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7-28
지난주 연재에서 권영걸 교수는 ‘과연 공간과 도시의 주인이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며 ‘공간’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 이야기했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바탕으로 ‘자연의 도(道)를 따르고, 인간을 섬기는 일’이 공간디자인이라는 것.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좋은 공간과 나쁜 공간은 무엇인지 좀 더 자세히 들어보자.
에디터 | 이찬희(chlee@jungle.co.kr)
일러스트레이션 | 강일구 www.ilgooart.com
Jungle : 모든 공간은 인간 환경을 이루는 토대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환경을 지배하는 것인지, 아니면 환경이 사람을 지배하는 것인지요
그 질문 자체가 인간 중심의 세계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보이네요. 정답은 당연히 후자입니다. 저는 스키너(B.F.Skinner)의 이론을 믿는 사람입니다. 인간은 잠시도 환경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철저히 환경의 노예지요. 인간의 행동이 환경에 적합하지 못할 때 그 행동은, 그리고 그 인간은 가차 없이 도태 당하고 맙니다. 환경은 눈에 띠게 인간을 밀거나 잡아당기지 않지만, 은밀하고 무자비하게 작용해요. 인간은 어느 경우에도 환경으로부터 자유롭지도 독립적이지도 못합니다. 지배니 정복이니 하는 것은 인간의 착각이요, 오만입니다. 우리는 예부터 조화론적 문화지평을 깨달음 속에 체득하고 일구어온 민족입니다. 자연과의 온전한 합일을 통해 안전하고 건강한 삶을 이루어내는 한편, 온갖 사회 문제에 대한 답을 ‘인간-공간’의 관계성에서 찾아 해결하려 했습니다. 사회 환경에 관한 사례지만, 자식 교육을 위해 집을 세 번이나 옮긴 맹자 어머니도 일찌감치 그러한 명제를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Jungle : 교수님께서 생각하시는 좋은 공간, 바람직한 공간디자인 사례는 어떠한 것입니까?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지요
짧게 설명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환경 내에는 구조를 개조하지 않고도 많은 행위를 지원하는 곳이 있고, 다양한 행위를 지원하도록 변화시키기 쉬운 곳도 있습니다. 그 두 가지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흔히 ‘적응성이 있는(adaptable)’과 ‘유연성이 있는(flexible)’이라는 두 용어가 동원됩니다. 이 두 단어는 종종 동의어로 쓰이지만, 경우에 따라 반대되는 방식으로 쓰이기도 해요. 적응성 있는 레이아웃이란 한옥의 안방과 사랑방처럼 물리적 변화 없이도 상이한 시간대에 상이한 행태패턴 즉 거실, 응접실, 공부방, 침실 등의 용도를 지원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가령 유치원의 고정된 내부공간이 학습, 미술, 음악, 무용, 실험, 놀이, 취침 등 다양한 활동을 수용하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유연성 있는 레이아웃이란 여러 상이한 기능을 수용하도록 그 구조 자체가 변화하기 쉬운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벽면을 쉽게 변경할 수 있는 사무공간이나, 경기장 내의 좌석 배치를 쉽게 바꿀 수 있는 경우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 전통건축의 들어열개문처럼 문을 들어 올려 수평적으로 두는 장치도 폐쇄 경계를 변경하는, 유연성 공간의 멋진 사례지요. 로버트 벤츄리가 “오늘날 살아남아 있는 과거의 중요한 건축물들은 모두 적응성이 높은 것들 이었다”고 지적했듯이, 그 가치가 오래 지속되는 공간은 한결같이 적응성과 유연성이 뛰어난 것들입니다.
과거에 세계적인 조경가 로렌스 할프린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는 서울의 대표적인 공간을 두루 방문했어요. 그런데 우리가 자랑하는 명소에서 별반 반응이 없던 그가 감탄사를 연발한 공간은 뜻밖에도 사람들로 북적대는 남대문 시장이었습니다. 사실 교과서적으로는 온도, 습도, 밀도 등 무엇 하나 쾌적한 공간이 될 수 없는 곳이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그 불쾌할 법한 고밀도의 공간에서 바로 그 과밀을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과밀 속에서도 서로가 서로를 해(害)하지 않고, 공간이 인간과 인간의 간(間)을 정겹고 흥겹게 지원하고 있는 곳이지요. 남대문 시장 같은 곳에서도 모종의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Jungle : 그렇다면 나쁜 공간, 바람직하지 않은 공간디자인은 무엇인가요
나쁜 공간의 한 예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모더니즘 공간계획의 대표적 실패사례로 1950년대 미국 세인트루이스의 프루이트 이고(Pruitt-Igoe) 집합주거단지가 늘 인용됩니다. 이 프루이트 이고 아파트단지는 연방정부의 주택 건설사업의 일환으로 건설되어 11층짜리 고층건물 40여개 동에 3천 세대, 1만2천명이 살고 있었어요. 그러나 동시대의 최고 건축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이 집합주거 단지는 조성 당시의 찬사와 기대를 저버리고 20년이 채 못 되어 해체 되었습니다. 이내 잡초더미 우거진 도시 속의 사막이 되어 버리고 말았지요. 오늘날 환경심리학과 도시공간계획을 말할 때, 반면교사의 사례로 빠지지 않고 인용되는 이 사건의 전말은 대략 이러합니다.
