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9-29
그리스의 올림푸스에서는 12신이 연애하고 복수하고 인간을 시험하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일본의 ‘올림푸스’는 상식을 뛰어넘는 카메라를 만들기 위해 골머리를 앓아왔다. 그 때문인지 1936년 첫 카메라를 내놓은 후로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올림푸스가 만들어 온 카메라에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자주 등장한다. 통념을 부수고 상식을 뛰어넘을 때 간신히 얻을 수 있는 ‘최초’ 뒤에는 지난달 별세한 올림푸스 카메라의 설계자이자 디자이너 마이타니 요시히사(Yoshihisa Maitani)의 ‘쉬운 사진’, ‘즐기는 사진’이라는 철학이 자리하고 있었다. 올림푸스가 만들어 온 최초의 역사들을 따라가보았다.
에디터 | 정윤희(yhjung@jungle.co.kr), 이미지공 | 올림푸스한국
1936’ Semi-Olympus I
올림푸스가 선보인 최초의 카메라. 현미경 및 렌즈 개발회사였던 올림푸스가 자사의 렌즈를 사용하여 제작했다. 출시 당시 큰 화제가 되며 매우 귀한 제품으로 각광받았다. 가격은 당시 105엔으로 일본의 월 평균 소득이 75엔이었음을 감안하면 매우 비싼 가격이었다. 카메라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빈티지한 외양을 가진 카메라로 비춰질 수 있겠으나 독특한 형태의 뷰파인더라든가 한 손으로도 들 수 있는 크기 등을 감안하면 올림푸스로서는 회심의 첫 작품이다.
1948’ Olympus 35 I
일본 최초의 35mm 카메라이다. 손에 들고 다닐 수 있는 카메라의 시초인 셈. 휴대가 편리하면서도 가벼운 카메라로 큰 인기를 얻었으며 당시엔 ‘소매치기 카메라(pick-pocket camera)’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특히 검은색 가죽과 광택 없는 스틸 질감의 조화는 지금의 카메라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세련되다.
1955’ Olympus Wide
올림푸스에서 세계 최초로 선보인 와이드 앵글(Wide Angle)용 35mm 카메라. 그 이전에도 와이드 앵글 기능을 갖춘 카메라는 있었으나 렌즈 교환식으로서는 초고가 카메라에서만 가능했던 기능이었다. 35mm 카메라에 처음으로 도입된 와이드 앵글의 ‘올림푸스 와이드’는 사진의 즐거움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간의 카메라에 필름레버, 셔터단추 등이 울룩불룩 솟아있던 반면 올림푸스 와이드부터는 이런 조작 단추들이 간소화되기 시작한다. 이는 카메라의 외관을 한층 단순하게 만들어 주었다.
1959’ Olympus Pen
올림푸스가 최초로 선보인 하프 프레임(Half Frame) 카메라이다. 22살의 나이로 입사한 마이타니 요시히사가 24살에 개발한 카메라이기도 하다. “만족할 수 있는 사진 촬영과 초보자도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콤팩트한 크기. 그리고 아주 저렴한 카메라”라는 명제 아래 만들어졌다. 당시 올림푸스의 히트작이었던 ‘와이드’와 ‘35S’가 월 1천대 정도의 판매를 기록했는데 펜은 월 5천대를 생산하면서도 내놓기가 무섭게 매진되었다고. 이에 올림푸스는 초보자와 전문가를 위한 서브 카메라, 그리고 여성까지 각각 타깃에 맞는 카메라를 따로 설계하며 펜을 6종이나 내놓을 계획을 세우게 된다. 남성만이 카메라로 사진을 찍던 시절, 카메라를 사기 위해 1년치 월급을 모아야 했던 시절, 서브 카메라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이었으니 말 그대로 상식의 벽을 깨야 했던 시도였지만 펜 시리즈는 올림푸스 카메라 역사 상 가장 큰 인기를 얻은 모델이며 아직까지도 매니아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1961’ Olympus Pen EE
펜이 대성공을 거두었음에도 ‘펜 EE’가 출시되기까지 내부의 반대는 거세기만 했다. 매뉴얼 기능은 물론 눈금조차 없어 기술적으로 후퇴한 듯한 제품이었기 때문. 마이타니의 노력 끝에 2.7%의 여성 사용자를 목표로 한 펜 EE는 결국 발매되었고 초보자와 여성의 폭발적인 신규 시장이 창출되기에 이른다. 여성들은 작고 가벼운 펜 EE를 구입해 아기 사진을 찍어주고, 소풍을 갈 때마다 휴대하기 시작했다. 엄청난 판매량에 올림푸스는 부품을 구할 수 없어 발을 동동 구를 정도였다고. 오리지널 펜 시리즈도 월 5천대를 생산하는 수준이었지만 펜 EE는 그 10배인 월 7만대를 생산해도 수요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오리지널 펜을 이어받아 심플한 디자인이다. 상판에 양각으로 기종을 새겨 넣고 뷰파인더 옆에 제조사의 이름을 넣었다.
