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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 | 리뷰

필립스탁과의 이별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2008-05-20


필립 스탁이 은퇴를 선언했다. 독일 주간지 ‘Die Zeit’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나는 물질주의의 생산자였으며, 그 사실이 부끄럽다. 그동안 내가 디자인한 모든 것은 불필요했다. 2년 안에 분명히 (디자인을) 포기할 생각이다. 아직 무엇을 할지는 모르겠다. 나를 표현하는 다른 방법을 찾고 싶다. …디자인이란 자기표현의 지겨운(dreadful) 방식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이 ‘폭탄 선언’을 과연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디자이너 8인에게 물어봤다.

에디터 이상현 (shlee@jungle.co.kr) | 사진 스튜디오 salt



몇일 전 아침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아직 잠에서 덜 깬 상태였지만 오늘을 열심히 사는 듯 전화를 받았다. “필립 스탁의 이번 은퇴선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의 귀는 필립 스탁이란 단어만 익숙한 듯 받아들였고, 은퇴선언이란 말은 연결점을 찾지 못해서 몇 차례 다시 물어본 것 같다. 그렇게 은퇴소식을 처음 접한 나는 몇해 만에 그의 작품집을 책장에서 꺼내 들었다. 영화 ‘시네마천국’의 마지막 장면처럼.

내가 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0년 전쯤일 것이다. 오브제에 관심을 가지던 나에게 교수님께서 보여준 책 한 권, 필립 스탁의 작품집이었다. 그때 나는 마치 직선만 가득한 세상에서 곡선을 찾은 것 같은, 또는 흑백 TV만 보다가 컬러 TV를 처음 본 것 같은 느낌에 흥분하며 책 한 권을 눈과 마음에 담았다. 또 한동안 필립 스탁이란 단어(?)를 마치 조미료처럼 적당량 대화에 넣어주기만 해도 어느 정도 디자인적 내공이 쌓인 듯한 기분을 느끼기도 하며 ‘디자인 유년기’를 보냈다. 이제 나는 영화처럼 성공한 토토는 아니지만 어른이 되었고, 나의 알프레도는 디자인을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나는 물질주의의 생산자였고, 이 사실이 부끄럽기만 하다.” 그의 소식을 듣고 왜 갑자기 ‘노벨과 다이너마이트’가 생각났을까. 과소비와 사치, 불완전연소를 외치는 현대사회는 이미 괴물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괴물의 달콤한 무기가 되어버린 디자인, 그 중심 영역에 서 있을 필립 스탁. 형태와 색상, 또는 스타일이 아닌 ‘인간’ 자체가 디자인의 중심이었던 그에게 어쩌면 산업사회의 질주가 노벨의 다이너마이트처럼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을까.

어쩌면 그의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디자인은 이번 디자인 포기 선언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유형의 디자인에서 무형의 디자인 경지에 올랐을지도 모르는 거장의 선택이기에 나는 또 한 번 그로 인해 디자인에 대해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벌써 그의 유쾌한 곡선과 우아한 면(面)이 존재하는 스탁스러움(starckable)이 그립다.

p.s. 10년 전에 빌린 교수님의 필립 스탁 작품집을 이제 돌려드려야겠다.


한창 디자인을 공부하고 있는 학생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다. 현재 세계 디자인계의 중심에 있고, ‘나도 언젠가 저런 디자이너가 되어야지’라고 생각하게 해준 장본인이 디자인에 대한 염증을 토로했다니 말이다. 물론 나보다 몇십 년 전부터 디자인을 해온 그분의 생각을 다 알 수는 없지만, 나는 그의 디자인이 모두 쓸모 없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가령 주시 살리프(Juicy Salif)를 보자. 기능적으로는 그 쓰임이 떨어질지 몰라도 그 어떤 레몬즙 짜개보다 높은 수준의 심미적 충족감을 준다. 그것은 단지 레몬즙 짜개가 아닌, 장식품인 그 이상이다. La Marie, Louis Ghost, Mr. Impossible 등 그가 카르텔과 작업하면서 만들어낸 의자들은 모두 디자인 역사에 영향을 미친 제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볼수록 아름다운 작품일 뿐 아니라 필립 스탁과 카르텔은 라 마리, 루이 고스트와 같은 싱글 몰드 방식이나 미스터 임파서블에 적용된 레이저 기술을 응용한 최신 용접 방식과 같은 새로운 제작 방법을 가져왔다. 이는 디자인이 기술의 발전을 이끈다고 생각한다.

