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7-22
한 직업에 오래 몸담고 있다 보면 그 직업과 하나가 된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요즘의 젊음은 그토록 자연스러운 일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 갔다가 금세 흥미를 잃고 다른 곳으로 미련 없이 옮겨가기도 하고, 왜곡될 수 밖에 없는 이미지에 혹해 무작정 뛰어들었다가 후회하며 돌아 나오기도 한다. 젊기에 가능한 일이겠지만 젊음이 안타까운 순간이기도 하다.
그 젊음들에게 시간이 말을 건넨다.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 봤음직한 이야기지만 ‘그때 그 이야기’라고 외면하지 않기를. 자꾸 되풀이 된다는 것은 그 사실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고전이 오래된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고전이 아닌 것처럼, 명작이 유명하다는 이유만으로 명작이 아닌 것처럼. 오피니언 리더들이 젊음에게 보내는 세월의 충고, 그 시작을 북디자이너 정병규와 함께 했다.
에디터 | 정윤희(yhjung@jungle.co.kr)
사진 | 스튜디오 salt
서라벌예대 문창과에서 고대 불문과를 거쳐 <소설문예> 편집장, 민음사, 홍성사 편집장을 역임하고 프랑스 유학을 거쳐 북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을 달기까지 정병규는 전공이 아닌 것에 더 관심을 기울여왔다. 자꾸 다른 세계로 눈을 돌리고 뛰어드는 크고 작은 도전들이 계속되면서 정병규라는 이름 뒤에는 북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이 점점 견고해졌다. 소설문예>
북디자이너라는 직업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책을 굉장히 좋아했다. 만들 생각은 못 했지만 보는 걸 좋아했다. 대학 시절 교내신문을 만들게 되고, 또 출판물을 만드는 과정을 거쳐 디자인까지 하게 된 거다. 처음부터 디자인을 전공하고 그걸 바탕으로 책을 디자인하는 사람과는 길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어떤 분야를 좋아하면 그것을 직접 만들어 보고 싶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다 보면 나중에 디자인과 만날 수도 있고 비즈니스와 만날 수도 있다. 나의 경우는 굉장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된다. 접근 방법은 다르지만 결과적으로는 북디자인에 몸담게 됐으니까.
북디자이너가 되려면 기본적으로 어떤 마인드가 필요한가?
야구를 예로 들면, 야구를 좋아해서 나중에 선수가 되는 경우가 많다. 마찬가지로 책을 좋아해야 한다. 디자인 비용을 보면 다른 디자인에 비해 높다고 할 수 없다. 그래서 단순히 비즈니스로서의 디자인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분야에 몸 담고 있는 것을 보면 책을 좋아하기 때문일 거다.
북디자이너로서 꾸준히 공부해야 할 분야는 무엇인가?
학교에서 배운 디자인은 현장에 나오면 초보적인 것이고, 현장에 나와서 무엇을 구체적으로 배운다기 보다는 부딪히면서 배우는 것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디자이너가 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현실과 부딪히면서 완성되는 것이기도 하니까 일한다는 것 자체가 배우는 거다. 다른 디자인도 마찬가지겠지만 책의 경우에는 디자인을 할 때 내용을 알아야 한다. 재주 있는 사람들이 애써서 만들어내는 디자인이 어떤 것인지, 또 그것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어느 분야든 명작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잘 된 작품들에 대한 공부를 꾸준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대학에서 그런 것을 가르치지 않으니까. 북디자인 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한 분야의 좋은 작품들은 따로 공부를 해야 한다.
이력을 보면 도전의 연속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중에서 인생을 바꾸었다고 할 만한 도전은 무엇인가?
디자이너라는 작업마다 도전하는 직업이다. 작업할 때마다 자기 자신을 살펴보게 된다. 그러니까 도전의 결과는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설득시킬 만한 나름대로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인생을 바꾼 도전이라면 편집자로, 기획자로 비즈니스를 하다가 디자인에 뛰어든 것이다. 나는 권위나 전통을 좀 우습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게 자꾸 자문하게 만든다. 과연 이게 인생의 전부인가, 새로운 세계는 없는가에 대해 생각한다. 50세가 되었을 때 이런 생각 때문에 많이 힘들었다. 40대는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고 지나갔는데 50세가 되고 몇 년은 나이가 자꾸 거슬리더라. 디자인을 끝까지 해도 되는지에 대해 생각이 많았다. 20년 동안의 작업을 모아 전시회를 열었다. 좋아했던 것이고, 좋아하는 것이 디자인이라는 생각에 끝까지 가보기로 한 거다.
만든 책마다 이슈가 되고 파격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는데. 북디자이너로서 파격적인 시도를 할 수 있었던 원천은 무엇이었나?
