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예진 패션디자이너 | 2015-10-27
웰빙. 건강한 삶을 추구하는 사회적 풍조가 일어나며 함께 몰려온 아웃도어의 열풍은 수많은 해외 아웃도어 브랜드를 한국에 입점시켰고, 국내 브랜드도 여럿 런칭 되었다. 등산으로 시작한 아웃도어 산업은 캠핑, 골프, 자전거에 이르기까지 퍼져나가고 있다. 아웃도어 패션은 언젠가부터 특정 스포츠와 관련 없이 일상적인 외출복으로 자리잡으며 어느 새 이런 차림들은 우리 눈에도 어색해 보이지 않게 됐다.
글 l 윤예진 패션디자이너
말 그대로 야외 활동을 위한 옷, 아웃도어 웨어. 그 중 몇 년 전 한국에 매장이 입점 된 후 더욱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브랜드 중 하나인 영국의 바버(Barbour). 바버는 영국의 오래된 아웃도어 메이커이다. 바버의 제품의 가장 큰 특징은 왁싱(Waxing)된 원단을 사용한 재킷류인데, 이는 쉽게 말해 방수원단으로 제작되었다는 이야기다. 흔히 생각하기에 방수원단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은 비옷이나 천막 등 비닐류의 소재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왁싱 처리된 원단이라 하면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비닐 방수원단은 아니고 육안으로 보기에 반질반질하고 재질이 톡톡해 보이는 코튼(면)이다.
바버의 왁스재킷(방수재킷)의 소재는 이집트에서 재배된 특별한 면 직물로 거기에 바셀린과 동물 기름으로 방수가공을 해서 만들어지는데, 역시 왁싱 소재답게 일반적으로 낚시용 방수 재킷이나 우비 등을 만드는데 쓰인다. 그러나 아웃도어 브랜드라고는 하지만 아웃도어 스포츠와는 별개로 바버의 재킷들은 영국인의 일상 외출복, 국민 브랜드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날씨와 상관없이 지금과 같은 가을철 출퇴근 시에 오피스룩으로 수트 위에 걸치는 재킷이다. 바버는 전세계에 제품을 소싱하고 있지만, 이 클래식 왁스재킷만은 여전히 그들의 공장이 있는 시몬사이드(Simonside)에서 수작업으로 제조되고 있으며, 매년 십만여 벌의 재킷이 소비되어 나간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영국에서 바버는 말 그대로 왕실 사람들이 즐겨 입었던 옷으로, 1974년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의 공작에 의해, 이후 1982년에는 그들의 여왕에 의해, 다시 1987년에는 웨일즈의 왕자에 의해 왕실의 아웃도어 방수복의 공급을 도맡았었던 업체이다. 한국은 사실 웨일즈나 스코틀랜드처럼 축축하고 부슬거리는 비가 오랫동안 내리는 계절은 없다. 하지만 한껏 영국식 패션에 심취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특히 바버의 왁스재킷은 (너무 마니아적인 티를 낸 것 같아 조금은 오글거리겠지만) 포기할 수 없는 패션 브랜드일 것이다.
근래 바버 브랜드의 대표 아이템은 스티브 맥퀸(Steve McQueen) 컬렉션이다. 이것은 바버의 '인터내셔널 재킷'의 75주년을 기념해 2011 F/W에 시작된 컬렉션인데, 바버의 '인터내셔널 재킷'은 패션계에서 '바버'라는 브랜드를 상징하는 가장 유명한 재킷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바버의 재킷에 스티브 맥퀸(미국의 영화배우)의 사진을 넣어 제작한 재킷이 스티브 맥퀸 컬렉션의 재킷이다.
혹자들은 바버가 영국 브랜드인데 할리우드 스타를 이용해 재킷 컬렉션을 만들었다는 것이 의아할 수도 있다. 스티브 맥퀸은 실제 바버의 왁싱 인터내셔널 재킷을 즐겨 입는 열성적인 모토바이커이자 카레이서였다. 1960년대에 할리우드에서 가장 출연료가 높은 배우 중 한 명이었으나, 폐암으로 50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50세의 죽음을 아까운 젊음이라 느끼고 있으니 필자가 나이가 들었구나를 느낀다). 바버 측은 인터내셔널 재킷의 가장 유명한 착용자 중 한명인 스티브 맥퀸에게 깊은 경의를 표하고 싶다는 것에서 이 컬렉션을 시작하게 됐다고 밝혔고 그 컬렉션은 두말할 것도 없이 '대히트'를 쳤다.