필립 스탁의 은퇴는 디자인계의 큰 손실이다. 그는 언제나 나에게 디자이너로서 앞으로 나아갈 방향이자 미래였다. 그가 디자인을 하지 않는다 해도 지금까지 그가 만들어온 작품들은 여전히 나에게 귀감이 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나는 쓸모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 쓸모 없는 것이라도 누군가에게 쓸모 있게 만드는 것, 그렇게 신데렐라를 만드는 일을 매력적이라 생각했다. 마음 한편에는 신데렐라에게 그저 드레스를 입히고 유리구두를 신기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갸우뚱 하기도 했으나, 그래도 그녀에게 드레스를 입혀주는 것 자체만으로 의미 있지 않냐고 스스로에게 사탕발림을 하면서 말이다.

나는 어미와 같은 존재인 디자이너로서 이 세상에 무언가를 내놓고, 그 잉태의 과정과 출산에 쏟은 열의와 달리 자식의 삶을 무책임하게 버려두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필립 스탁의 이번 디자인 포기 선언을 지켜보며, 마을의 익살스러운 큰아버지처럼 영향력 있는 그가 문제 제기에 대한 답을 제시하기 전에 먼저 도망가는 것은 아닐까 감히 실눈을 뜬다.

그의 유희적이고 조형적인 자식들은 그의 디자인 포기 선언과 함께 어디로 사라지게 되는 걸까. 아니, 필립 스탁이 이렇게 말해버리면, 이제 등산을 시작하는 나는 어쩌나. “이 산이 아니었다”며 정상까지 올랐는데 터벅터벅 내려올 것인가.


황혼을 넘긴 외국의 한 아저씨가 내뱉은 말에서 시작, 그것이 기사화되고 나 또한 관심 있게 읽는 일련의 과정 자체가 어찌 보면 디자인의 단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디자인은 영향력이다. 필립 스탁 ‘씨’의 선언에 우리가 당혹스러워 하는 광경을, 늘 그래왔던 필립 스탁 씨는 혐오로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필립 스탁 씨가 말하는 혐오의 이유는, 이제 막 전공을 시작한 디자인학과 학생부터 이제 실무를 시작한 나를 지나, 나이 지긋한 어르신 디자이너 모두가 생각해봤을 사안이다. 그의 다년간의 디자이너 생활 중엔, 벌써 여러 번 다녀간 생각이 아닐까. 오랫동안 모든 명성과 부러움을 한몸에 받고, 많은 부와 명예를 손에 쥔 2008년의 필립 스탁 씨가 하는 말이라, 그래서 얄밉기도 하다.

나는 그가 말하는 물질주의라는 화두보다도, 디자인에서 ‘영향력’이라는 논점이 더욱 머리에 짙게 그려진다. 순수미술이 아닌 인위와 생산을 근간으로 하는 디자인에 있어 물질주의는 혐오의 대상이 아닌 화해의 대상이 아닐까? 도리어 개개인이 분별력을 잃고, 물질주의로 치 닫는 영향력에 몸을 맡긴 우리의 문제가 아닐까. 난 지금 이 글을 쓰는 행위로 또 한 번 필립 스탁의 영향력에 두 손을 들고 만 것이다.

우리는 “필립 스탁 씨에게 디자인은 여태 재미있고, 성취감으로 가득 찬 대상이었는데, 이제 흥미를 잃었나 보다” 정도로 정리하자. 그것이 오해라면, 필립 스탁 씨는 물질주의와 화해하기 위해 이미 과거에 노력했거나, 앞으로 그래야 했다. 본인이 쓰레기라 말하는 것과 별개로, 나는 그중 몇 가지에 계속 후한 점수를 줄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스탁은 어느 디자이너보다 자유롭다. 형식을 파괴하고 기능에 구애받지 않는다. 탁월한 미적 감각으로 거침없이 사물을 표현해낸다. 답답하거나 절제됐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이것이 그를 이 시대 디자이너의 아이콘으로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한때 내가 그를 동경했던 이유기도 하다.

아직 짧은 시간이지만, 디자인이 직업인 나는 지나치게 자유로운 디자인이 싫다. 자극적이거나 감각적이거나 공격적이거나 화려한 것이 싫다. 예쁜 것이 싫다. 거의 대부분의 클라이언트가 요구하는 조건이긴 하지만 말이다. 최근의 디자인은 쉽다. 대부분의 제품이 감각적이고 화려하며 예뻐졌다. 지나치게 자유로워진 것 같다.

