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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리뷰

너에게 바친다

2009-08-18

오마주의 사전적 정의는 '영화에서 존경의 표시로 다른 작품의 주요 장면이나 대사를 인용하는 것을 이르는 용어'다. 영화에서 시작된 이 아름다운 '헌정'의 방법을, 디자인이라는 그릇에 담아 표현한 사례를 찾아봤다.

기획 | 월간 정글 편집부

종류를 불문하고 술은 몸이 헤퍼서 누구에게나 쉽게 제 몸을 바친다. 한 사발만 마셔도 속이 든든한 막걸리는 농부에게, 붉은 빛깔이 고운 복분자주는 밤이 두려운 남자에게, 콧수염 만들기 기능이 있는 맥주는 치킨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지하 100m 천연 암반수보다 더 맑은 자태를 자랑하는 소주는 일용직노동자부터 사랑이 슬프기만 한 청춘에까지 두루두루 몸을 바친다. 술이 이렇게까지 하는 건, 한 잔 술에 누군가는 위로를, 어떤 이는 진심을 얻기 때문이다. 물론 ‘날씨야, 네가 아무리 더워 봐라. 내가 선풍기 사나, 술 사먹지’*라며 술에게 연서를 띄우는 이들을 위해서도 기꺼이 제 한 몸 내주겠지만.
대개 술은 범인(凡人)들에게 바쳐지지만 어떤 술은 특별한 사람에게 헌정된다. 호주에서 만들어져 한정 소량 생산되고 있는 와인 ‘피터 르만 멘토’가 그렇다. 호주 바로사(Barossa)의 정신적 지주이자 호주 와인메이킹의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불리는 피터 르만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은 헌정 와인인 것. 바로사의 축복받은 자연 조건과 지속적인 기술 혁신으로 거듭난 피터 르만은 바로사 와인 세계화의 선봉에 섰던 인물로 1979년부터 호주에서 가장 존경받는 와인생산자 중의 하나다. 특히 “모든 사람이 두 번째, 세 번째 잔도 첫 잔처럼 즐기길 원한다.”는 그의 철학은 와인업계의 올림픽이라 불리는 국제 와인 및 주류 품평회에서 3번이나 ‘올해의 와인 생산자 및 베스트 호주 와인 생산자’로 선정되게 했다. 또 피터 르만은 양질의 쉬라즈(Shiraz) 와인을 제조할 뿐만 아니라 화이트 와인의 대표주자로 알려져 있다. 섬세하고 드라이한 리슬링(Riesling, 포도 품종 중 하나) 이 유명한데 독일산과는 아주 다른 맛을 창조하여 정상급에 속하는 와인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피터 르만 아트시리즈 에덴밸리 리슬링’은 국제주류품평회 IWSC(International Wine & Spirit Competition)에서 베스트 리슬링 트로피를 5회 수상하면서 전 세계 와인 전문가들의 호평을 받으며 신세계 리슬링의 위상을 높이기도 했다. 누구보다 와인을 사랑했던 피터 르만에게 바쳐지는 와인 상표에 스승을 의미하는 ‘멘토(Mentor)’가 붙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피터 르만의 옆모습이 새겨진 와인 병을 말끄러미 바라보다 영화 <카사블랑카> 의 험프리 보가트처럼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라고 속삭이며 그윽한 눈길 보내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얼큰하게 취해 들어온 남편이 속삭인다. “너의 포동포동한 뱃살에 건배. 딸꾹.” 맞다.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 그것도 아주 많이.