1962’ Olympus Pen EES
세계 최초로 프로그램 EE셔터를 탑재한 카메라 ‘펜 EES’는 1962년에 발매됐다. 셔터 속도는 1/30초와 1/250초이며 밝기에 따라 셔터 속도가 자동적으로 바뀌어 적정 노출의 범위가 넓어졌다. 검은색으로 대변되는 카메라 디자인이 펜 EES의 등장으로 한결 산뜻해졌다. 격자 무늬를 넣은 연한 카키색의 가죽과 무광택 스틸이 한층 여성스러운 느낌을 준다. 뷰파인더 오른쪽에 부끄러운 듯 새겨진 빨간색 ‘S’는 멋쟁이 여자가 정성스럽게 찍어 놓은 ‘애교점’ 같기도 하다.
Olympus Pen D
같은 해에 출시된 ‘펜 D’는 고급스러운 펜을 지향한다. 콤팩트한 보디 안에 조리개 개방값이 1.9인 고성능 대구경 렌즈, 고속1/500초 셔터 등을 담은 ‘프로 사양의 펜’인 것이다. 요즘의 프로페셔널 카메라와 비교했을 때 외관만으로는 프로페셔널함을 찾기 어렵지만 다양한 기능을 갖추고 있음에도 과시하지 않는 디자인 덕분에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1963’ Olympus Pen F
세계 최초로 선보인 렌즈 교환식 하프 프레임 SLR카메라. 앞선 기술의 결정체인 로터리 티타늄 셔터(Rotary Titanium Shutter)를 탑재하여 빠른 스피드와 강한 내구성을 가진 카메라로 큰 호평을 받았다. 지금까지의 펜 시리즈와 달리 렌즈가 정가운데에서 한쪽으로 밀려나 있고 남는 공간에는 셀프타이머가 자리잡았다. 유려한 곡선이 한층 화려하게 느껴지는 ‘F’로고가 클래식한 아름다움을 더한다.
1968’ Olympus Pen EE-2
렌즈를 28mm F3.5로 해, 고정 초점으로 만들어진 카메라. 프레임 카운터가 자동화된 것이 특징이다. 디자인은 펜 EES의 디자인을 이어받고 있다.
lympus TRIP 35
펜 EES를 기본으로 한 소형 카메라. 짧은 여행에 부담 없이 가지고 갈 수 있는 카메라라는 의미로 ‘여행(trip)’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고장이 적고 저렴한 가격 덕분에 생산 이후 20년간 시리즈 생산 대수 1,000만대를 돌파한 스테디 셀러 기종이다. 펜 EES의 뒤를 이은 기종이기 때문에 디자인 역시 큰 차이가 없으나 렌즈와 함께 보디의 중심에 놓여지던 로고와 뷰파인더의 바탕 부분이 분리된 것이 특징. 그러나 단순함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만큼은 여전하다.