그의 은퇴선언은 최근 감각적이고 쉬워진 디자인의 동향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지나치게 자유롭고 쉬워진 현실이 싫어진 모양이다. 자신의 자유를 모방한 유사 ‘자유 디자인’이 판 치는 게 싫어진 모양이다. 어쩌면, 이러한 디자인의 도화선이 되었을지 모른다는 책임감에 은퇴를 선언하게 됐는지 모르겠다.

작은 바람이 있다면, 은퇴 전에 그만의 진정한 자유와 유머가 담긴 디자인을 보고 싶다. 요즘 디자인인 ‘예쁜’ 것이 아니라, 예전의 ‘좋은’ 것을 말이다.



봄이 되면 누구나 마음에 변화가 있듯 필립 스탁도 이젠 봄 나들이가 필요한 때가 되었나 싶다. 이번 필립 스탁의 디자인 포기 선언은 디자이너들에게 몇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 번째, 디자인에 대한 정의에 대해 디자이너들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사례가 되었다.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해왔던 디자인이 정말 디자인일까? 디자이너가 생각하는 디자인은 착각이 아니었을까 하는.

두 번째, 그가 말한 선언은 놀랍지만 그 동기나 앞으로의 방향성은 그다지 놀라운 사실은 아니다. 세상엔 이미 물질주의를 혐오하며 자기 자신을 위한 다양한 길을 가는 디자이너들이 너무나 많다. 단지 이들이 필립 스탁과 다른 것은 스타가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도 많은 디자이너들이 소박한 스스로의 삶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언론을 통해 디자인의 왜곡된 모습을 많이 접하며 그것이 진실인지 착각한다. 그의 선언은 이러한 착각 속에서 살아온 이들에게 1인칭 시점으로 콕 집어 작은 경각심을 야기한다. 디자인은 늘 진화하며 디자이너를 통해 그 경계를 스스로 허물고 확장하며 이루어지기에 디자인이 정말 무엇인지에 대한 정답은 그 누구도 정확히 말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도 예외는 아니다.

이번 필립 스탁의 디자인 포기 선언을 단순한 이슈거리로 호기심 어리게 관조하기보다는 이러한 경계를 허물 수 있는 촉매제가 될 수 있도록 디자이너 스스로 고민해봤으면 한다. 디자인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선 디자인 그 자체가 문화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많은 디자이너들이 디자인과 돈이 결부된 물질주의적인 사고만이 아닌 세상과 함께 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냉정하게 판단해보아야 한다. 착각의 늪에 깊게 빠지기 이전에 가치관의 틀을 좀 더 명확하게 마련하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 그가 정말 디자인을 포기한 것일까? 디자인이 아닌 그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가겠다던 그 길 역시 디자인이라는 영역의 일부가 아닐까 하는 조심스런 예측을 해본다.



필립 스탁이라는 이름은 이미 거부할 수 없는 물적 가치가 되어버렸다. 예순을 넘은 이 디자이너의 이름을 달고 수많은, 그러나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리 필요치 않은 것들이, 끊임없이 ‘생산’되고 있다. 생산은 디자이너의 밥줄이다. 지금 현재 우리 주위의 모든 제품이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디자이너는 늘 새로운 것을 생산하여야 한다. 하지만, 스스로 ‘과연 이것이 진정 필요한 것일까’라고 고민해보지 않은 디자이너가 있을까. 더군다나 이미 이름만으로 모든 것을 디자인할 수 있게 된 그라면.

역설적으로, 생산은 폐기를 전제한다. 제품화를 위한 과정에서 필요한 물적 제화는, 제품으로 나온 물건의 값어치 그 이상이다. 하지만, 그러한 제품도 사용되는 순간부터 폐기를 전제한다. 그리고 디자이너는 그 제품이 생산되어 사용되기 전에, 즉 폐기 이전에 다른 디자인의 제품을 생산하여야 한다. 또 다른 폐기를 위하여.

보통의 디자이너들은 그러한 생산과정에서 수많은 제약을 만난다. 하지만 이미 권위를 획득한 1%의 디자이너들에게는, 불가능의 디자인은 없다. 그저 상상하면, 으레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그런 무소불위의 권력 이면에 분명, ‘과연 이것이 진정 필요한 것일까’라는 의문을 넘어 더 큰 두려움이 깔려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디자인을 관두겠다는 그의 말은, 참 편한 얘기다. 오늘 실컷 놀던 놀이터에서 ‘내일부터 이제 여기 안 올래’ 하는 어린아이의 그것과 같다. 디자이너라는 작위를 가진 모든 사람들이 하는 고민에 한끝도 미치지 못하는 얘기다. 실제로도 자신이 만든 쓰레기들에는 책임을 져야 하지 않는가. 이제 더 이상 쓰레기를 생산하지 않겠다고 할지라도.


