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원 독일통신원 | 2008-09-17
19세기 영국 공예운동을 주도한 수공예 책의 최고 명장 윌리엄 모리스는 책이야말로 인생의 마지막 예술적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생애 말년에 헌신을 다했던 출판사에 그는 켐스콧(Kelmscott)이라는 이름을 바쳤다. 켐스콧은 본래 작은 시골 마을의 이름이다. ‘이상적인 책’에의 소망이 켐스콧 출판사(Kelmscott Press)에서 이루어졌다면, ‘이상적인 집’에의 꿈은 켐스콧 마을에서 실현되었다. 그는 이곳의 오래된 시골집을 ‘진정한 집’의 원형으로 늘 마음 속에 소중히 간직하며, ‘지상의 천국(heaven on earth)’이라 불렀다. 여름날 꿈속같은 모리스의 천국. 영국의 전원 켐스콧으로 떠나본다.
취재 ㅣ
멀리 템즈강 하류의 강물이 구불구불 느리게 흘러가는 넓은 들판 사이에 켐스콧 장원(Kelmscott manor)은 자리잡고 있다. 이 강에서 수영을 하면서 윌리엄 모리스의 두 딸들은 꿈같은 어린 시절의 여름날을 보냈다. 그들 가족 모두에게 이곳은 평화로운 전원의 이상향이었다. 그들은 평생 이 소박한 석조가옥과 그 일대를 사랑했고, 그와 그의 아내 제인, 둘째 딸 메이는 죽을 때까지 여름저택인 이곳을 오가면서 살았다.
켐스콧 장원은 모리스 가족이 살았던 저택을 비롯하여 몇몇 건물들이 모여있는 구역을 부르는 이름이다. 장원(manor)은 대개 중세에 지어진 영국 전원의 개인 저택과 그 주변의 조그만 영지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켐스콧 장원의 저택은 본래 토지를 소유한 자영농이자 소지주 계급인 요우먼(Yeoman) 가족이 17세기에 살았던 집이었다.
켐스콧 장원과 켐스콧 하우스, 켐스콧 출판사는 서로 멀리 떨어진 장소에 위치하면서도, 이름이 같아서 전문서적에서조차 종종 혼란이 유발되기도 한다. 켐스콧 장원은 켐스콧 마을에, 켐스콧 하우스와 켐스콧 출판사는 런던의 해머스미스에 있다. 켐스콧은 런던의 서쪽 옥스포드셔(Oxfordshire)의 두 도시, 레치레이드(Lechlade)와 패링던(Faringdon) 사이에 위치하며, 대학도시 옥스포드로부터는 30여 마일 떨어져 있다. 옥스포드에서 패링던까지 버스를 타고 전원의 들판이 끝없이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택시를 타고 달리다 보면 켐스콧에 도착한다.
켐스콧 장원은 개방하는 날이 일년에 며칠 되지 않아 사전에 개방 시간을 잘 알아보지 않으면 낭패를 보기 쉽다. 이곳은 4월부터 9월까지 개방되며 매주 수요일과, 셋째 주 토요일 오후에만 일반인에게 공개된다.
켐스콧 장원 외에도 윌리엄 모리스와 관련한 특히 중요한 장소로는 월섬스토, 레드하우스, 켐스콧 하우스와 출판사를 꼽을 수 있다. 월섬스토(Walthamstow)는 윌리엄 모리스가 태어나서 소년기를 보낸 곳이다. 그가 살았던 집은 현재 윌리엄 모리스 갤러리로 사용되고 있다.
켄트의 레드하우스(Red House)에서는 제인과의 신혼생활이 시작되었다. 윌리엄 모리스는 정성을 들여 마련했던 이 아름다운 집을 6년 만에 떠났다. 이 집에서 두 딸이 태어났지만, 그가 아내와의 관계에서 뼈저린 아픔을 겪은 곳이기도 했다.
윌리엄 모리스와 그의 가족들은 1871년 옥스포드셔의 켐스콧 장원으로 이주했다. 이 시골집은 모리스 가족 모두에게 영원한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켐스콧 장원은 여름에는 천국과 같은 곳이었지만, 오래된 집이라서 난방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윌리엄 모리스 일가는 또다른 주거지를 찾아야 했다. 그들은 런던의 서북부 해머스미스의 어퍼몰에 위치한 집으로 이사했다. 그 이후로 켐스콧 장원은 그들의 여름별장처럼 사용되었다. 윌리엄 모리스는 켐스콧 장원에 대한 애정의 표시로, 새로 옮긴 집의 이름을 켐스콧 하우스(Kelmscott House)라 불렀다. 1891년, 이 켐스콧 하우스로부터 불과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그는 켐스콧 출판사(Kelmscott Press)를 설립했다. 윌리엄 모리스가 살았던 이 모든 아름다운 집들 가운데, 켐스콧 장원은 모리스다운 감성이 가장 짙게 감지되는 곳으로 꼽힌다.
윌리엄 모리스의 공상소설 <유토피아에서의 소식, 혹은 안식의 시대(News from Nowhere : Or, an Epoch of Rest)>의 속표지에는 켐스콧 장원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소설에는 이상적인 세계에 대한 모리스의 개인적인 견해가 담겨있다. 윌리엄 모리스 소설의 제목 속 Nowhere는 곧 유토피아이며, 그에게 있어 켐스콧 장원의 집이야말로 안식과 유토피아적 이상이 성취되는 곳임을 알 수 있다.
이 집은 17세기 엘리자베스 양식으로 지어진 오래된 석조가옥이다. 소박한 성품을 가진 모리스의 취향에 맞게 검소하면서도 아름답다. 건물의 외벽과 지붕에는 이 지역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석회암이 자재로 사용되었다. 이 돌의 거칠고도 따뜻한 느낌은 훗날 켐스콧 출판사 책들의 수제종이가 가지는 우둘우둘한 도타운 질감을 연상하게 한다.