지금도 그렇지만 실험을 많이 했다. 디자이너들이 의도적으로 실험의 결과물을 내세우면서 이건 실험이었다고 말한다. 그런 게 싫더라. 디자이너인 척 하는 거지. 사실 이건 내 개인적인 생각이고 또 어떤 사람은 그렇게 해야 디자이너로서 존재 이유를 느끼기도 한다. 나도 젊었을 때 파격적인 옷을 입고 다니거나 이런저런 시도를 했는데, 디자인을 하면서부터 내면적인 것을 제외하고는 굉장히 절제했다. 클라이언트와의 관계 속에서 실험을 잘 숨긴다거나 포함시키는 게 진짜라고 생각한다. 그런 것은 꾸준히 해온 편이다.
최근에도 최인호 선생의
<길 없는 길>
이라는 책을 디자인했다. 같은 책을 두 번 디자인하게 된 경우인데, 처음 디자인을 하고 2년을 쉬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작업을 하게 됐다. 타이포그래피를 이용한 실험을 해보고 싶어서 이름을 아주 작게 쓰고 문자 겸 이미지로 활용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했다. 이 책은 지금 시중에 판매하고 있다. 디자인 자체가 상품이라고 생각한다. 표지만 따로 떼어내서 사는 게 아니니까.
좋은 디자이너들은 다른 사람이 봤을 때 잘 모르지만 매 작업마다 끝없이 실험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계속 국화빵을 찍어낼 수는 없지 않은가. 사실 현장에서 일하는 디자이너 중에 내가 제일 나이가 많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의도적으로 스스로에게 강력한 충격이나 실험을 암시하고 시행해 왔는지도 모른다.
슬럼프가 왔을 때 어떻게 극복했나?
디자인은 제약 조건이 굉장히 많다. 예술이야 자기가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 어떻게 보면 스스로가 주인인 거다. 그런데 디자인은 그렇지 않다. 클라이언트가 있으니까. 클라이언트와의 관계 안에서 거의 모든 제약이 생긴다. 본인이 클라이언트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실험일 경우고,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겠지만 디자인의 본질은 그런 클라이언트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거다.
슬럼프는 자주 오는 편이다. 그걸 극복하는 방법은 ‘나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는 거다. 마감 시간이 되면 어떤 형식으로라도 결과물이 나올 것이라는 자기 암시나 확신이 사실 굉장히 필요하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슬럼프는 지나가게 된다.
길>
시간 속에 켜켜이 쌓인 그의 작업들은 어느덧 정병규라는 제목을 단 한 권의 책이 되었다. 그는 이따금씩 눈을 감고 한 페이지씩, 혹은 열 페이지씩 책장을 넘기며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그 이야기는 정병규라는 이름의 북디자이너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북디자인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북다자이너 정병규 = 북디자인의 역사’라는 등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때에도 북디자인이라는 영역은 엄연히 존재해 왔다. 내가 좋아하는 분야여서 한 것이지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들으려고 했던 건 아니다. 사실 내가 북디자인에 뛰어들기 전에도 책을 굉장히 잘 만드는 선배들이 많이 있었다. 다만 디자인의 독자성을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다.
북디자이너 정병규가 북디자인이라는 영역을 개척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후배들에게 남겨진 몫은 무엇일까?
내가 북디자인을 시작할 때만 해도 책이라는 매체는 사회적으로 굉장한 지위에 있었다. 책을 통해서 모든 것이 형성되고 전달되고, 또 사고가 이루어졌다. 컴퓨터 중심의 디지털 세계가 열리면서 예전에 비해 책이 위축되었다. 위축된 책의 세계를 다시 살려내고 책의 본질적인 가치를 소생시키는 역할은 디자인이 절대적이다. 북디자인은 책이라는 매체의 생존과 연관되어 있다. 그런 면에서 디자이너에게 포괄적이고 입체적인 접근과 생각이 필요하다.
과거에는 사회 안에서 책이 필수였다면 지금은 선택이다. 다른 미디어가 많으니까. 책을 다시 살려낼 수 있는 입장이나 태도를 가져야 한다. 예를 들어 영화가 등장하면서 연극이 많이 위축된 것처럼. 하지만 여전히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연극하는 사람들을 보면 영화배우와는 또 다른 마인드를 지니고 있다. 앞으로의 북디자인도 그런 것이 요구될 것 같다.
아직까지 현역으로 활동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50세가 되던 해 전시를 열었다. 그 당시에 디자이너들의 평균 수명이 40대 초반이었다. 그런데 해외의 경우 일본만 해도 50세가 되면 겨우 신인 딱지를 떼는 시기다. 60대가 되어야 중견으로 인정 받을 수 있는 문화이다. 그런 문화를 실천해가고 싶어서 지금껏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책을 좋아한다고 하면 읽는 것, 만드는 것, 파는 것이 있는데 책을 만드는 것에 있어서는 편집도 해보고 디자인도 해 봤으니 가장 잘 알지 않겠는가. 물론 계속 책을 만들다 보면 책이 싫을 때도 있다. 그런데 그건 잠시일 뿐이고 책만큼 인간적인 매체가 없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이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다.
