뷰이에서 대담자로 옷을 바꿔 입고 다시 등장한 강경탁, 권준호, 김의래는 짧은 만큼 밀도 높은 대화를 통해 국내 디자인의 ‘판’을 읽어본다. 80~90년대 디자인 산업의 양적 팽창에 이바지했던 ‘호돌이 세대’가 주도하는 국내 디자인 교육의 체증(滯症), 유학파를 왕좌에 올리는 엘리트주의의 한계와 현역 디자이너를 박명하게 만드는 산업 구조, 디자인 공급 과잉과 소규모 스튜디오 붐에 대한 진단 등 귀담아 들어볼 만한 이야기가 있다.

물론 〈작업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본보기를 제시하겠다는 의도로 쓰인 책은 아니다. ‘회사를 탈출해 자영업자 되기’를 모든 디자이너가 깃발 꽂아야 할 최종 고지로 삼을 이유도 없다. 그러나 살다 보면 한 번쯤은 “남의 돈 벌어먹기 참 힘들다”는 생각이 드는 시기가 오게 마련. ‘내가 이러려고 디자인을 시작한 게 아닌데’ 하는 자괴감이 밀려들면서도 한편으론 뭘 어떻게 바꿔나가야 할까 막연한 기분이 들 때, 〈작업으로 말하는 사람들〉 을 펼쳐봐도 좋겠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찾기 위해 몸부림하는 군상 속에서 나만의 ‘대안’을 발견할지   모르는 일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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