중세적인 구간계획을 보여주는 켐스콧 장원 내 여러 농가 건물들은 색색 꽃과 열매들이 어우러져 명랑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농가의 마구간은 방문객을 위한 기분좋은 휴식을 제공하는 공간으로 개조되었다. 여기서는 세련된 런던의 분위기와 색다른 전원적인 애프터눈 티타임을 즐길 수 있다.
켐스콧 저택의 내부는 윌리엄 모리스가 살았던 빅토리아 시대에 유행했던 어둡고 육중한 전형적인 실내에 비해, 밝고 경쾌하며 편안하다. 윌리엄 모리스의 침실에는 그가 쓴 시 <켐스콧의 침대에(For the bed at Kelmscott)>가 수놓아져 있다. 이 시에는 만년의 모리스가 켐스콧 장원에 품었던 깊은 애정이 구구절절 담겨 있다.
윌리엄 모리스는 아내의 마음을 얻지 못한 결혼생활이 지속되자(아내 제인이 사랑했던 남자는 로세티였다.) 6주간의 아이슬란드 여행을 떠났다. 그는 여행을 통해 마음의 고통을 떨치고 돌아온다. 이 집은 모리스에게 한층 위안을 주는 곳이 되었다. 모리스는 특히 이곳의 명랑한 정원을 마음에 들어 했다. 정원은 그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모리스는 인간의 삶에 함께 하는 모든 예술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믿었다. 켐스콧 저택의 실외 정원에서 생생하게 살아있는 식물들이, 실내에서는 직물의 문양과 패턴으로 새롭게 피어나있다. 이 정원의 식물과 덩굴, 꽃과 열매들을 구경하다 보면 윌리엄 모리스의 무수한 작품들이 하나 둘 연상되곤 한다.
윌리엄 모리스의 인생과 예술 여정의 최종 종착지인 책 속에도 식물들의 향연은 이어진다. 아칸서스, 포도, 꽃 등이 테두리와 이니셜 문자를 풍성하게 장식한다. 모리스가 만든 책의 생명력은 이런 형태감에 더불어, 두드러지는 촉각성에 있다. 까칠하고 두툼한 종이의 감촉, 풍요롭고 따사로우며 새까만 깊이를 담으며 꾹꾹 인쇄된 먹의 빛깔. 재질의 따뜻한 생명감이 책의 실체 속에서 만져진다. 독서란 몸과 책이 서로 반응하는 공감각적 향유의 시간이다. 윌리엄 모리스가 만든 책을 읽을 때에는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 시간이 멈춘듯한 켐스콧 시골 마을에서처럼.
윌리엄 모리스는 켐스콧 출판사의 책들을 위해 많은 이니셜을 제작했다. 이니셜 ‘Empty’는 그가 죽음을 맞이하기 불과 몇 주전에 제작되었다. 그칠 줄 모르는 창조력이 격렬하게 넘쳤던 그의 인생에서 마지막 사력을 다 발산한 작업이다. 이 이니셜은 마치 구체시 같다. 생전에 시인으로 더 유명했던 그의 다른 어떤 시보다도 시각적으로 함축성을 강하게 품고 있다.
비어있다고(empty) 말하면서 실제로는 뭔가 꽉 차있는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퍽 역설적이다. 이 역설은 인생을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마치 그의 꿈과 삶을 요약하는 듯 하다. 그는 언제나 이상향을 바라면서도 모순 가득한 빅토리아 시대의 현실에 뛰어들었다. 가난한 사람도 높은 질의 생활을 누리기 바라는 사회주의자였지만, 상류층 부자들만 향유할 수 있는 생산물을 만들어냈다.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치며 미래의 귀감이 되었지만, 동시에 시대를 역행하여 과거의 예술에서 답을 찾았다. 사회적 계층이 높은 신사였지만, 수작업 노동을 꺼리지 않았다. 시인이면서 사업가였다. 스스로 ‘한가히 노래하는 자’라고 하면서도, 열 사람 몫의 일을 해냈다. ‘꿈을 꿈꾸는’ 낭만주의자였지만, 윌리엄 모리스는 누구보다 사랑했던 아내 제인에게서만은 끝내 사랑을 얻지 못했다.
1896년 그는 평온하게 생애를 마감했다. 사람들은 윌리엄 모리스를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시인의 코너’에 안장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친구들이 이 제안을 거절했다. 모리스는 분명 검소한 무덤을 원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켐스콧 마을의 작은 교회 뜰에서 안식을 취하게 되었다. 아내 제인과 두 딸들이 그의 곁에 나란히 잠들어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켐스콧은 그 가족들의 영원한 집으로 남았다.
켐스콧 마을 어귀 윌리엄 모리스 추모의 집(Memorial Cottage)에는, 켐스콧 장원 서쪽 풀밭 나무 둥치에 앉아있는 그의 모습이 부조로 새겨져 있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캠스콧 저택과 닭, 비둘기, 비둘기집의 풍경은 오늘에도 그 모습 그대로다.
그는 아름다움을 독차지하기보다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누리고 싶어했다. 사람들이 자본주의적 물질의 풍요 속에서보다는 아름다운 곳에서 잘 살기를 바랬다. 윌리엄 모리스가 평생 바라던 그러한 '지상의 천국'은 이곳 켐스콧 장원에서 꿈처럼 펼쳐져 있다.
* <켐스콧의 침대에(For the bed at Kelmscott)>1891, <지상의 낙원(The Earthly Paradise)> 1869 에서 윌리엄 모리스의 시구절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