‘북디자인이 모든 그래픽 디자인의 원점’이라고 했는데.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는 무엇인가?
디자인을 볼 때 이미지 중심으로 볼 수 있는데 디자인은 기본적으로 이미지와 활자의 관계다. 그런데 타이포그래피 중심으로 살펴보면 북디자인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그래픽 디자인이라는 장르가 형성되기 전부터 존재해왔다. 우리나라에서는 현대 디자인이 광고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본격화 되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그걸 강조하고 싶어서 했던 말이기도 하다. 90년대 초반만 해도 한국의 디자인 교육은 광고를 중심으로 커리큘럼이 짜였는데 지금은 커뮤니케이션 디자인, 그 중에 타이포그래피가 큰 역할을 하는 식으로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북디자인을 이루는 여러 가지 요소 가운데 북디자이너가 가장 신경 써야 할 부분은 무엇인가?
타이포그래피다. 활자를 가지고 시각언어로써의 의미를 만들어야 되는데, 이미 의미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굉장히 강한 작업이다. 앞으로 시각디자인의 큰 흐름도 타이포그래피라고 생각한다. 또 한글이 많은 장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쪽으로 많은 도전과 실험, 개척이 필요하다.
책이라는 것이 쉽게 말하면 본문과 본문 아닌 것, 두 종류의 활자가 동시에 사용되는 거다. 그 관계를 각각의 특징과 그것의 관계와 이미지 중심의 활자 사용을 통해서 저자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보여줘야 한다. 그게 바로 디자이너의 존재 이유이자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북디자이너에게 타이포그래피는 어떤 의미인가?
북디자이너에게 타이포그래피는 디자인의 다른 말이다. 예를 들어 ‘사람’과 ‘인간’이 동일하게 쓰이는 것처럼 북디자인, 또는 북타이포그래피라 할 수도 있다. 디자인이라는 말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 오래되지 않았다. 디자인이라는 말이 등장하기 전에는 타이포그래피라 했다. 이것이 지금의 디자인 행위 자체를 활자 중심으로 불러왔다. 그렇기 때문에 책을 만드는 행위와 같은 말이 되는 거다.
책이라는 것이 활자와 이미지로 되어 있는데 이미지 중심으로 볼 때는 ‘북디자인’이라 부를 수 있고, 활자 중심으로 볼 때는 ‘타이포그래피’로 부르면 된다. 이것은 광고 디자인에서 활자의 씀씀이를 가리킬 때의 타이포그래피와는 다르다.
디자인으로써 타이포그래피는 디자인의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영역이다. 그래서 타이포그래피는 본문에서 사용될 경우 잘 만들면 표시가 안 난다. 잘 해놓으면 물이 흐르듯 자연스러운데 잘못했을 경우에는 그 전체를 망치기 때문에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마지막으로 북디자이너가 되려는 후배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북디자인은 자신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다. 혹시라도 북디자인에 대해 막연한 환상을 갖고 있으면 안 하는 게 좋다. 요즘 들어 새롭게 느끼는 건 이거야 말로 애정을 갖고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한다. 좋아하지 않아도 직업으로 월급 받으면서 할 수 있는 디자인도 있지만 북디자인은 정말 책을 좋아해야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다.
그리고 북디자인이라는 것은 오랫동안 작업해서 그 중에 정말 좋은 작업이 나오는 것이지 젊었을 때의 감성으로만 해결될 영역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디자이너의 경험이나 인생관이 가장 잘 표현될 수 있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배어 나오는 디자인이 없다. 40대 이후에도 이 일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지 않은가.
나이를 먹고 경험이 쌓이면서 관심의 폭이 넓어졌을 때 그것을 반영할 수 있다. 성숙한 디자인 문화의 대표 격이 북디자인이다. 한국의 디자인 수준이자 문화 지표가 된다. 다른 디자인 시장은 우리나라에 국한된 것이 아니지만 북디자인 시장은 결국 우리나라다. 자국의 문화를 바탕으로 존재하는 디자인이기도 하고. 그런 면에서 가장 한국적인 정체성을 담보한 디자인이고 그렇기 때문에 문화의식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간곡히 부탁하고 싶은 것은 훈민정음이라도 열심히 읽자는 거다. 우리가 늘 사용하고 있어 고마운 줄 모르는데 한글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생각한다. 한글은 세계 어떤 문자보다도 독창적인 문자다. 그런 것을 나름대로 공부하고 공유하는 의미에서 훈민정음을 타이포그래피적으로 새롭게 보는 강의를 올해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훈민정음이라는 것은 단순한 문헌이 아니라 우리 문화 창조의 원리가 적혀있는 문헌이다. 따라서 훈민정음에 대한 공부는 한국 디자인의 원리를 살피는 공부가 된다. 그런데 한글이란 세종대왕이 만든 거고,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문자라는 것만 알고 책을 읽질 않는다. 우리 디자이너들은 훈민정음의 내용을 어느 정도의 수준에서 이해하는 것이 상식화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