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2-15
시발자동차가 생산되기 전까지 거리에서 볼 수 있는 자동차는 버스와 트럭이 대부분이었다. 미군에서 불하받은 관용차가 돌아다니거나, 전화로 호출 운행하던 미군용 대절택시인 GM뷰익이 어쩌다 한 대 지나갈 뿐, 승용자동차는 여전히 드문 시절이었고 일반인에게는 접근할 수 없는 존재였다.
글 | 이옥분 디자인학 박사
에디터 | 최동은(dechoi@jungle.co.kr)
전후 복구가 진행되고 사람들의 일상이 다시 자리를 잡아 가면서 자동차 수요는 늘어나고 있었다. 일반 사람들은 전차와 재생 버스로 어렵사리 불편함을 이겨나갔지만, 여전히 절대적인 수가 모자랐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차는 거의 없었다. 지프를 모델로 출시한 시발자동차는 자가용과 택시 수요에 대응하면서 생산 되자마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특히 상류층 부인들 사이에서는 “시발계”가 생길만큼 인기를 독차지하는 바람에 시발자동차는 만들어지는 대로 팔려 나갔다. 이러한 수요에 힘입어 시발자동차는 지속적으로 기술력을 개발하며 생산을 늘려 나갔다. 겨우 1달에 1대 제작하기도 어려웠던 시발은 1955년 8월 1호차를 제작한 이후 설비와 제작 과정, 인력을 체계화하여 1956년부터는 2년 3개월 동안 총 425대를 생산했다. 이 수치는 1달 평균 15대가 넘는 양이었다. 시발자동차는 폭증하는 주문량에 맞춰 설비와 인원을 대폭 늘려 1달 100대 생산으로 늘려갔으며, 일본자동차공업과 기술제휴를 추진하여 1달 1천대 생산의 확장 계획을 세우며 성장해 나갔다.
시발자동차가 사회 변화에 대응하여 성장하는 과정 속에는 역동적인 삶의 태도와 미국 문화에 대한 선망 의식이 동시에 들어 있었다. 시발자동차는 지프형 시발을 생산한 이후 왜건형, 픽업형, 6기통의 대형차로 스타일을 다양화해 나갔다. 이 차들은 1956년 5.8라인 조치로 자동차의 증차가 제한되자, 택시공급이 많던 판매구조를 다변화하기 위해 개발한 차들이었다. 5.8라인은 전국의 자동차 수량에 관한 통제 정책으로, 자동차 증가로 휘발유 소비량이 늘어나면서 외화가 석유 수입으로 고갈될 것이라는 여론이 거세지자 취해진 조치였다. 이 조치로 이미 등록된 차를 폐차하지 않고는 차량의 등록을 내주지 않자, 시발자동차는 차량의 판로에 어려움을 맞게 되었다. 시발의 생산에 성공하고 생산력을 집중적으로 확대해 나가는 시기에 이 같은 조치에 발이 묶이게 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할만한 돌파구가 절실해졌다. 시발자동차는 차종의 스타일을 다양화하는 실험을 하게 되었고, 더욱 고급스러운 스타일로 한정된 소비자를 끌어들이고자 하였다. 군용 지프 같은 수직형의 라디에이터 그릴을 없애고, 둥근 테를 둘러 부드럽게 바꾼 형태도 제작했으며, 왜건형도 만들었다. 그리고 생산성이 없어 한대 만들어 보는 것에 그친 픽업형 시발과 미국형의 고급 세단을 따라 만든 V6 엔진의 'GMC형‘ 대형 세단도 출시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시발자동차의 다양화 노력은 당시의 5.8라인이 취해질 만큼 열악한 현실과는 상치된 것이었다. 석유 때문에 자동차의 수를 제한하는 조치를 취해야 하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전형적인 미국식 차량, 즉 시발자동차의 새로운 디자인 전략은 기름고래인 미국형의 대형 차량을 모방하는 것이었다.
5.8라인의 조치에서 보듯이 당시 자동차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은 사치품, 다시 말해서 경제 재건을 위해 쓰여야 할 원조 물자를 낭비해 버리고 허영심을 조장하는 물건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통념에서 자동차 제작자도 사치스러운 물건으로써 현실적인 비용의 문제를 배제하고 있었다. 석유 문제로 자동차 수를 제한해야만 하는 당시의 상황에 대한 돌파구로서 역설적으로 미국형의 차량을 선택한 것은 자동차를 사치품의 반열에 놓고 있었다는 통념을 반증하는 것이며, 또한 최고의 사치품의 관념 속에는 미국형 대형세단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시발자동차가 제작한 대형 세단과 픽업은 지프형 시발이 그러하였듯이 당시 미군 고위 장성이 들여와 타고 다니던 세단이나 픽업 혹은 미군전용 대절택시의 스타일과 이러한 자동차들의 수리 중에 수집한 부품을 가지고 제작하였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새로운 차종의 개발에 있어서 제작자가 재료를 제공받고 참고로 할 수 있는 것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미군 차량이 전부였고 그것은 삶의 변화를 간절히 열망하는 사람들의 미래 지표가 되고 있었다. 자발적이며 적극적인 의지 속에서 갖고 싶으나 가질 수 없는 선망의 의식이 생겨났고, 그곳에 자동차는 미국의 물질문화를 대표하는 진보한 문화의 상징으로 자리했다. 미군이 타고 다니는 대형 자동차는 권력과 권위 자체였으며, 우월한 신분과 부를 지닌 최고의 사물로서의 지위를 지니고 있었다. 이처럼 시발자동차가 정부정책 변화에 따른 시장 조건을 고급형 차량으로 대응하면서 보여준 신형차의 개발에는 자동차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 미국의 원조와 영향력 등의 시대적인 한계와 열망이 모두 담겨져 있었다.
자동차가 보다 보편적인 삶의 수단으로 등장하는 이 시대에 시발자동차는 사람들의 생업을 도와 모든 것이 부족한 시대를 살아가는 피폐한 대중의 삶에 활기를 불어 넣어 주었고, 삶의 필요 이면에 허영심의 대상이라는 상반된 이미지를 동시에 함축하며 한국 사회의 근대화를 열어가고 있었다.
<참고문헌>
한국자동차공학회,「자동차공학회지」, 1999/6
한국생활사박물관편찬위원회,『한국생활사박물관12』, 사계절출판사, 2004
(주)자동차생활,「CAR LIFE」, 1992/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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