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9-05
책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에는 멋스럽다. 아트북이라고 불리기에는 너무나 깊다. 자국에서 ‘미래 50년 동안 북디자인에 영향을 미칠 디자이너’로 평가 받는 중국의 북디자이너 뤼징런(呂敬人, Lv Jingren)의 작품이 그렇다. 책에서 디자이너의 ‘정신’이 느껴지게 만드는 이 시대의 위대한 디자이너는 여태껏 만난 어떤 사람보다도 온화하고 깊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8월 30일부터 9월 14일까지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타이포잔치 2011을 맞아 한국을 찾은 뤼징런을 디자인정글이 만났다. 그리고 책과 타이포그래피를 넘어선 동양의 디자인에 대한 그의 깊은 철학을 들었다.
에디터 | 최동은(dechoi@jungle.co.kr)
자료제공 | 타이포잔치 2011 조직위원회
1947년 상하이에서 태어난 뤼징런은 문화혁명 후 중국청년출판사에서 근무하며 북디자인을 시작했다. 그는 일본에서 두 차례 디자인 연수를 받으면서 독일 울름조형대학에서 객원교수를 지낸 일본의 세계적인 디자이너 스기우라 고헤이에게서 사사를 받았다. 저서만 해도 『장정에서 북디자인으로』, 『책의 놀이- 중국 현대 북디자이너 40인』, 『뤼징런 북디자인 교과서』 등 9권이 넘으며 수상한 상은 셀 수 없을 정도다. 뤼징런이라는 이름을 수식하는 이런 화려한 문구들은 국제화의 바람에 묻혀 사라지기 쉬운 동양의 풍취를 디자인 속에 스며들게 하는 그의 능력으로부터 기인했다. 현대적인 동양스러움, 중국의 아이덴티티를 책 속에 녹여내는 그의 작품은 한국에는 그리 알려져 있지 않은 숨겨진 보물이다. 끊임없이 디자인 작업을 하며 중국 칭화대와 중앙미술학원, 한국의 ACA(Asia Creative Academy)에서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뤼징런과의 인터뷰 전문이다.
Jungle : ACA 교수로 한국에 여러 번 와 보신 걸로 압니다. 한국에 대한 느낌은 어땠는지요?
한국은 사방이 녹색으로 뒤덮여 있어 깨끗한 도시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또 한국이 디자인에 깊이 주목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요. 정부에서 민간으로, 민간에서 또 개인으로, 디자인에 대한 인식이 큰 범위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범위에서까지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Jungle : 선생님의 작업은 책이라기보다는 작품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책을 통해서 표현하시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요?
책은 일단 읽는 것이기 때문에 책 속의 정보를 아름답고 정확하게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최고의 목적입니다. 하지만 저도 북디자이너로써 책을 가지고 놀이를 한다거나, 독특한 작품을 하고 싶은 욕심도 있습니다. 받아들이는 독자의 한계, 출판사의 판권에 대한 한계같이 여러 한계들이 있어서 어렵지만요. 제가 그런 독특한 디자인을 해도, 그와 똑같은 제품을 만들려면 그만큼 재료가 많이 들지요. 또한 디자인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상대방과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마찰되는 부분을 부드럽고 원만하게 하는 일도 저의 책임입니다. 책은 원래 사람과 사람의 교류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결과물이니까요. 책을 통해 사람들과 가까워졌으면 합니다.
Jungle : 그럼 주로 디자인하시는 도서는 상업 도서인가요, 아니면 작품 위주인가요?
저의 많은 작업들이 대량 출판물이기 때문에 상업 도서라고 볼 수 있죠. 하지만 그 내용이 주로 인문, 역사, 예술 위주라 일반 상업 도서와는 다른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상업 도서뿐만 아니라 아동 도서나 교과서도 만들고 있고요. 지금은 중국 전국의 중소학교에서 사용되는 교재를 디자인하고 있습니다.
Jungle : 요즘 가장 즐겁게 하고 계신 일은 무엇인가요?
제가 좋아하는 일 중에 하나가 좋은 내용을 발굴해서 모든 사람이 좋아하며,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좋은 퀄리티의 책을 만드는 것입니다. 『회수아물』이라는 책은 작업하는 데만 5년이 걸렸는데요. 저와 저자, 출판사간에 서로 안 맞는 부분을 맞물려 가면서 만들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마음에 드는 작품이 나왔죠. 아쉬운 점이 있다면 가격이 너무 비싸다는 겁니다. 책은 사람이 보기 위한 것이지, 유리창 안에 전시되기 위한 것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제가 출판사에 조건을 하나 내걸었어요. 제 소개로 책을 사는 사람에게는 45% 할인한 가격으로 팔라고(웃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좋아하고, 또 구매했습니다.
Jungle : 작품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제 작품들은 대체로 아쉬움이 많이 남는데요. 그래도 하나를 뽑는다면 『중국의 기억』 이라는 책을 꼽겠습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위해서 만들어진 책인데 내용, 인쇄 상태, 바인딩 등 모든 것이 완벽하게 나와서 절판이 되었죠. 이번 전시에서는 전시장 안에 있어서 사람들이 안을 들여다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쉬운데요. 중국의 외교 사절들이 다른 나라의 귀빈들에게 중국을 대표하는 책으로 선물할 수 있게 만들어졌어요. 정교하게 포장이 되어 있는 것은 국가에서 선물을 드릴 때 사용하는 용도이고, 간편하게 포장된 책은 일반인들도 사서 볼 수 있는 책입니다.
