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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리뷰

맨인블랙 VS 워먼인블랙 part 1>맨인블랙

2014-02-20


우리가 흔히 색상의 기본색으로 알고 있는 삼원색은 빨강, 노랑, 파랑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원색을 모두 합치면 검은색(사실 완벽한 검은색은 아니고 진한 구정물색 같은 거무튀튀한 색이 된다)이 된다. '검은색' 또는 '블랙'이라고 표현되는 이 색은 모든 색의 기본인 삼원색의 통합이지만 재미있게도 한편으로는 색이 없다는 의미의 무채색이라 불리 운다. 이 이중적인 매력을 가진 블랙의 역사적 등장과 패션에서의 블랙이 가진 의미와 상징에 대해 살펴보자.

글 ㅣ 윤예진 패션디자이너
에디터 ㅣ 김미주 (mjkim@jungle.co.kr)


패션을 이야기할 때에 빠질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색감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모든 색은 상징성이나 각각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검은색, 또는 블랙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우리는 어떻게 느끼는가. 검은색이 가진 흔한 이미지는 어둠, 밤, 죽음, 질병, 불행 등의 대부분 부정적인 것들이다. 영문 사전에서 'Black'을 찾아보면 검은, 어두운, 캄캄한, 시커먼, 증오에 찬, 화가 난, 암담한, 암울한, 사악한, 나쁜 등의 의미들이 검색된다. 한글의 검은색의 표현 역시 검은 마수, 검은 그늘, 검은 속셈, 검은 그림자 등 하나같이 말 그대로 검기만 하다. 그러나 한번 검은색을 물건이나 사물에 대입해 상상해보자. 예를 들면 잘빠진 검은 승용차, 반짝이는 검은 구두, 윤기 나는 검은 벨벳 드레스 등 말이다. 어떤가, 작은 상상이지만 금세 검은색의 이미지가 조금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가?

블랙이 패션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시기는 거슬러 올라 15세기 부르고뉴(Bourgogne) 지방의 예술에서 시작된다. 부르고뉴는 프랑스 동쪽의 오래된 주(州)로 14세기경부터 예술이 번성했는데, 당시 표현된 역사적 그림이나 초상화, 그들의 장례문화에 블랙이 사용되었다. 이후 16세기 엄격한 카톨릭과 청교도적인 금욕주의가 강한 나라였던 스페인은 브르고뉴의 영향과 함께 일종의 그들의 지방색이었던 블랙을 엄격함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받아들였고, 스페인의 근엄한 왕권과 연결되어 당대 블랙은 곧 권력(나아가 스페인의 국력)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스페인의 블랙은 이후 아이러니하게도 스페인의 프로테스탄트(신교도)를 반대하던 영국과 네덜란드까지 확산되었는데, 그 이유는 결국 종교 전쟁과 갈등에 있어 유럽의 국가들이 전체적으로 금욕주의를 받아들이는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세기를 거치며 블랙은 사제들의 성직복, 또는 제복뿐만이 아닌 지위를 갖고 학식 있는 남성들의 일반적인 의복의 색으로 자리를 잡았고, 18세기 중•후반 프랑스 혁명이라는 사회적 변동을 치르며 블랙은 이전과는 다른 소박하고 서민적인 것을 상징하는 색이 되었다. 또한 당시 사회 운동의 중심에 있던 낭만주의(황폐함, 고독함, 유약함 등의 블랙)와 함께 대중에게도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낭만적인 경향이 지나간 19세기 중•후반에도 블랙은 사라지지 않았는데, 그 원인은 결국 블랙이 서민이 아닌 귀족들에게 선택됐기 때문이다.

19세기 초, 블랙의 유행은 당대 멋쟁이로 명성을 날린 보 브럼멜(Beau Brummell)을 선두로 댄디(Dandy, 멋쟁이 신사)들이 이끌어 나갔다. 브럼멜을 현대식으로 묘사하자면 최고의 패셔니스타이자 당시 유일무이한 스타일리스트였다. 그는 귀족은 아니었지만, 그의 맵시 있는 옷차림과 우아해 보이는 행동들은 귀족들을 사로잡았고, 브럼멜은 당대 남성 패션계에서의 가장 핫(Hot!)한 스타일의 소유자였다. 복숭아뼈가 드러나는 밀착되는 검은색 바지와 앞 도련은 잘려나간 형태의 몸에 꼭 붙는 검은 테일코트(tail coat, 현대 연미복과 흡사한 형태의 겉옷), 목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고 높게 모양을 잡아 둘러 묶은 새하얀 크라바트(cravate, 현대 넥타이의 유래)와 셔츠는 그의 대표적인 차림으로, 그는 진정한 멋쟁이의 의복이란 ‘어느 정도 몸이 불편해야 하며 그래야만 행동에 우아함이 베어나올 수 있다’ 하였다 한다.

