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전체보기

분야별
유형별
매체별
매체전체
무신사
월간사진
월간 POPSIGN
bob

프로덕트 | 리뷰

경제성장과 자동차 디자인

2011-04-21


1962년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한 이후 한국 경제는 매년 10% 내외의 고도성장을 이루며 빠르게 발전했다. 62년 23억 달러에 불과했던 국민총생산은 71년 95억 달러로 4배 이상 증가했고, 같은 기간의 국민1인당 GNP도 87달러에서 289달러로 3.3배 이상 증가했다.

글 | 이옥분 디자인학 박사
에디터 | 최동은(dechoi@jungle.co.kr)


이러한 높은 성장의 구심점에는 ‘수출제일주의‘가 있었다. 정부는 수출을 경제성장의 구심점으로 삼아 모든 산업 활동의 방향과 범위를 규정했고 국민의 일상생활에도 규제를 가했다. 정부의 수출제일주의 전략은 성공적으로 수행되어 66년 이후부터는 매년 수출증가율이 40%를 기록하며 급격한 성장을 가져 왔다. 64년 수출 1억불 달성을 기념했던 시대를 지나 77년에는 100억불의 수출을 이루어낸 ‘한강의 기적’을 실현하며 한국의 고도성장을 이끌었다. 수출은 이 시대 경제 성장을 이룩할 수 있는 핵심정책으로 모든 것에 우선하였으며 이러한 정신은 산업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 전반을 빠르게 변화시켰다.


자동차산업도 정부의 수출제일주의 산업 정책에 따라 빠르게 성장했다. 정부의 정책적 지원에 따라 자동차 산업은 60년대 KD(Knock Down, 해체)부품을 수입하여 조립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대량생산과 국산화의 기반을 마련한 종합자동차 생산 체제를 마련하였다. 몇 차례의 진통 끝에 확정 발표된 74년의 장기자동차공업 진흥계획은 자동차 산업을 수출산업으로 육성하고자 한 확고한 정부의 의지와 계획이 표명된 것으로 자동차산업이 대규모 생산력을 갖추고 급속히 성장할 수 있는 추진력이 되었다. 장기자동차공업 진흥계획에 제시된 산업목표는 “1975년까지 해외 수출을 목표로 2천 달러 내외의 완전 국산화된 1,500cc 소형차를 개발”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자동차 기업들은 73년에 불어 닥친 1차 석유위기로 투자 여력이 부족한 상황이었지만, 진흥계획의 목표를 달성할 경우 국내시장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기아자동차는 73년 소하리에 대단위 종합자동차공장을 준공하고 최초의 국산 엔진을 개발하였으며, 일본 마쓰다자동차의 파밀리아를 들여와 브리사(74년)라는 이름으로 승용차를 처음 생산하였다. 신진자동차는 도요타와의 기술협력관계가 종결된 후 GM과 합작하여 제미니(77년)를 생산했다. 반면 포드와의 합작 추진에 실패하고 대응 차종이 없었던 현대자동차는 고유모델 포니(75년)의 개발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자의반 타의반 격의 현대의 결정은 자력으로 자동차를 개발하여 정부의 수출전략에 맞추어 소량이지만 최초의 완성차 수출을 이루어내고, 오늘날 가장 앞선 회사를 이루게 되는 기반이 되었다.


장기자동차공업 진흥계획에서 제시하는 한국형 소형차의 개발은 해외차량의 조립단계에서 벗어나 부품의 국산화를 이루며 수출이 용이한 차량을 개발함으로써 대량생산의 자체적인 기반을 구축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자동차의 개발 방향에는 이러한 목표가, 차량의 디자인에는 정책 방향을 현실로 드러내는 임무가 주어졌다. 수출과 밀접하게 연결된 디자인은 정부정책을 실현하는 산업기술의 일부였으며, 경제 발전을 실현하는 일종의 도구였다. 디자인은 경제성에 집중한 생산적이며 효율적인 기술 원리에 따라야 했으며, 산업 정책을 수행할 수 있는 디자인 기술능력의 확보에 집중하도록 유도되었다. 경제성장의 일환으로 시작된 산업의 육성은 디자인에 있어서도 그 개념과 방향을 규정하였고, 자동차의 디자인에는 이러한 시대적 요구가 담겨졌다.

