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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리뷰

보고, 읽고, 느끼는 오감의 타이포그래피

2013-10-04


타이포그래피의 가능성을 망라한 <타이포잔치 2013> 이 지난 8월 30일 개막했다. 세계 유일의 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이며, 지난 2011년 이후 문화관광부의 정식 사업으로 인정받은 후 첫 번째로 열린 전시인 만큼 이 전시에 대한 이목은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슬기와민의 최성민 디자이너가 총감독을 맡고, 김영나, 유지원 등 디자이너와 디자인 필자 등이 공동 큐레이터로 참여함으로써 전시 형식이나 방법의 새로움을 기대하기에 충분했다. 실제로 특정 담론이나 주제보다는 총 58팀의 작가와 작업을 보여주는데 충실한 이번 전시는 타이포그래피를 보고, 읽고, 느끼는 다양한 방법을 제시했다.

에디터 | 정은주( ejjung@jungle.co.kr)
자료제공 | 타이포잔치 2013 사무국

우리가 읽는 시와 소설은 작가가 보여주는 언어예술의 결과물이다. 작가들은 언어의 지시성과 의미가 갖고 있는 한계를 넘어 다양한 실험들을 선보인다. 타이포그래피 역시 텍스트를 표현해내는 기능적인 특성에서 벗어나, 이러한 문학적 해석 방법과 유사한 지점을 보여주고 있다.

<타이포잔치 2013> 의 다른 이름인 슈퍼 텍스트는 이렇듯 타이포그래피가 텍스트를 적극적으로 수용, 해석함으로써 일어나는 변화에 대한 이야기다. 먼저 소개되는 ‘언어 예술로서의 타이포그래피’는 언어의 형태를 구현하는 데에서 벗어나 타이포그래피가 그 자체의 의미를 갖고 때로는 하나의 문학예술로 읽히는 작업들을 모았다.

전시장 입구에 자리한 이호 디자이너의 ‘청포도가 잊어가는 계절’은 이육사의 ‘청포도’의 한 구절을 표현한 작품이다. 이 작품을 보면 단순히 시의 한 부분을 타이포그래피로 옮겼다고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먼저, 청포도에 등장하는 의태어 ‘주저리주저리’나 ‘알알이’와 같은 단어에 영감을 받아, 얼핏 청포도와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공업용 파이프와 연결시켜 작업을 완성했다. 파이프의 연결 부분은 단어로, 시의 구절로 전체 시로 공간 안에 펼쳐지면서 새로운 경험을 준다.

카를 나브로의 ‘유령(들)타자기’는 일반적인 언어의 형태인 자모나 언어가 만들어지는 모든 관습적인 형태를 벗어나 때로는 하나의 그림으로, 조각이나 장난감과 같은 놀이로 타이포그래피를 치환시킨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무의미한 행위를 통해 의미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전시장에 놓인 작품은 관람객이 자유롭게 만지고 느낄 수 있다.

더 북 소사이어티의 ‘서점들’은 세계 곳곳에서 활동하는 소규모 독립 서점 열 곳을 초대해, 그들의 추천 책과 인터뷰들을 담은 작품이다. 독립 출판이 시작된 수많은 이유 중에 하나는 기존의 출판 언어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새로운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였다. 이들의 직접 고른 책들은 그래서 하나의 언어이자, 예술로 느껴지기도 한다.

‘독서의 형태’에서는 잘 알려진 텍스트를 새롭게 조형해내는 실험적인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번역은 외국어를 한국어로 변화시키는 것이지만, 이 과정에서 옮긴이의 주관과 해석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 판본이 많다는 것은 작품의 인기와 완역에 대한 끝없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전용완 디자이너는 그만큼 오역의 가능성이 높을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 작업했다. 한국에서 가장 많은 판본을 가진 책 중의 하나인 J.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의 책들 속에서 오역과 옮긴이의 주관적 해석과 임의로 추가한 문장 등을 모아 한 권의 책을 만들었다. 이것은 하나의 해프닝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어쩌면 문학과 언어가 가진 의미의 한계에 대해 정면으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커버, 스토리’라는 장의 이름을 들었을 때 얼핏 우리가 늘 생각하는 표지 디자인을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그 표지 디자인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총서나 시리즈 간행물의 디자인으로 전체적인 맥락과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기도 하다. 피어 퓌어 펙사스의 프란츠 카프카 12권 전집은 한 권의 북 디자인으로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어떤 수수께끼의 상징 같기도 한데, 이것이 모두 모아보면 프란츠 카프카의 서체가 나타난다. 각각의 책이 만나 하나의 전집을 만들고, 작가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과정을 작가의 서체로 구현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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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중력 글쓰기’는 타이포그래피를 지면이 아닌 디지털 미디어와 타 예술과의 협업의 장르로 이끌어낸 작업이다. 젊은 시인과 디자이너 7명이 각각 팀을 이뤄, 시의 언어와 이미지가 타이포그래피와 어우러지는 광경을 담아냈다. 이 작업은 전시 기간 중 서울스퀘어 미디어 캔버스를 무대로 상영하면서, 전시장 공간을 뛰어넘기도 했다. 10월 9일 한글날 전야제에 맞춰 일곱 팀의 작품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행사가 추가로 마련될 예정이다.

이 밖에도 이번 타이포잔치 2013의 작가와 큐레이터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프랑스 실험문학 집단 울리포의 수학적, 체계적 창작 원리를 연구한 ‘잠재문학실험실’과 같은 작업들이 간행물로 발간되었으며, 미술, 디자인 평론가 임근준과 김형진 디자이너의 ‘비평가와 함께 전시 보기’ 등의 프로그램도 많은 관심을 많았다.

한편, 한글날 전날 밤인 10월 8일에는 ‘한글날 전야제’가 개최된다. 앞서 말한 ‘무중력 글쓰기’의 모든 작품을 만날 수 있으며, 한글(혹은 문자)이 생성되기 전의 전달 수단에 대한 상상을 전제로, ‘글 이전, 말 이후’라는 주제로 소리와 시각성을 매체로 한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이 공연은 빔프로젝터나 음향 시스템 등에 의존하지 않은 채 오로지 감각만으로 언어를 느끼는 과정을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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