댄디들이 구축한 블랙 패션은 멋 부리는 것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며 우아하고 나긋나긋한 댄디 특유의 성(性)적 모호함과 함께 제3의 정체성을 만들기에 이른다. 블랙을 패션에서 주도하고는 있는 것은 남성들이었지만 그 안에는 여성적, 혹은 유약함, 가냘픔 등 일반적으로 남성적인 것이라 생각되는 것과는 반대되는 이미지들이 섞이며 블랙은 양면적인 경향을 상징하게 되었다. 이런 경향은 당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기도 하였는데, 조금 쉽게 사례를 하나 들어 설명하자면, 19세기를 대표하는 또 한 명의 댄디이자, 당대 명성을 날린 소설가인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는 동성애에 관한 금지법을 어겨 체포되었고 2년 동안 노동 금지령을 받았으며, 이 사건 때문에 영국에서 영원히 추방되어 평생 돌아가지 못한 채 1900년 프랑스 파리에서 뇌수막염에 걸려 사망하게 된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쯤 되자 댄디뿐만이 아닌 대부분의 남성들이 검은색을 선호하게 되었으며, 남성의 검은 옷차림은 사회에서 일을 하고 있는 사회인, 즉 지금으로 말하자면 학자나 교육자, 정치인을 비롯해 직장인, 사업가, 노동자 등 집을 나가 돈을 버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모든 남성, 모든 아버지들이 착용하는 블랙이 된다. 이때 남성들에게 블랙 패션이란 입지 않으면 무리에 끼지 못하는, 블랙을 입어야만 사회인임을 인정받는 암암리의 코드와 비슷한 것으로 여겨졌으며 이 광경은 마치 남성들로만 이루어진 거대한 장례식장을 방불케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때문에 블랙은 남성, 혹은 아버지들이 지닌 부재(不在)의 상징과 함께 남성의 능력과 권력을 의미했고, 특히 19세기 남성의 블랙 패션의 유행은 전문직 남성들을 부상시켰다. 당시 전문직 남성들은 중세의 성직자만큼이나 권세를 가졌었는데, 이런 프로페셔널한 모습의 블랙 패션은 신뢰감과 존경을 불러일으켰고, 아직 미숙한 자에게는 전문성을 강요하는 효과를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의 돌입과 함께 부(富)로 인한 이른바 신귀족계급이 생겨나며 너도나도 모두 입는 블랙 패션은 그 의미와 가치가 쇠퇴하기 시작한다.

20세기로 넘어가는 세기말, 블랙은 여전히 남성의 패션에서 공식적인 것으로 여겨졌으나 이전에 비해서는 훨씬 가볍고 유연한 이미지를 띠게 되었다. 그러다 1920~30년대에 들어서는 블랙 패션의 남성 이미지는 오히려 불길하고 수상하고 사회에 어울리지 못하는 남성으로 비유되기 시작했다. 이유인즉, 너도나도 모두 일괄적으로 입어오던 블랙은 정체성을 상실하고 개성이 없이 다 똑같아 보이는 존재로 인식되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영화 '맨인블랙(Men in Black, 1997, 2002, 2012)'시리즈를 한번 기억해보자. 거기서 주인공들의 블랙 양복은 특별한 전문성 혹은 멋스러움이나 부유함 등을 보여주지 않는다(물론 범법행위를 한 외계인을 체포하는 전문직에, 윌 스미스의 몸매가 맵시 있긴 하지만). 그들이 입은 블랙은 단순한 유니폼이다. 모두 정해진 유니폼을 입고 출동하며 주어진 일을 할 뿐이다. 여기서 그 유니폼이 블랙 양복이라는 것은 이상할 것도 없다.

21세기 현재, 이제 블랙 패션은 남성들에게 더 이상 매혹적이지 않다. 물론 공식석상이나 예복 및 장례의복 등의 여전히 예를 갖추어야 하는 자리에서는 필요하다. 현대의 남성 비지니스 슈트(business suit, 비즈니스맨의 복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신사복의 총칭)는 짙은 색의 무난한 것이 사용되어 다크 슈트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정말 새카만 블랙 정장을 하는 경우는 드물며, 여기서 다크하다는 색상은 주로 진한 회색, 진한 감색이나 갈색 계열이 많다.
게다가 근 십여 년 전부터는 남성복에서도 컬러풀한 패션 스타일이 강조되면서 밝은 느낌의 비즈니스 슈트 디자인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2013년 남성복 컬렉션에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명품브랜드들 역시 하나같이 화사하고 싱그러운 느낌의 남성 슈트들을 선보였다.

21세기 사회는 자신의 전문성을 강조하고 권력에 으스대며, 부의 과시를 위해 어깨에 힘을 주는 딱딱하고 시커먼 남성들을 원하지 않는다. 꽃미남, 꽃중년이 인기를 얻고 육아를 돕는 남성상이 사랑 받는 사회가 되었다. 그리고 그런 남성이 옷까지 잘 입었다면 그 남성은 그 자체로 이미 힘을 가진다.

패션은 예나 지금이나 권력과 땔 수 없는 관계를 이루고 있으며 인류는 변함없이 힘에 대한 갈망을 쫓는다. 만약 당신이 남성이고, '어머 차림이 진짜 근사하잖아!'라는 말을 들었다면 어깨를 크게 으쓱해도 좋다. 당신은 이미 지금 하고 있는 게임의 절반은 승리로 이끈 셈 일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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