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6-27
2011년의 서울을 살아가는 일은 꽤나 속도감을 요하는 행위이다. 600년 된 고도(古都)라고 하지만 서울 도심에서는 100년 이상 된 건물, 하다 못해 50년 이상 된 건물을 찾는 일도 참으로 어렵다. 매해 바뀌는 도시의 경관 속에서 뚝심 있게 버티던 건물들도 이제 곧 그 생명을 마친다고 하니, 서울이란 곳은 진정 다이내믹한 도시임에는 틀림없는 듯. 일러스트레이터 이장희는 이러한 서울의 역동성을 차분하게 기록해 온 작가이다. 그리고 그의 책, ‘서울의 시간을 그리다’는 이러한 그의 오랜 작업을 꼼꼼하게 담아낸 노작의 결과이다.
에디터 | 이은정(ejlee@jungle.co.kr)
자료제공 | 교보문고
그를 만난 곳은 광화문 교보문고 안에 위치한 ‘구서재(九書齋)라는 매장에서였다. 조선시대 실학자 이덕무의 서재 이름을 차용했다는 이 곳은 매달 테마를 달리하여 공간을 구성하는 일종의 편집매장. 이장희는 구서재의 6월 테마를 담당한 콜라보레이션 작가이다. 자연과 도시, 집과 회사, 문화공간과 여행, 건축과 가상공간, 그리고 특별한 공간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섬세한 화풍으로 표현된 아홉 가지의 테마는 서점이라는 공간이 지닌 차분함과 어우러져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는 듯 했다.
학부에서 도시공학을 전공한 이장희 작가는 졸업 이후, 마치 정해진 것처럼 그림을 그리게 된다. 섬세하고 서정적이기 보다는 계산적이고 딱딱한 도시공학이라는 전공에서 그림으로 연착륙하기란 그리 쉽지 않은 일이었으리라. 미술을 전공하면 먹고 살기 힘들 것이라는 부모님의 의견에 따라 도시공학을 전공했던 그는 학과의 모든 커리큘럼 중에서 직접 그림을 그리는 설계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고.
“그림을 좋아하니까 자연스럽게 그림과 관련 있는 프로그램들을 많이 익히게 되었어요. 처음으로 다루었던 포토샵 3를 비롯해서 나머지 프로그램들도 모두 독학으로 익혔죠. 당시만 해도 설계를 할 때에는 완성 후 직접 손으로 색칠을 해야 했어요. 다른 사람들은 전부 색연필 같은 걸로 색칠했는데 저만 포토샵을 이용하고 그랬죠. 설계를 하면서 좀 더 디자인적인 면에 치중하다 보니까 설계 성적은 나름 좋았어요(웃음). 그 당시는 웹 디자인이 인기 있던 시절이었는데 저 역시 포토샵을 좀 만지고 그러다가 웹 디자인을 하게 되었지요. 학교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로 많이 했었는데 그러다가 그림으로 빠져들었고, 졸업하고는 아예 그림을 그리게 되었어요. 졸업하고 직장 다니면서 버는 월급이 있었는데 그걸 모아서 그림 공부를 더 하려고 했지요. 이번엔 부모님도 찬성하셨고요. 그러다가 뉴욕으로 갔죠. 그곳에서 원하는 것까지는 하지 못했지만 실무진에게 배우는 아카데미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그림을 제대로 배울 수 있었습니다. 어떤 식으로 일을 해야 하는지 감이 잡힌 거죠.”
이장희 작가는 참 성실하게 그림을 그린다. 작은 노트를 들고 다니며 틈이 날 때마다 눈 앞의 풍경을 스케치하는 그에게 차곡차곡 노작이 쌓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그는 뉴욕에서의 시간을 이렇게 촘촘히 기록했고, 이 기록들은 고스란히 그의 첫 책이 되어 남았다. 이후에 했던 작업인 ‘아메리카, 천 개의 자유를 만나다’ 역시 친구와 함께 떠났던 미국 여행의 기록을 담은 책. 일반적인 여행서처럼 꼼꼼하게 여행의 How-to를 알리기 보다는, 여행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소소하게 담아냈다. 세 번째 책인 ‘서울의 시간을 그리다’ 역시 그의 이런 강점이 십분 발휘된 책이다.