이 아파트먼트는 건축 내외부의 모든 공간은 철저히 기능과 효율 중심으로 설계되었습니다. 낙서를 쉽게 닦아낼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벽에는 타일을 붙였습니다. 기능만 생각한 공업적 이미지의 조명등과 라디에이터를 천장과 벽에 영구적으로 부착시켜 도난방지에 만전을 기했습니다. 하지만 이 아파트먼트 단지의 주거환경은 예상과는 판이하게 형성되어 갔어요. 입주한지 몇 년 되지 않아서 주거지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기 시작했지요. 어린이 놀이터와 주차장 시설은 파괴되었고, 부서진 유리조각과 쓰레기더미는 아무 데나 널려 있었고, 수도와 전기시설은 무차별적으로 끊겨졌습니다. 엘리베이터와 계단실에서는 불량배들의 강도 및 강간사건이 일어났고, 절도사건도 도처에서 발생했습니다. 선량한 입주자가 하나 둘 교외로 이주하고 빈민들만 남아 살다가 1972년부터 주정부의 철수계획으로 건물들을 폭파시켰습니다.
왜 이같이 훌륭한 아파트먼트 단지가 약탈과 방화, 그리고 범죄의 소굴로 변하고, 그 짧은 기간에 급속한 퇴락의 길을 걷게 되었을까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우선 주민들 상호간에 긴밀한 인간적 유대관계를 지원하는 ‘공동의 공간’이 없었어요. 불행히도 그 주거단지는 이웃과의 상호작용을 촉진할 공간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고층건물 짓기에만 급급했던 겁니다. 주민들은 그곳을 자신의 ‘영토’로 느낄 수 없었어요. 수천 세대가 함께 사는 고층 아파트촌이지만 자기 집은 자기의 성(城)이라는 느낌이 들도록 공간을 설계했어야 하는데, 외부인이 마음대로 출입하며 기웃거려도 그것을 제대로 감시할 수 없었고, 긴 복도는 남의 것이지 자기의 것으로 느껴지지 않았어요. 앞마당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지켜볼 수 있도록 설계되지도 않았습니다. 이렇듯 단지는 입주자들의 일상의 공간행태와 기본적인 희망도 고려하지 않았고, 도시인의 인간관계 형성을 위한 공유공간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도 전혀 없었어요.
우리는 프루이트 이고의 생생한 실례를 통해 하나의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인간이 물리적 환경에 단순히 적응만 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그 환경을 지각하고 인지하는 또 다른 심리적 과정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지요. 그와 아울러 모든 구축환경은 사람이 갖고 있는 공간행동의 원리, 그리고 환경과 인간행동과의 관계에 대한 깊은 이해에 기초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Jungle : 그렇군요. 공간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공간을 설계하는 공간디자이너들의 역할을 무엇인지요
자유롭지 않기는 인간만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공간 투쟁을 하며 살아갑니다. 동물의 입장에서 보면 산에 무성한 나무들이 고요히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도 엄청난 공간 싸움을 하고 있어요. 천이(遷移, Succession)는 그러한 밀어내기 전쟁의 과정입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징기스칸이 무엇을 위해 끝없이 땅을 넓히려 집착했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아요. 군인에게 공간은 빼앗기고 빼앗아야 하는 대상으로, 정치가에게 공간은 곧 권력일 것입니다. 또 개발업자의 눈에는 공간이 재화로 보일 겁니다. 이익동기에서 공간을 바라보기 때문에 자연히 채우고 착취해야 할 대상이 되지요. 탐험가나 여행자에게 공간은 경험의 대상이 되고, 예술가와 디자이너에게는 창작의 기반이요, 소재가 됩니다. 세상 모든 일이 장소, 즉 모종의 성격을 지닌 공간에서 일어납니다. 그래서 영어에서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take place’라 합니다. 사건은 모두 장소 기반으로 일어나지요. 그 말을 뒤집으면, 공간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에 따라 일이 어떠한 방식으로 일어날 지가 암시 됩니다. 그래서 인간세상의 물적 환경조건을 창조하는 디자이너의 사명은 지대한 것입니다. 그들의 공간관(空間觀)에 따라 세계는 유토피아가 될 수도, 악마적인 것이 될 수도 있어요.
