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전체보기

분야별
유형별
매체별
매체전체
무신사
월간사진
월간 POPSIGN
bob

컬쳐 | 월드리포트

타이캉루에서 디자이너로 먹고살기

김은양통신원 | 2008-05-13




오랜만에 맞는 휴일 아침, 황금 같은 늦잠을 반납하고 타이캉루(泰姜路)를 찾은 이유는 요즘 들어 종교처럼 숭배되고 있는 브런치 약속 때문이다. ‘섹스 앤 더 시티가 아니었다면 느지막이 일어나서 자장면이나 시켜먹었을 텐데상하이의 메디슨 에비뉴-미국 뉴욕의 광고회사가 모여 있는 거리-라 불리는 찐궈시루 한쪽 작은 길, 미리 알고 찾아가지 않고서는 그냥 지나칠 법한 소박한 입구 안쪽에 디자인 골목이 자리하고 있다.



 


취재 ㅣ김은양 상하이 통신원



 


중국 상하이 시는 개발이 본격화되던 1990년대 몇몇 골목을 특성화했다. 그 골목 중 가장 유명한 곳이 이국적인 먹자 거리 신톈디(新天地) 그리고 오늘 소개할 디자인 특화 거리 타이캉루(泰康路)이다. 모간산루(莫干山路)가 예술인들이 자생적으로 모여 만들어진 예술 공간이라면 타이캉루는 개발과 사업에 의해 만들어진 디자인 거리라고 볼 수 있다. 같은 프로그램으로 개발되긴 했지만 타이캉루에는 신톈디의 화려함이나 세련됨, 이국적인 느낌과는 다른 소박함이 있다.



 


패션, 공예, 사진, 미술 등 다양한 분야의 디자이너들이 모여 작업실과 숍을 운영하고 있다는데, 막상 골목으로 들어서니 작업실이자 상점인 곳들이 세상 카드란 카드는 모두 긁을 수 있다는 듯 가맹점 스티커를 쇼윈도에 붙인 채 균일가 행사를 하고 있다. 또 디자인 거리인지 먹자 골목인지 헷갈릴 정도로 여기저기 의자와 테이블을 끌어내 놓고 음식을 팔고 있다.



타이캉루 골목 안쪽, 비교적 넓은 공간에 자리잡은 노천 카페에는 각종 얼굴색의 사람들이 각기 자국어로 떠들고 있다. 먼저 온 친구들과 카페 한쪽에 자리를 잡으니 고소한 커피 향과 휴일 오전의 여유로움이 밀려왔다. 게다가 정성스럽게 포장돼 나온 샌드위치와 푸짐하게 끓여낸 스프 그리고 상하이의 봄철 더위를 부드럽게 잡아버릴 생맥주는 디자인 거리에 음식점만 가득하다고 투덜댄 것이 무색할 만큼 훌륭했다. 신톈디처럼 높은 가격에 전문적인 맛은 아니지만, 타이캉루만의 소박한 정성이 담겨 있다. 나는 음식을 먹으며 초보 디자이너의 정성과 설레는 마음을 느꼈다. 브런치에 대한 만족은 타이캉루를 다시 보게 만들었다.



메인 거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은 실크 전문 상점은 유명세답게 북적거렸지만, 점원이 다가와 상품 하나하나의 디자인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준다. 세상에 하나뿐이고 많은 이야기를 담은 스카프는 선물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그 외에도 소수민족 공예를 선보이는 스튜디오나 도자기 공방, 전통 의류부터 현대 의상까지 선보이는 의상실, 고전가구점, 사진스튜디오, 팬시제작실과 상점, 인도미술, 인테리어설계 등 이곳에는 다양한 공간이 펼쳐져 있다. 그중 한글로 쓰인 북한의 공작 포스터가 당장이라도 큰 일을 낼 듯한 문구로 의기양양하게 걸려 있어 눈길을 끌었다.


 


중국이라는 짝퉁 천국의 나라에서 디자이너로 살아가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 찐궈시루에서 광고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 사람들, 상위 1%를 위한 고급 상품을 만들어내고 있는 디자이너들, 세계를 무대로 뛰고 있는 중국의 디자이너들보다 여기 타이캉루에서 보통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는 이들의 소박함이 더 기분좋게 다가온다. 골목마다 주렁주렁 걸려 있는 빨래는 이곳 디자이너의 삶을 더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디자이너는 디자인을 팔아야 하고 그 디자인을 사람들이 좋아해줘야 한다. 온갖 카드를 받아주기도 해야 하며, 별로 내키지 않아도 가끔 균일가 행사를 해야 한다. 그래서 배곯지 않아야 하며, 오랜 작업으로 몸이 뻐근하면 요가나 쿵푸로 몸을 풀기도 해야 한다.





나는 자기 고집만으로 장인정신을 지킨다는 사람들보다 이곳 디자이너들이 더 순수해 보인다. 한국에서 밤낮 가리지 않고 작업에 매진하느라 목 디스크로 고생하는 디자이너들에게 상하이 마사지와 타이캉루를 추천한다. 이국적 느낌과 중국 특유의 이미지가 교묘하게 짬뽕된 상하이 스타일을 만끽할 뿐만 아니라 중국 디자이너들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facebook twitter

당신을 위한 정글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