“서울을 사진으로 담아낸 책들은 사실 없지 않았어요. 저는 그걸 그림으로 바꿔서 표현해보고 싶었던 거고요. 서울이라는 곳이 사실, 신도시와 다를 바가 없잖아요. 600년의 역사가 흐르는 고도라고는 하는데 사실 중국이나 일본의 고도에서 느꼈던 것들은 없는 것 같아요. 서울의 건물들을 그리다 보니까 이 자리에 전에 뭐가 있었는지가 궁금해졌어요. 겸사겸사 사료를 찾아보니까 한 장소에 대한 내용들이 겹겹이 쌓여있더라고요.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단순하게 하나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죠. 한 장소를 조사하다 보면 그 옆의 공간을 보게 되고, 그러다 또 그 장소의 역사를 찾아보게 되고 이런 식으로 서울의 시공간이 겹쳐지더군요.”
얼핏 생각하면 길을 돌아간 것일 수도 있으나, 그가 전공했던 도시공학은 도시를 보는 색다른 시선을 선사했다. 다른 작가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교통의 흐름이나 전반적인 도시의 구성, 그리고 전체적인 얼개를 보는 눈이 생겨났던 것. 이장희 작가는 자신의 눈을 통해 본 서울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어느 도시든 완벽한 보존은 어렵습니다. 특히 서울은 6.25를 거치면서 황폐화되었고 돈이 없는 상태에서 새롭게 개발이 시작되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난 개발이 되었고요. 역사를 잘 담아낸 도시로 흔히들 파리를 꼽습니다. 파리도 서울과 같은 성곽도시였잖아요? 웬만하면 옛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는데 내부에서 도시개발 때문에 충돌도 있다고 들었어요. 뭐든 장단점이 있는 것 같아요. 서울은 정말 넓은 도시입니다. 활발하게 개발되는 것도 좋지만 사대문 안 만이라도 미래를 위해서 보존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서울이라는 곳의 색깔을 남기기 위해서이지요. 홍콩이나 여타의 다른 도시처럼 서울에서는 스카이라인을 보기가 힘들어요. 멀리서 보는 풍경이 없는 거죠. 한강이라는 트인 공간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대문 안만 정신 없이 복작거리죠. 미군 용산기지가 나가고 사대문 안을 지속적으로 정비하면 몇 십 년 안에는 모습이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울 자체에는 테마가 부족한 것 같아요. 저는 어디에 가도 그 곳의 풍경을 스케치로 담는 편입니다. 예전에 사무실이 충정로에 있었는데 주변부터 꼼꼼히 챙겨보자 싶어서 스케치를 시작했죠. 그러다가 서울이라는 카테고리로 축약이 된 겁니다. 제가 하는 작업은 의미를 만드는 일 같아요. 옆에 있는 건물도 그냥 지나가면 그저 건물일 뿐인데 내용을 알고 의미를 알게 되면 그 안에 숨어있는 시간도 흘러나오는 법이죠.
이장희 작가는 얼마 전부터 동아일보를 통해 연재를 시작했다. ‘스케치 여행’이라는 이름의 이 칼럼은 제법 품이 많이 들기는 해도 그가 꽤 큰 애정을 가지고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이다. 이 칼럼을 통해서 전엔 미처 알지 못했던 장소를, 사람을, 시간을 만나고 있는 이장희 작가. 나무가 좋아서 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고, 사람에 대한 순수한 관심으로 사람을 그리는 그는 앞으로 생각하고 있는 모든 일들을 조용조용히 해나갈 예정이다. 이장희 특유의 느리지만 촘촘한 작업들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