1973’ OM-1
마이타니는 펜 시리즈에서 연마된 초소형, 경량화 기술로 SLR급 카메라 ‘OM-1’를 개발한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작고 가벼운 기종으로 무게가 660g 밖에 되지 않았다. 녹슬림 방지와 열차단 장치 등이 부착되어 획기적이었던 기술이 집약된 카메라다. 이로써 올림푸스는 세계적인 카메라 회사로 입지를 굳혔며 마이타니가 존경해마지 않던 라이카와 독일 카메라들까지도 올림푸스의 뒤를 따라 초소형, 초경량 설계에 뛰어들기 시작한다. 디자인에 있어서는 그간의 카메라들이 그저 ‘네모난’ 사진기에 불과했다면 OM-1은 삼각뿔이 더해져 강한 인상을 준다.
1979’ XA
배리어 식 렌즈 커버를 채용해 케이스리스(case-less)를 실현한 캡슐 카메라 ‘XA’는 1979년 발매됐다. 높은 휴대성과 속사성에 내장 거리계, 조임 우선 AE 등 다채로운 기능이 가득한 콤팩트 카메라다. 보디와 조화를 이루는 디자인의 외부부착식 전용 스트로보가 함께 출시됐다. 무엇보다 카메라로서는 처음으로 플라스틱 소재를 사용함으로써 플라스틱 성형 기술의 향상과 확립 계기를 만들었다. 특히 사용하지 않을 때 렌즈를 보호할 수 있는 배리어식 렌즈 커버는 그 자체만으로도 획기적인 디자인으로 주목받았다. 마이타니는 초경량, 고성능의 XA를 설계함으로써 훗날 1,000만대 이상을 판매하게 된 ‘뮤 시리즈’의 기본 철학을 완성한다.
2003’ E1
E1은 바디, 렌즈, 플래시 등 시스템의 전부를 세계에서 처음으로 디지털카메라 전용으로 설계했다. 프로 유저가 필요로 하는 고화질, 고기동성, 고신뢰성을 실현하여 ‘FourThirds System’을 완성한 렌즈 교환식 디지털 SLR 카메라다. 보디에는 가벼우면서 견고한 마그네슘 합금을 채용하고 방진 등 프로 유저의 가혹한 사용에 견딜 수 있는 기능을 탑재하면서도 660g의 경량화를 실현한 것이 특징. 보다 프로페셔널한 작업을 가능하게 한 기종이다. 70년대 OM-1의 삼각뿔을 그대로 가져온 외관에 올 블랙 보디로 세련된 모습이다.
2006’ E330
세계 최초로 디지털 SLR에 위로 90도, 아래로 45도까지 움직일 수 있는 가변식 LCD를 채용해 풀타임 라이브 뷰를 제공하는 카메라. DSLR의 구조상 LCD 모니터를 구도 설정에 사용하기 어렵다는 통념을 뒤집었다. E 시리즈에서 공통적으로 보여지는 삼각뿔 형태가 없고 예전의 SLR 카메라를 연상시키는 네모난 모양이어서 다른 기종에 비해 아담해 보인다.
2008’ E30
다양하고 창의적인 사진을 가능하게 하는 아트필터를 탑재한 것이 특징인 E30은 사용자들에게 보다 예술적이고 창의적인 촬영 기회를 제공한다. 마이타니의 철학처럼 촬영을 즐길 수 있도록 ‘소프트 포커스’, ‘팝아트’, ‘거친 흑백필름’, ‘토이 카메라’ 등의 여섯 가지 효과를 외부 모드 다이얼로 간단히 설정할 수 있도록 했다. E 시리즈의 디자인을 계승하며 외부 다이얼 하단에 푸른색의 가는 띠를 둘러 포인트를 주어 고급스러움을 더했다.
2009’ Olympus Pen EP-1
50년의 역사를 지나 디지털로 새롭게 태어난 EP-1은 렌즈 교환식 카메라임에도 감각적인 디자인을 자랑한다. 오리지널 펜처럼 작고 가벼워 어디서나 촬영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진 EP-1은 DSLR급 카메라를 능가하는 기능으로 사용자를 유혹한다. 디자인에 방해가 되는 것이라면 어떤 것도 용서하지 않을 것처럼 깨끗한 보디에 검은색에서 벗어난 화이트 컬러로 오리지널 펜과는 또 다른 심플한 매력을 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