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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인터뷰

디자이너 석상호

2012-02-08


자동차 디자이너가 한글을 연구한다? 언뜻 어색하게 들리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 기아자동차 선행디자인팀 디자이너 석상호를 소개한다. 자동차의 미래를 그려내면서 동시에 한글에 대한 남다른 애정으로 연구 활동을 지속해온 그는 최근 ‘세로쓰기’라는 오래된 한글 표기 방식에 다시 주목한다. 디지털 시대, 스마트 기기를 위한 새로운 유저인터페이스의 가능성을 ‘세로쓰기’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에디터 | 길영화(yhkil@jungle.co.kr)


Jungle : 현재 기아자동차에서 근무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네. 기아자동차 선행디자인팀에 있습니다. 주로 컨셉카나 모터쇼에 출품하는 차량들에 대한 디자인 개발 업무를 합니다. 유저인터페이스, 컬러, 소재, 외관 등 차량 내외부에 걸쳐 미래의 기아자동차를 설계하고 있는 셈이죠. 지난해 광주비엔날레나 서울디자인페스티벌에서 선보였던 ‘기아 디자인 아트웍스’ 전시 같은 작업도 저희 팀에서 하고 있습니다.

Jungle : 자동차 디자인 연구를 하시다가, 한글 세로쓰기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자동차 유저인터페이스를 연구하다 보니, 곧 네비게이션 같은 차량 정보기기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스마트폰 등의 개인 스마트 기기가 대신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용자 입장에서는 자기가 쓰던 익숙한 애플리케이션이나 UI를 어떤 자동차에서든 쉽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보통 우리는 스마트폰을 세워서 사용하잖아요. 세운 스마트폰의 화면은 글자 정보들을 효율적으로 담기에는 좁다는 단점이 있죠. 이 단점을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까 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것이 한글의 전통 쓰기 방식인 ‘세로쓰기’ 였던 거죠.

Jungle : ‘세로쓰기’가 ‘가로쓰기’에 비해 사용성이 좋다는 뜻인가요?

‘세로쓰기’가 ‘가로쓰기’보다 낫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스마트기기들을 얼마든지 가로로 눕힐 수도 있는 것이고요. 다만 지금의 ‘가로쓰기’에서 ‘세로쓰기’를 적절하게 병행할 수 있다면, 보다 뛰어난 주목성과 사용성을 가져올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용자들에게 UI 선택의 폭도 넓혀줄 수도 있고요. ‘세로쓰기’라고 타이틀을 내세우다 보니 사람들이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번 연구는 스마트폰 시대에 ‘세로쓰기’의 장점을 재조명해보자는 것이지, 어느 쪽이 인식이 편하다거나, 사용성이 좋다거나를 평가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Jungle : ‘세로쓰기’ 표기 방식이 가진 장점은 무엇인가요?

우선 한글 자체가 ‘세로쓰기’ 시대에서 그에 맞게 태어난 문자입니다. 그렇기에 어떻게 보면 ‘세로쓰기’에 더 적합하게 설계된 문자라고 볼 수도 있겠죠. 익숙한 ‘가로쓰기’에 비해 가독성이 좋지 않을 거라는 의견도 있는데, 사실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모아쓰기’ 방식인 한글에서 ‘가로쓰기’는 일정한 간격을 유지해야 인식하기 편한 반면, ‘세로쓰기’는 글자 구분이 확실하기 때문에 간격과 상관없이 인식 속도가 빠르죠. 또한 한글 모음의 획도 수직성이 강해 좌우 보다는 상하로의 눈의 이동이 좀 더 자연스럽습니다. ‘가로쓰기’와 ‘세로쓰기’의 가독성 문제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꾸준히 논란이 되었던 문제이기도 한데, 지금 디지털 시대에서는 두 가지 방식이 충분히 병행으로 쓰이면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고 봅니다.