필립 스탁의 업적은 예쁜 디자인에서 찾을 수도 있지만 결국 그의 이미지 메이킹, 사업적 수완에서 더 빛을 발한다. 그는 결국 디자인의 정곡을 아는 사람이었고, 도도한 평론가와 디자인을 하나의 패셔너블한 가치로 추앙하는 무수한 대중의 애정 속에서 스타 디자이너의 표상이 되었다.

다시 말해, 그가 바로 이 시대가 원하는 디자이너 혹은 디자인 그 자체였던 것이다. 마치 텔레비전 리얼리티 쇼의 드라마틱한 주인공을 바라보듯이 디자이너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그의 디자인을 꿈꾸거나 그가 되기를 희망했다. 오늘도 전 세계 디자이너들은 그가 이룩한 ‘스탁 드림’을 표본 삼아 디자인을 가다듬고 스스로에게 혹독한 채찍질을 가하고 있을 것이다. 필립 스탁은 그다지 호된 비평을 받은 적 없는, 그야말로 만장일치의 박수를 받아온 사람이었으니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디자이너들이 그의 꿈과 야망을 고스란히 욕망하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그가 은퇴를 발표했다. 그것도 디자인에 대한, 스스로의 업적에 대한 지독한 혐오와 함께 말이다. 공식적으로는 ‘스탁과 같이 되는 것을 꿈꾼 적 없다’고 말하면서도 분명 지금까지 살아온 길지도 짧지도 않은 디자이너로서의 한순간엔, 스탁과 관련한 뉴스를 넋 놓고 바라보며 ‘나도 당신처럼…’을 되뇌였던 나를 비롯한 수많은 디자이너에겐 다소 충격적인 뉴스임은 분명하다. 물론 티벳 독립운동이나 물가 폭등과 같은 이슈에 비한다면 그야말로 사치스러운 가십에 불과한 이 짤막한 기사는 다시금 그가 뭔가 다른 이미지 메이킹을 준비하고 있다는 ‘티저 예고편’ 같은 느낌이기도 하다.

솔직히 ‘이제 디자인으로 벌 만큼 벌었고, 할 만큼 했으니 새로운 사건을 터뜨려보자’ 정도로 해석되기도 했다. 비약이 지나친 것일까? 물론 그가 매우 지쳤을 수 있다. 우리와 같은 소소한 디자이너들도 하루에 수만 번씩 ‘디자인 따위’에 대해 회의를 느끼곤 하니까. 게다가 신격화된 그가 디자인을 송두리째 버린다고 선언하는 그 저변에 어떤 심오한 뜻이 담겨 있을지 그야말로 나 같은 사람이 어찌 짐작이나 하겠는가. 물론 수많은 디자이너들은 모종의 배신감 같은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의 꿈을 빌리기 위해 오색찬란한 (그래서 사실상 다른 물건과는 섬세하게 조율하지 않는 이상 어울리기 매우 힘든) 플라스틱 의자를 억지춘향으로 구매했고, 뉴스를 빠짐없이 클리핑하며 박수를 쳤고, 머리통이 뒤틀린 스탁의 책을 탐독하며 의지를 불태웠던 디자이너들은 스스로의 모든 과거를 부정하는 그를 바라보며, ‘사실은 단 한순간도 너를 사랑한 적 없다’라고 뇌까리는 냉혹한 드라마 주인공을 바라보듯 처참한 눈길을 거두기 힘든 것이다.

사실 그의 은퇴와 디자인에 대해 내가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들 무슨 소용 있을까. 그가 박수받아 마땅한 것은 이렇듯 끝없는 관심과 욕망의 대상이었기 때문이 아닐는지. 스물이었을 적 없는 돈을 긁어 모아 구입한 처음이자 마지막 스탁의 작품, 오렌지색 라보엠 체어는 단 한 번도 즐겨 앉은 적이 없었고 이제는 부모님 집에서 화분이 배설하는 오물을 뒤집어쓴 채 베란다로 내리치는 햇살을 반사하고 있다.

필립 스탁 스스로 자신의 모든 기억을 후회할지언정 난 그래도 그가 우리를 꿈꾸게 했던 것들에 대해 진심이 아니었다고 생각하진 않다. 모든 진심은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으니까. 비록 그가 이제는 정치판으로 뛰어들겠노라고 선언한 왕년의 텔레비전 스타처럼 처연해 보일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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