에디터 정윤희

*아동문학가이자 괴짜 스님으로 불리는 소야 스님의 시로 술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원문은 ‘날씨야, 네가 아무리 추워 봐라. 내가 옷 사 입나. 술 사먹지’ 이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는 도시 서울에서조차, 그 이별은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청계고가나 동대문운동장과 같이 사전 이별 통보도 업섰다. 부랴부랴 택시를 잡고 떠나던 애인처럼 그렇게 숭례문은 사라졌다. 갑작스러운 이별 때문이었을까. 건물이 불에 타고 무너지고 사라지는 과정을 지켜보며, 서울 시민들은 깊은 숨을 몰아 쉬었다. 눈물 바람인 사람도 더러 있었다. 위정자의 계획에 따른 ‘철거’에는 다양한 태도들이 존재해왔지만, 한 사람의 분명한 잘못에 의해 사라진 건물에 대해서는 같은 마음으로 분개하는 듯 했다. 숭례문 전소에는 재개발이나 땅값과 같은 불순물이 끼어들지 않기 때문이다. 당파와 이념의 차이도 멀리 비껴간다. 그곳은 아무런 이해관계에 얽혀있지 않다. 그래서 누구의 관심에서도 벗어나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에디터에게도 숭례문은 눈 앞에 있으나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버스를 타고 바로 앞으로 지나치길 수십 번, 단 한 차례로 더 가까이 들여다 보기 위해 고개를 뺀 적이 없었다. 현판과 주련 등 숭례문 전소로 인해 재가 된 것들이 ‘나의 문화유산’인 적도 없었다.

공공스튜디오(00studio)가 만든 ‘The Gate In My Heart’는, 그런 의미에서 후회와 미안함과 애도의 마음을 담아 숭례문에 바치는 헌사로 다가온다. 특히 무너져 내린 숭례문 사진과 오버랩 되도록 세팅된 제품 패키지는, ‘그곳에 그것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로 마음을 아프게 찌른다. 전소되기 전의 외형으로 복원된 이 ‘숭례문 브로치’는 그러니까 일종의 ‘근조 리본’인 셈이다. 600살 넘은 어른의 죽음을 기리는 청년들의 마음이며, 살아 남은 자의 고개 숙임이다. 공공스튜디오는 “숱한 세월을 견뎌 내며 빌딩 숲과 8차선 도로 속에 작은 섬처럼 소외되어 있던 숭례문은 자신의 몸이 불태워져 소멸됨으로 한국인들의 마음 속에 깊은 그을음으로 남았다. 그 그을음의 흔적이 숭례문을 비롯해 잊혀져 가는 여러 문화재에 대한 애정으로 승화되기를 염원하며 이 프로젝트를 기획하였다”고 말한다. 최근 숭례문은 복원 작업에 한창이다. ‘용산 참사’가 발생한지 반년이 훌쩍 지났다. 건물이 불타는 한가운데 검게 그을려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숭례문처럼 다시 복원될 수도 없다. 외면 받은 죽음은, 근조 리본을 달고 ‘애도’하며 멀리 떠나 보낼 수도 없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 에는 이런 대사가 등장한다. “잘 들어둬. 사람들은 누구나 실수를 해. 하지만 죄를 지었으면 속죄해야 하는 거야. 속죄, 알아? 어토운먼트(atonement). 그래 어토운먼트 해야 하는 거야.”

에디터 이상현

[경악 또는 환호]
루이비통의 그래피티 라인을 접했을 때 대부분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전자의 경우 ‘클래식의 대명사 루이비통에 누가 이 따위 장난(?)을 친 거야!’, 후자의 경우 ‘완벽해! 역시 마크 제이콥스 답군.’이라는 극과 극의 의견. 에디터의 경우 ‘가방이 비싸다면 저 쫄바지라도 가지고 싶어!’라며 멈출 수 없는 소유의 욕망에 방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던 기억이 있지만 에디터의 쌍둥이 자매라 불리 우는 절친의 경우 ‘아휴, 아무리 그래도 비슷하게는 만들지, 저건 너무 가짜 같잖아.’ 라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명성만큼이나 세계에서 모조품, 일명 ‘짝퉁’이 가장 많은 브랜드이기도 한 루이비통은 오랜 세월 소수의 귀족을 대상으로 한 로열 브랜드였다. 이런 보수적 이미지가 강했던 루이비통은 수석 디자이너로 마크 제이콥스를 영입한 뒤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이는 소수만이 누릴 수 있었던 특권에서 대중과 공유하는 명품, 즉 매스티지(Masstige)로의 변화였다. 마크 제이콥스는 평소에 흠모하던 당대 최고의 현대미술 거장이었던 스테판 스프라우스와의 콜라보레이션(collaboration)으로 1997년 ‘그래피티(graffiti) 라인’을 탄생시켰다. 두 거장의 만남은 클래식과 펑크의 만남이었으며, 예술과 상업의 만남, 트렌드와 고전의 만남이었다. 이 ‘그래피티 라인’은 리미티드 에디션이라는 희소성의 가치를 등에 업고 전세계 컬트 수집가들의 잇(It) 아이템으로 불티나게 팔렸다. 하지만 스테판 스프라우스가 폐암으로 사망하게 되고 2009년 마크 제이콥스의 손에서 ‘그래피티 라인’은 새롭게 재탄생 된다. 스테판 스프라우스와 사적으로도 친분이 두터웠던 마크 제이콥스는 ‘스테판 스프라우스’의 이름을 컬렉션 명에 그대로 사용하여 그의 예술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 스테판 스프라우스 컬렉션은 다시 두 가지 라인으로 나뉘는데 기존의 그래피티 라인을 업그레이드 한 ‘그래피티 라인’과 장미를 모티브로 한 ‘로즈(Rose) 라인’이다. 눈이 아플 만큼 화려해진 컬러감과 디자인의 그래피티 라인과 모노그램 위에 화려하게 내려 앉은 한 송이 장미로 스테판 스프라우스에 대한 오마주를 표현한 것이다. 명품을 대표하는 하나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은 모노그램 위에 도전과 반항을 상징하는 그래피티의 조화. 이전에 없었던 파격적이고 혁신적인 디자인의 이 헌정컬렉션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위대한 예술가의 정신이 스며든 듯 일탈적이고 자유분방하다. 이후 많은 아티스트와 브랜드의 협업이 있었고, 지금도 꾸준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루이비통의 스테판 스프라우스 컬렉션은 아직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최고의 콜라보레이션이라고 감히 생각해 본다.