Jungle : 어제(8월 29일) 열린 포럼에서 하라 켄야 선생은 “타이포그래피가 아름다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이 타이포그래피를 더 잘 느끼게 해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타이포그래피가 어떤 가치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일반적으로 예술가가 쓴 글자를 타이포그래피라고 하는데, 사실 누구나 타이포그래퍼가 될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글씨를 쓴다면 누구나 멋진 타이포그래피를 쓸 수 있죠. 디자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글자를 쓸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쓰냐가 더 중요합니다. 제가 사사 받았던 스기우라 고헤이 선생님은 “글자는 그 글자의 정신과 혼을 담아 써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중국에 대대로 내려오는 서예도 이런 정신을 담고 있어요. 조상들의 필체를 따라서 쓰는 것이 서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쓰는 사람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쓰느냐 하는 것이거든요. 따라서, 글자는 기본이 되는 가독성과 글자 자체의 미감, 사람들의 감정을 담아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Jungle : 한중일은 언어가 달라 타이포그래피 문화도 다릅니다. 이번 타이포잔치가 한중일의 타이포그래피를 서로 이해하는데 어떤 역할을 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한중일이 다 같이 밥을 주식으로 하는 것과 같이, 같은 문화권에 있어 동방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생활 습성이나 가치관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서양의 기준으로 보면 우리 동양 3국은 매우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세 국가 모두가 각기 다른 문화를 갖고 있죠. 중국의 한자는 네모글자이고, 일본의 글자는 네모글자에 히라가나, 가타가나가 융합되어 나온 문자이며, 한국의 글자는 작은 자모들이 구조를 이루어 만들어진 글자입니다. 저는 이렇게 다른 각자의 개성을 표현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저는 사실 국제화에 반대하는 사람인데요. 예술은 개성이 있어야 의미가 있는데 국제화가 되면서 그 개성이 사라진다면, 예술의 의미가 없어진다고 봅니다. 안상수 선생님은 2003년 이코그라다(ICOGRADA; 국제그래픽디자인단체협의회) 총회 강연에서 ‘우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는데요. 저도 이에 동의합니다. 같으면서도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예술의 큰 표현 방법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타이포잔치처럼 한자리에서 한중일 3국의 서로 다른 작품을 보면서, 서로의 다른 점을 대비해서 보는 기회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중국 사람에게는 한글이 신기한 글자여서 항상 신선함을 느낍니다. 일본 역시 한자를 쓰고 있지만 외래어를 많이 사용하고, 글자체도 달라서 중국과 다른 부분이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 문화는 겹쳐져 있는 것이라 서로 공유하고 있는 부분이 많죠. 타나카 잇코 선생님 작품이 일본 한자로 한국의 문화를 표현하고 중국의 문화도 표현하는 것처럼 문화는 문자를 떠나 함께 공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타이포잔치가 제가 한국인이던 중국인이던 일본인이던 자만하지 말고 우리의 생을 바쳐서 서로의 미흡한 부분을 좋은 부분으로 메우는 자리 같습니다. 저는 중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일본의 미에 대한 가치관과 사람에 대한 태도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런 부족했던 부분들을 채워 넣고 다른 것과 섞어 작품에 나타냈죠.
사실 어제 하라 켄야 선생님이 보여준 이미지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기와장식 같은 원형의 문양이었는데요. 문양 하나를 조금만 변형시켰을 뿐인데도 한중일이 하나로 묶여지는 이미지가 놀라웠습니다. 우리는 다르지만 어쨌든 같은 동양으로 묶여 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까요. 믿건대, 서양 사람들은 이런 디자인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교류하면서 부족한 점들을 보완해나가 큰 둘레가 생기면 이것이 동양이 되는 것이겠죠.
Jungle :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하지만 다른 언어 때문에 관람객의 입장에서 선생님의 작품을 어떻게 봐야 할지 난감하기도 합니다. 선생님의 작품에 있는 글자를 글자가 아닌 이미지로 받아들여도 되는 것입니까?
제가 한글을 봤을 때도 글자가 아니라 도형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정보는 단어를 읽는 것을 떠나 색깔이나 형태 등 모든 부분이 말해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작은 아이가 말을 못한다고 해서 그 아이가 보고 느끼는 것이 없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말을 못해도 내면에서는 이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겠죠. 중국에서 자주 하는 이야기 중에 ‘적당한 거리감이 아름다움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모든 글자를 다 이해하고 본다면 그리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어요(웃음). 서양에서는 무조건 Yes 혹은 NO, 흑과 백의 두 상태로 갈라져있지만 동양은 예로부터 혼돈의 상태에서의 미를 강조하기 때문에 작품의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고 보기 보다는 알 듯 말 듯 한 경계에서 보면 더욱 아름다워 보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