앞선 이미지의 스티브 맥퀸 컬렉션에서도 보았듯이 바버의 왁스재킷 외에 또 하나 인기 있는 품목은 퀼팅(quilting) 재킷인데, 퀼팅이란 천과 천 사이에 보충물을 넣고 누벼 보온 기능을 높이는 디테일이다. 이렇게 설명하면 매우 그럴싸해 보인다. 그러나 퀼팅 재킷의 아주 쉬운 예로 내가 어릴 땐 '누비' 라 부르던, 우리가 흔히 '깔깔이'라 부르는 군용 방한 내피를 꺼내 보인다면 특히 군필자들은 실망하는 기색을 보일 수도 있으리라.
퀼팅 재킷은 근래 버버리(Burberry) 브랜드와 랄프 로렌(Ralph Lauren)에서도 새롭게 선보였는데, 이 역시 겉면의 원단은 어느 정도 방수 처리가 되어 비나 습기로부터 몸의 체온을 유지하고 보온성을 높이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어쨌건 모든 퀼팅 재킷은 군용 내피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주 흡사한 디자인에서부터 길이가 짧은가 긴가, 박스 실루엣인가, 허리를 묶었는가 정도의 차이이다. 게다가 한국은 전반적으로 군대라는 것이 원가 기피되어야 할 대상이라 느끼는데다가, 군대에 관련된 유머러스한 소재들이 대중매체 전파를 많이 타다보니 특히 남성들의 '깔깔이 착용' 자체가 무언가 삶의 애환이나 고됨, 또는 블랙 코미디에 어울릴듯한 에피소드 등과 연관되어 연상되곤 한다. 때문에 해외 고급 브랜드에서 출시되는 '깔깔이'에 대한 반응은 아이러니 할 수 밖에 없다.
여성들에게 국한되기는 하지만 '결혼식 하객 룩'이라 불리우는 스타일이 있다. 주로 여성미 넘치고 샤방샤방하며 점잖지만 신부 친구 중에 단연 눈에 띄게 섹시해 보이는 정도의 룩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며칠 전 다녀온 지인의 결혼식에 왁스재킷의 매력적인 여성분을 보았다. 과연 잇(it)패션인가!
아직 한낮은 온기가 더 많다. 아직 단풍도 절정은 아니고, 아직 한 순간 공기를 스산하게 만들 가을비도 내리지 않았으며, 코끝 시리게 첫눈을 흩뿌릴 시기는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이미 이 계절 즈음엔 어디선가 내가 제일 잘나간다고 자부하는 패셔니스타들은 이미 왁스재킷을 걸치고 때이른 활보를 하고 있을 것이며, 특별히 대단한 패션리더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곧 다가올 다음 시즌을 위해 보충재 두둑한 퀼팅 재킷을 하나 구입하려 눈 여겨 보고도 있을 것이다. 남녀노소 누구나 이제 막 시작해도 첫 얼음이 보이는 날까지는 매일 교복처럼 걸쳐도 무방한, 게다가 특히나 요즘 대세로 떠오르는 패션 아이템인 퀼팅, 즉 깔깔이 재킷. 더 재미있는 것은 요즘 젊은 층에게 깔깔이가 무엇인 줄 아느냐 물어보면 군복 내피라 설명하기 보다는 '간지나는 겨울 재킷'이라 한단다.
제법 쌀쌀해진 바람 탓에 따뜻한 것들을 찾게 되는 요즘, 바뀐 계절을 위해 옷장정리를 하며 퀼팅 재킷을 꺼내어 입어본다. 아직은 이르지만 그 톡톡하지만 가볍게 폭신한, 특유의 방수처리로 슬쩍 냉랭한 듯 해도 금새 온기를 잡아주는 감촉이 나쁘지 않다. 왁싱 원단의 퀼팅 재킷. 다가오는 계절을 준비하며 조금은 푸근한 마음으로 추위를 기다릴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