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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리뷰

남의 집 대문에서 ‘리디자인’ 읽기

2012-02-03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라 불리는 중계동 백사(104)마을을 돌아다니다가 어느 집 대문 앞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처음에는 덧발라진 파란색에 눈길이 갔다가 그 옆의 손잡이를 보게 되었다. 방문에서 쓰는 손잡이였다. 어느 집의 쓰다버린 문짝이 다시 어느 집의 대문이 되어 있었다. 그 묘한 앙상블에 그곳에서 한참동안 셔터를 눌러댔다. 버려지지 않고 다시 쓰임을 받은 대문이 당당해보였다. 마치 ‘내 이름은 대문’이라고 선언하는 것만 같았다.

글, 사진 | 안은희 리코플러스 대표(akkanee@empas.com)
에디터 | 길영화(yhkil@jungle.co.kr)


‘나는’이라는 선언, ‘너는’이라는 명명

저 대문이 당당해보였던 것은 ‘나는 대문이다’라는 선언 때문이었다. 자신에게는 아직 충분한 쓰임이 남아 있다는 자존감과 그 쓰임의 잠재력을 새롭게 보아준 이에 대한 감사함이 그 선언 안에 배어 있었다.

철학자 마르틴 부버(Martin Buber)는 「나와 너」에서 ‘나-그것’의 관계와 ‘나-너’의 관계를 구분한다. 부버는 ‘그것’의 3인칭에서 ‘너’의 2인칭이 될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관계’가 시작된다고 하였다. ‘나와 너’의 관계는 서로를 알아볼 때 시작된다. 어린왕자와 장미꽃의 관계, 백아와 종자기의 관계, 모든 연인들의 관계가 서로를 알아볼 때 시작된다. 3인칭의 버려진 어느 문짝이 대문의 쓰임으로 부름 받고, 지나가던 여행자는 그 대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자 3인칭의 남의 집 대문은 2인칭의 특별한 대문이 되었다. ‘너는 대문이구나’라는 끄덕임, 그 작은 알아봄으로부터 대문과의 관계지음, 즉 소통은 시작된다.


‘이것’과 ‘저것’의 관계지음의 시작

요즘은 여기저기서 온통 ‘소통’에 대해 이야기한다. SNS 세상도, 정치권도, 디자인계도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소통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소통이란 무엇일까. 남의 집 대문 사진 한 장을 보며 생각해본다.

다산 정약용은 「어사재기(於斯齋記)」에서 ‘이것과 저것’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내게 없는 물건을 바라보고 가리키며 ‘저것’이라 한다. 내게 있는 것은 깨달아 굽어보며 ‘이것’이라 한다. ‘이것’은 내가 내 몸에 이미 지닌 것이다. 하지만 보통 내가 지닌 것은 내 성에 차지 않는다. 사람의 뜻은 성에 찰 만한 것만 사모하는지라 건너다보며 가리켜 ‘저것’이라고만 한다.”1) 내 성에 차지 않는 것을 넘어선 것에 대한 건너다봄, 저것을 통해 이것을 알아가는 것, 아마도 정약용의 소통은 그런 의미일 것이다. 언제나 소통은 일방향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저것에만 미혹되어 이것이 가진 충분함을 잊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는 이것만이 가득하여 저것을 못보고 사는 것은 아닌지, 이처럼 소통은 쌍방향에서 ‘나’와 ‘세계’를 살펴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1) 정민, 「다산어록청상」, 푸르메, 2011, p.16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SNS 세상에서 사람들은 많은 이야기를 한다. 누군가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기를 기다린다. ‘리트윗(RT)’을, ‘좋아요’를, ‘댓글’을 달아주길 기다린다. 오프라인에서 충족되지 못한 소통을 온라인에서나마 꿈꾼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주길, 불러만 주면 내 존재의 외로움을 달래줄 소통이 시작될 것만 같은데, 그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 정작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러줘도 생각보다 관계의 만족감은 크지 않다. SNS의 바다 속을 헤매며 무수한 소통을 만끽하다가도, 돌아서면 외롭다. 그 이유는 왜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들의 부름이 내 자신의 ‘존재함’을 일깨우는 부름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의 충분함을 확인시키는 부름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저것’과의 관계지음을 제대로 시작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존재함’의 감각을 일깨우는 관계지음의 리디자인

현대사회에서 디자인과 인간의 생활환경과의 관계는 대단히 긴밀하고 복잡하게 얽혀있다. ‘디자인’이라는 단어는 여기저기서 다양한 방식으로 소비되고 있다. 디자인이 많아질수록 오히려 디자인이 무엇인지는 점차 모호해지고 있다. 인간과 사물, 인간과 환경을 이어주는 ‘관계의 조절장치’와 같은 디자인의 본래적 의미를 ‘다시’ 짚어볼 필요가 생기고 있다. 그래서 ‘리디자인(redesign)’이다. 리디자인은 3인칭의 무관한 사물을 2인칭의 관계적 사물로 다시 태어나게 만드는 작업이다. 또한 존재와 사물을 소통시켜 정서적 가치와 밀도를 사물에게 부여하는 일이다. 그래서 리디자인은 나의 존재함과 너의 존재함을 동시에 일깨우고 관계를 맺도록 도와주는 작업이다.

독일 출신의 디자이너 실케 와로(Silke Wawro)는 사물과의 교감에 중심을 두며 상품과 사용자 간의 소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2007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에서 소개된 그녀의 ‘폴크스웨어 테이블’은 버려진 테이블과 의자의 조각들이 모여 다시 쓰임을 부여받은 테이블이다. ‘너는 테이블이다’라는 부름에 쓰레기장으로 향하던 조각들이 다시 우리 곁에 머물게 된다. 테이블이었던 조각들은 예전과는 다른 테이블이 되고, 의자의 등받이였던 조각들은 이제 테이블로서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얻는다. 사물의 쓰임적 가치를 다시 발견하여 우리 일상의 정서적 가치까지 이야기한다. 앞서 대문에서처럼, 그리고 이 테이블처럼, 사물들을 새로운 관계의 장으로 이끌어내는 작업, 그것이 바로 디자인을 다시 보는 디자인, 리디자인의 정신이다.

존재의 존재함을 알아봐주는 디자인, 이것과 저것의 소통을 일으키는 디자인, 3인칭을 2인칭으로 바꾸는 디자인, 이렇듯 리디자인은 관계지음을 디자인한다. 소비되고 버려지는 사물들, 쓸모없어 눈여겨보지 않던 사물들, 디자인에 치이고 소외된 그러한 하찮은 사물들에게서 쓰임을 다시 발견하고 새로운 소통의 길을 열어주는, 그런 작업은 아름답다. 그래서 남의 집 파란 대문의 이야기에 발길이 멈출 수밖에 없었다.



*‘동네’를 돌아다니다보면, 우리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는 ‘색’이 있었다. 색으로 빛나고 있는 그 장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들리기 시작한다. 허름하고 좁은 골목, 남의 집 대문과 같은 장면들은 우리들의 눈과 귀를 머물게 한다. 우리의 눈에 의해 포착되어서 어느새 우리의 마음의 의미로 포획되어 버린 장소 이야기, color of village는 그런 장소와 장면들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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