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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 | 월드리포트

이야기를 그리는 사람들, 영국의 그림책

김지원 런던 통신원 | 2009-06-30




영국의 장난감 가게에 가면 약 백 년 전쯤 작은 책 속에서 태어난 피터(Peter Rabbit, 1902)라는 토끼가 그의 친구들과 함께 있고, 그 곁에 예의 바른 패딩톤(Paddington Bear, 1958) 씨도 나란히 앉아 있다. 또한 런던에서 조금 떨어진 하트필드(Hartfield)에 가면 이미 세계적인 스타가 된 푸우(Winnie-the-Pooh, 1926)가 크리스토퍼와 함께 놀았다던 작은 마을에서 산책을 즐길 수도 있다. 런던에선 바람이 부는 날이면 어린이들이 자라는 어느 집에 메리 포핀스(Mary Poppins, 1934)가 불쑥 날아들지도 모르니 항상 하늘을 보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글•사진 김지원 런던통신원 | 에디터 박현영


영국의 그림책은 산업화에 의한 대량 생산과 그에 반발하며 부흥한 수공예 생산이 양립하던, 가장 풍요롭고 화려했던 빅토리안 시대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사진술의 발달이 가져온 옵셋 인쇄 기술의 실현과 오랜 장인정신(Craftsmanship)에서 비롯된 미술 공예 운동(Arts and Crafts Movement)에 담긴 미학은 예술과 기술의 절묘한 결합을 이루어 내었으며, 예술 제본 방식의 고안과 캘리그래피 및 목판 기술의 발달을 촉진시키며 아름다운 그림책들을 탄생시켰다.

케이트 그린어웨이(Kate Greenaway)와 베아트릭스 포터(Beatrix Potter)가 이 시기에 활동했던 대표적인 작가들이다. 섬세하고 아름답게 표현된 그린어웨이의 그림책은 이 시기 상류 계층들에게 커다란 매력으로 다가왔음은 물론, 가장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가정의 전형이 되었다. 유일하게 일러스트레이터에게 수여되는 케이트 그린어웨이 메달(The Kate Greenaway Medal)은 그녀의 이 같은 공헌을 기념하기 위해 1955년에 만들어졌다. 그녀가 장식적인 스타일을 추구하고 글에 시적인 리듬을 부여했다면, 포터는 글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에 스토리를 담아냄으로써 생동감 있는 이야기 그림책을 탄생시켰다. 피터 래빗(The Tale of Peter Rabbit)은 그녀가 만든 첫번째 어린이책이자 백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전세계에서 판매되는 베스트셀러다.


빅토리안 시대가 저물고, 위축되었던 그림책이 다시 활기를 찾은 것은 1960년 대에 들어서부터다. 특징적으로 다양한 표현기법의 시도, 작가의 주관적 견해 안에서 서민들의 삶을 직접적으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그 선두에 섰던 찰스 키핑(Charles Keeping)과 브라이언 와일드스미스(Brian Wildsmith), 존 버닝햄(John Burningham) 그리고 쿠엔틴 블레이크(Quentin Blake)는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작가들이지만 서로 다른 시각을 가졌던 영국을 대표하는 그림책 작가들이다.

가장 런던적인 삶을 표현한 키핑은 초기의 강렬한 색감과 제멋대로 그려낸 듯한 이미지 대신에 일렁이듯 그려나가는 브라운 톤의 담담한 선으로 런던의 애환을 담아낸다. 이와는 달리 아름다운 그림책은 어린이의 시각적 인식 능력을 형성시키는 것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믿었던 와일드스미스는 온통 회색 빛이었던 도시에 생동감 넘치는 색을 칠하며 조형적 즐거움을 선사한다. 또한 글의 깊은 이해와 분석에서 비롯된 다양한 스타일의 구사와 독창적인 캐릭터 개발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가는 버닝햄의 그림에는 꿈 많고 자유로운 아이의 천진함이 그대로 담겨 있다. 간결하지만 에너지가 느껴지는 속도감과 희망이 넘치는 드로잉으로 다이나믹한 즐거움과 위트를 선사하는 블레이크는 영국 대중은 물론 일러스트레이터들로부터 가장 사랑 받는 작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찰리의 초콜릿 공장> <마틸다>의 삽화로 친숙해진 작가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미풍이 느껴지는 부드러운 연필 터치로 기억 속에 존재하는 시간을 그려내며 어른들에게는 어린 시절의 향수를 느끼게 하고, 어린이들에게는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상상하게 하는 레이몬드 브릭스(Raymond Briggs), 아동 발달 과정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어린이들의 세계를 충실히 담아낸 셜리 휴스(Shirley Hughes), 마치 정지된 시간의 세계 속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발견하게 하는 앤서니 브라운(Anthony Browne) 등은 글의 재해석과 스타일의 실험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1900년대 중 후반에 활동했던 주요 작가들이다.


보다 많은 세상의 이야기를 보여주려 했던 옛 거장들의 그림책을 보며 성장한 신진 작가들은 그들이 행했던 노력만큼이나 유연한 사고와 상상력을 지녔다. 모든 사물에는 제각기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말하는 사라 파넬리(Sara Fanelli) 세상 여러 곳을 여행하며 사물들을 모으고, 그것을 통해 숨겨진 이야기를 발견한다. 로렌 챠일드(Lauren Child)는 컴퓨터 그래픽 작업으로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를 최대한 표현하고, 그 과정을 통해 상상의 이야기에 사실성을 부여한다. 이들과는 달리 최소한의 오브제를 사용하는 에밀리 그라베트(Emily Gravett)는 놓치기 쉬운 순간의 감성을 글과 이미지의 역동적인 레이아웃과 절제된 컬러에, 간결하지만 풍부한 표정을 담은 드로잉으로 표현한다. 이들이 이전 세대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마치 여행자가 직접 그려내는 것과도 같은 손에 잡힐 듯한 자유로움일 것이다.


보다 가까운 곳의 작은 세상을 맑게 담아내려는 이들의 흔적이 느껴지는 분야가 바로 그림책 일러스트레이션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백 년 동안 꾸준히 사랑받는 동화책과 화려하고 날렵하게 그려진 원화를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런데 그 일면에는 작은 그림 한 장으로 세상을 밝게 빛내고 싶었던 이들의 숨은 노력이 있음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과정이 그들만의 즐거움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림문화를 생산하는 이들 상호간의 협력과 그것을 소비하는 사람들의 따뜻한 시선이 보이지 않는 커다란 힘이 되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거의 매해 개최되는 해외 유명 작가들의 전시를 통해 우리가 얻어야 할 것은 결과물에서 보이는 화려한 테크닉이 아닌 그림을 그려내는 과정이다. 아울러 수 많은 유명 작가들의 판권을 사들여야만 관심을 받을 수 있는 어린이 출판계의 현실 속에서 문화 생산자들이 다시 한번 한국의 어린이 그림책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백 년 전의 어린이들이 상상하던 세상을 백 년 후의 어린이들도 함께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그림책이 많이 나오기를 바라며 수년 전 어린이 책 전문출판사 재미마주의 이호백 대표가 던진 말을 되새겨 본다. “문화가 설 땅을 넓히는 것은 바로 문화 생산자 스스로의 몫이다. 문화 생산자들이 성실하게 새로운 장르를 열어가는 만큼 우리 문화가 다채로워질 뿐만 아니라 굳이 영국이나 프랑스를 꿈꿀 필요도 없어진다.”

참고자료 | Douglas, M., (1990), The telling line, Delacorte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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