Jungle : 이제 큰 관점에서 좁혀, 사람들은 우리 시대의 공간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고 디자이너는 공간을 어떠한 태도로 접근해야 하는지 말씀해 주세요
인간은 공간을 아끼고 사랑해야 합니다. 공간을 무생물로 보지 않고, 나와 우리가 확장된 실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제 소유의 관점에서 삶의 관점으로, 개인의 관점에서 공공의 관점으로, 물질의 관점에서 문화의 관점으로 공간을 보는 시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공간이 나의 외계가 아니라 나와 합일된 하나로 보는 생각의 전환이 있어야 합니다. 대통령께서 내놓은 ‘저탄소 녹색성장’이라는 시대의 화두를 디자인 측면에서 수용한다면, 친환경성의 실천적 형식으로 나타날 그린 디자인(Green Design)이 됩니다. 이제 ‘Greening’은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강화되고 있는 윤리강령이자 행동코드입니다. 그린 디자인은 환경의 보존과 개선, 그리고 삶의 질 향상과 사회전체의 공동선(共同善) 지향이라는 측면이 동시에 추구되는 에코 디자인(Eco-design)의 한 형태입니다.
에코 디자인의 대상은 수없이 많고, 접근방법 또한 다차원적입니다. 생태환경의 문제는 단순히 실용적인 문제에 그치지 않고, 보다 광범위한 사회윤리적인 문제에 결부되어 있어요. 현대 문명과 생태계의 위기는 많은 부분 편협하고 그릇된 디자인 사고에 기인한 것입니다. 환경문제의 치유와 개선도 모든 층위의 설계가들의 디자인 이념의 전환에 의해 가능합니다. 이제 디자이너는 디자인이라는 작위(作爲) 속에서 환경에 대한 충격의 최소화와 생태환경의 보전을 최우선의 가치로 두어야 해요.
오늘날의 공간디자인은 생태계의 속성인 절약이라는 관점, 즉 에콜로지(ecology)는 에코노미(economy)라는 자연에 내재된 경제원리의 실천과, 인간을 물화(物化)된 상태로부터 해방하여 삶 자체가 예술이 되도록 하는 녹색미학의 구현을 동시에 성취해야 합니다. 생태미학에 근거한 환경예술이 인간의 보편적인 삶 속에 들어오게 하고, 그 예술의 기능과 역할을 생태계 전체의 유지와 연관시키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생산-소비 구조의 유효한 마케팅 수단으로만 인식되어 온 ‘디자인의 힘’을 이제는 환경과 인류사회의 지속을 보장하는데 써야 합니다. 조급함과 속도중독, 과도한 소비주의와 무모한 건설 등 ‘양(量)의 삶’을 추구하던 탐욕의 이데올로기로부터, 소박하고 만족적인 ‘질(質)의 삶’을 지향하도록 하는데 모든 디자인 역량을 모아야 합니다.
Jungle : 공간디자인을 공부하고 싶은 디자이너에게 필요한 덕목은 어떤 것이 있나요? 그리고 공간디자인에 대해 어떠한 접근 태도를 가져야 하나요
공간디자인에 입문하는 제자들에게 늘 강조하는 것은 인간과 자연에 대한 이해와 사랑입니다. 공간디자인은 ‘자연의 도(道)를 따르고, 인간을 섬기는 일’이지요. 후자도 귀한 일이지만, 전자가 더 중요한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전자는 후자를 담보하는 전제 조건이기 때문이지요. 공간디자이너가 되고 싶은 학생은 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생태를 본능적으로 관찰해야 하고, 그 행태를 습관적으로 머리 속에 기록해야 합니다. ‘인간-공간-행태(Man-Space-Behavior)’의 관계 속에서 모종의 원리를 발견해야 합니다. 몇몇의 책이 그 원리를 가르쳐주고 있지만, 학생들은 현장에서 스스로 체득해야 합니다. 인간은 외부의 자극에 대한 예민한 수용기(receptor)입니다. 그러한 인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작용하는’ 공간을 디자인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또 물을 아껴 쓰고 전기를 아끼듯이, 공간을 아껴 써야 합니다. 말과 글을 바르게 쓰고 도구를 바르게 써야 하듯이, 공간을 잘 만들어 바르게 써야 합니다. 공간디자이너의 태도가 바로 서면 세상의 공간들이 인간의 필요와 잘 맞는, 이른바 정합(整合)성이 있는 집이 되고 도시가 될 겁니다. 또 쾌적하고 낭비 없는 세상이 이루어질 겁니다.
| 본 인터뷰는 월간
<정글콜론>
7월호 ‘Opinion Leader’ 섹션에 게재된 내용을 재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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