에디터 심민영

교회를 다니는 분이셨다. 영화를 보다가, 배우의 장장한 근육과 코 아래 횟빛 수염을 예찬하는 에디터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그분 읊조리셨다. “너 육욕을 조심해야겠어.”
치욕의 발단은 수염이었다. 수염 앞에서는 애착과 고착과 집착의 여인이 되는 것이다. 손으로 문대도 모근이 만져지지 않도록 다 깎거나, 턱 선을 타고 흐르는 수염- 거울을 보고 그 수염을 다듬는 배우의 옆선이 “보시기에 참 좋았다.”

면도는 남자의 아침과 같다. 약속이 있거나, 기다리던 사람을 만나는 날이면 면도의 시간은 길어진다. 물론 면도가 잘되고, 못돼 고로 하루를 점치기도 한(단)다. 옛날식 면도는 달랐다. 뜨거운 물에 적신 수건으로 턱과 볼, 입가를 데워 모공을 여는 시간, 전통적인 면도는 시간이 필요했다. 먹을 갈 듯이, 그릇에 비누를 넣고, 한 방향으로 브러쉬를 돌리다 보면 거품이 일기 시작한다. 그리고 칼날을 턱에 대는 순간부터, 고요해진다. 독일의 수제 면도기 제작업체 뮬러사가 만든 전통 면도기 시리즈를 만나니, 우선 반가웠다. 전통 방식 그대로 오소리 털을 보아 만든 쉐이빙 브러쉬는 부드러우면서 탄력 있고, 서예 붓과 같이, 털을 그러잡은 올리브나무 붓대는 원목이 주는 묵직함이 남다르다. 연마욕 가죽 숯돌과 일자면도기, 쉐이빙 볼까지 1800년대 면도의 풍경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뮬러가 말하는 신사들의 아침풍경은, 쉐이빙 비누거품을 턱 아래까지 칠하면서 시작한다. 턱부터 코, 구레나룻, 목 순으로 날을 움직인다. 45도보다 약간 더 눕혀서 밀어 올리면, 솜털까지 사라진다. 말 한 마디, 쉼 호흡도 허락치 않는 것이, 얼핏 의식과도 같다.
유럽은 이미 1800년대식 면도기에 빠져있다. 이름도 참 잘 지었다. Dad’s Old Time Razor- 아버지의 옛날 면도기. 뮬러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1800년대 남성을 위한 오마주’라고 말했다. 옳다, 남자들의 호시절은 그 때였다. 성난 황소와 같던 남자들이 서슬 퍼런 칼날을 턱 아래 대고, 천천히 미는 시간, 그 여유와 호기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 배우, 제이슨 스타뎀이 ‘아직까지’ 먹히는 이유도 같지 않을까 싶다.

에디터 이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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