Jungle : 자동차 디자인에도 ‘세로쓰기’ UI가 적용 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일단은 스마트폰에 특화되어 있지만, 자동차 디자인에도 적용할 수 있도록 제안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헤드업 디스플레이(HUD)를 생각해 볼 수 있겠죠. 투명 OLED 기술이 발전됨에 따라 주행정보들이 차츰 자동차 앞유리로 올라오고 있잖아요. 속도계라든지 엔진 RPM, 혹은 네이게이션 정보들이 이제 운전자의 시선과 같은 선상에서 보여지게 되는 거죠. 이때 정보에 따라 ‘세로쓰기’의 UI가 ‘가로쓰기’와 병행되어 활용된다면 보다 주목성이나 가독성이 향상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차츰 테블릿PC와 융합되어 탈부착이 가능한 형태로 진화되는 자동차의 센터페시아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운전자는 수시로 시선을 상하로 움직이면서 계기판, 센터페시아, 전방을 살펴봐야 하는데, ‘세로쓰기’를 적용하면 시선의 방향과 정보 표기의 방향이 일치되어 인식 및 조작 속도의 향상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죠.

Jungle : 그렇더라도 요즘 사람들에게는 아무래도 가로쓰기가 익숙할 텐데요. 세로쓰기 UI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을 따로 살펴보신 적은 있는지.

작년 서울디자인페스티벌에서 세로로 쓴다는 의미가 담긴 ‘세로운 UI’라는 이름으로 실제 크기 아크릴 모형(mock-up)을 선보였었습니다. 당시 한글을 주제로 한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고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많은 사람들이 흥미로운 반응을 보였었죠. 특허를 출원한 것인지 물어보는 이도 있었고, 자사 네트워크에 한번 적용해 보고 싶다고 자료를 요청하시는 분도 있었고요. 전반적으로 재미있다는 의견들이 많았습니다.

그전에 논문을 준비하면서 설문조사를 하기도 했어요. 화면 레이아웃이나 별다른 디자인 없이 단순하게 세로표기와 가로표기 방식에 대한 선호도를 조사한 것이 었는데,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었죠. 설문 대상 100명 중 54명이 세로표기 방식이 더 읽기 편하다는 대답이었습니다.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가로표기보다 높은 선호도였죠. ‘글씨가 또렷하다’, ‘문장 연결이 편하다’, ‘한 눈에 들어온다’, ‘문장 간격이 넓고 편리해 보인다’ 등이 세로표기를 선택한 이유였습니다. 우려했던 것보다 ‘세로쓰기’에 대한 거부감이 크지 않았던 거죠.

Jungle : 기아자동차 사내에서의 반응은 어땠나요?

일단 ‘세로쓰기’는 회사와는 별개인 개인적 연구입니다. 동료 디자이너들은 재미있어 하고, 자신들도 이런 연구를 하고 싶어하죠. 디자이너들에겐 자기가 하고 싶은 디자인에 대한 욕심들이 있잖아요. 아무래도 회사 프로젝트에서는 개인적 욕심을 드러내기 쉽지 않으니까. 제 작업이 그들에게 자극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Jungle : 대기업 디자이너로 있으면서 이런 개인적 연구를 진행하는 것이 쉽지 만은 않았을 것 같은데.

네, 아무래도 회사 업무와는 별개로 해야 했으니까요. 한글이 아니더라도 개인적인 연구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었어요. 사실 기업에 소속된 디자이너들은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쉽지 않잖아요. 저도 그랬고. 10년째 디자인을 하다 보니, 디자이너로써 이름이 알려지고 싶은 욕심이 있었죠. 그래서 개인적인 연구를 시작했고, 그것의 주제가 한글이 되었던 것입니다. 업무시간 이외에는 자료조사, 설문조사, 논문 등 온통 연구작업에만 매진했죠. 앞으로도 개인적인 연구는 다양하게 계속 이어갈 예정입니다.

Jungle : 마지막으로 향후 계획이 있다면.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먼저 ‘세로쓰기’ UI에 적합한 폰트를 개발하고 싶어요. 사실 한글은 처음부터 인식하기 쉽게 설계된 문자로 어느 폰트를 써도 가독성에 크게 차이가 나진 않아요. 다만 ‘가로쓰기’에 최적화된 문장 부호나 특수 문자 같은 경우 ‘세로쓰기’에서는 어색한 경우가 많죠. 훈민정음을 재해석하여 물음표나 느낌표 같은 외국 문장기호들은 다시 디자인 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해요. ‘세로쓰기’ 환경에서 단순하면서도 흐름이 자연스럽도록. 저 혼자서는 아무래도 힘든 일이 될 것이고, 폰트전문기업과 함께 작업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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