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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인터뷰

디자이너 이상혁

2013-06-13


누가 봐도 디자이너다. 그런데 작업 방식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면, 예술의 과정과 무척 닮아 있다. 이상혁의 작품들이 그렇다. 그에게 있어 디자인은 보다 편리한 생활을 위한 문제 해결보다 자신의 생각을 구현해 내는 것이 먼저다. 2000년대 초반 디자인을 전공하던 대학시절부터 상업성 보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예술적 작품성에 관심이 더 컸었고, 심지어 진로를 예술 쪽으로 옮길까도 고민했던 그였다. 그리고 그 고민은 그의 발걸음을 유럽으로 향하게 했다. 상업적 생산구조가 아닌 하나의 작품으로도 디자인이 충분히 가치를 인정 받고 있는 시장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에디터 | 길영화(yhkil@jungle.co.kr)
사진제공 | STUDIO LEE SANGHYEOK(http://leesanghyeok.com)

이상혁은 네덜란드 디자인 아카데미 아인트호벤(Design Academy Eindhoven)에서 ‘Man and Living’을 전공했다. ‘Man and Living’은 인간과 생활을 총체적 관점에서 다루는 학사과정으로 그는 이 곳에서 인간과 사물의 관계 속에서 디자인을 다루는 방식을 배워나갔다. 이후 졸업을 하고 나서는 독일 베를린으로 거처를 옮겼다. 소규모 갤러리서부터 여러 대학들까지 도시 곳곳에서 예술 행사가 끊이지 않는 베를린의 에너지가 그의 마음을 이끌었다. 다양한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작업들을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는 매력은 이상혁의 베를린 생활을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만들고 있다.

이상혁은 손의 감각을 좋아한다. 디자인에 있어서도 손으로 느낄 수 있는 것들에 대한 고민과 실험을 중요시한다. 디자인, 그것도 가구에 있어 손의 감각이라고 하니 언뜻 재료의 질감이 떠올려 질 법하다. 그러나 이상혁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을 보면, 그의 고민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난해 독일 쾰른 국제가구박람회 [D³] 콘테스트 2위 수상으로 알려진 작품, ‘Listen to your hands’. ‘당신의 손에 귀 기울여요’라는 감성적 이름을 가진 이 테이블이 손에 주는 감각은 나무의 재질에서 나오지 않는다. 공기의 압력이다. 손으로 느껴지는 무언가를 만들고 싶어 했던 이상혁의 많은 고민이 공기의 압력으로 실재화 된 것이다. 설명하자면 이렇다. 테이블 위에 서랍장들이 뭉쳐 올려져 있는 형태의 작품으로 각 서럽들은 서로 공기를 공유하며 연결되어 있다. 때문에 서랍들 중 한 곳을 닫으면 그 속의 공기가 압력을 받아 다른 서랍이 밀려 열리게 된다. 이 과정 속에서 보이지 않는 공기의 힘을 고스란히 손의 감각으로 느낄 수 있다. 서랍을 닫는 속도에 따라 손에 전달되는 공기의 느낌과 책상의 반응은 달라지게 된다. 만약 모든 서랍을 닫고자 한다면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서랍을 밀어야만 한다. 이상혁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가구와의 소통이라고 말한다. 일상 생활에서 가구와 어떻게 대화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가구, ‘Useful Arbeitsloser(유용한 실업자)’는 이상혁 자신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작품이다. 베를린에 온 지 얼마 안되어 만난 한 공사 현장의 ‘비계’가 모티브였다. 공사할 때 꼭 필요한 것이면서도, 사람들의 관심은 받지 못하는, 그리고 결국엔 사라져야만 하는 임시가설물 비계. 이상혁은 그 모습이 외국의 낯선 환경에 놓인 자신의 처지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스스로를 필요한 존재라고 믿지만 말도 통하지 않는 이 곳에서 그는 영락없는 이방인이었고, 사회가 내려 준 신분의 정의도 직업이 없는 실업자였던 것. 다시 말해 소속감과 정체성 혼란을 겪는 디자이너 혹은 예술가의 삶을 반영하는 작품인 셈이다. ‘유용한 실업자'는 황동의 조인트로 연결되는 조립식 가구로 실내 벤치나 책장, 책상으로의 변신이 가능하다. 이상혁의 말에 따르면, 조인트는 곧 디자이너의 삶의 무게고, 그것을 돌리는 행위는 조여질수록 가구가 안정되듯 편안함을 만들어 가는 삶의 과정을 표현한다고 한다.

두 작품에 앞서 2009년에 선보였던 ‘MeChair(미체어)’는 획일화 된 대량 생산 디자인에 거부감을 가지던 이상혁의 생각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가구다. 기울어진 한 쪽 팔걸이와 여기저기 꺾여있는 각도, 미체어는 이름 그대로 ‘나'만을 위해 제작된 가구다. 인간 신체 표준을 기준으로 제작된 것이 아니라 사용자의 앉는 습관이나 자세를 계산하여 만든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의자다. 이처럼 사람과 의자, 둘의 관계가 적극적 소통으로 이뤄지는 미체어에서는 앉는 경험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사물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이상혁에게 디자인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만은 아닌 듯 싶다(실제로 그의 베를린 생활은 여전히 아르바이트를 해야 유지된다고). 물론 판매가 되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표현하는 방식이라고 보는 것이 더 어울린다. 시인이 시로써, 화가가 그림으로써 자아의 존재를 알리듯, 디자이너인 그는 디자인으로써 말하고 있는 것 뿐이다. 가구에 말을 걸듯이 소통하면서.

* 현재 이상혁의 ‘당신의 손에 귀 기울여요’와 ‘유용한 실업자'는 금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NEW WAVE: FURNITURE AND THE EMERGING DESIGNERS’展(6월 30일까지)에서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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