정부의 수출산업화 정책에 가장 적극적으로 대응한 업체는 현대자동차였다. 현대자동차는 자동차를 개발해 본 경험이 전혀 없었지만, 포니를 개발하고 수출을 이루어 냄으로써 정부의 정책 목표를 일정부분 실현했다. 현대자동차가 포니를 개발하고 수출하는 과정은 당시의 산업 환경과 기술 수준에서 정책 목표를 달성해 나갈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모색하며 디자인을 실천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포드의 조립업체로서 기초적인 조립기술만을 체득한 상황에서 현대자동차가 택한 방법은 선진국으로부터 성숙기 혹은 이미 쇠퇴기에 들어선 기술을 제공받는 것이었다. 정세영 전 현대자동차 회장은 “기술 제휴를 위한 협상 자리마다 기술이 없는 회사의 설움을 뼈저리게 실감했기에 마음속으로는 독자적으로 기술을 개발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것이 몇 년이 걸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일단 남의 기술을 산 다음, 이를 바탕으로 기술 자립을 도모하는 방법밖에 없었다”고 회고하였다. 정세영 전 회장의 말에는 당시의 기술 현실 속에서 현대자동차가 고유 모델을 개발하고, 미래의 성장을 도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 외국 업체와의 기술제휴를 성사시키고, 조속한 생산체제의 구축과 향후의 기술자립을 기하고자 했던 의지와 목표가 뚜렷이 나타나 있다.



현대자동차는 외국디자이너의 모델을 도입하여 자동차 개발의 과정과 방법을 습득하고 설계와 디자인의 세계적인 수준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스타일은 첨단기술을 도입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에서 진보적이고 국제적인 양식에 초점을 두었고, 세계적인 트렌드의 중심에 있던 이탈리아의 죠르제트 쥬지아로에게 그 역할을 맡겼다. 쥬지아로의 디자인을 통해 한국의 자동차디자인은 서구 사회에 유행하고 있는 모더니즘 양식, 기하학적 스타일을 자연스럽게 수용하게 되었다. 외국 디자인의 도입은 조속하게 디자인의 개발체계를 마련하고 안정화 할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이었으며, 한 번도 디자인을 경험하지 못했던 현대자동차가 취할 수 있는 현명한 선택이었다.

쥬지아로의 기하학적 스타일은 자동차 디자인의 세계적인 유행을 선도하고 있었으며, 자동차의 개념이 기능과 공간 효율이라는 실용적인 개념으로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었다. 포니는 쥬지아로를 통해 자동차 디자인의 최신 트렌드를 도입하여 미래의 디자인의 흐름에 동참하고 그 안정성을 확보한 것이었다. 비록 자동차 개발의 조속한 성과를 얻기 위해 외국 기술과 스타일을 공여 받았을지라도 이러한 과정은 디자인의 새로운 개념을 한국에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한국자동차 디자인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포니가 성장주의와 결과주의로 대변되는 시대의 가치를 반영하여 탄생했을지라도, 열악한 기술 수준에서 이룩해 낸 신화적인 가치를 지닌 디자인으로 70년대를 대표할 수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임영태, 대한민국사
한국자동차공학회,「자동차공학회지」, 2000/4
정시화, 『한국의 現代디자인』열화당, 1981
정세영, 『미래는 만드는 것이다』, 행림출판, 2000, p251
「교통신문」1978.1.16, 1978.3.5
박병재 전 현대자동차 부회장과의 인터뷰 2009.12.2

facebook twitter

당신을 위한 정글매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