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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이후 재편된 한국 자동차 업계

2012-05-11


한국의 자동차산업은 1985년 이후부터 매년 30%에 가까운 증가율을 기록하며 국내외 생산력을 확장해 왔다. 해외 생산 공장의 건설과 연구소의 설치 등 선진메이커로 도약하기 위한 전력을 기울여 왔으나, 이러한 확장이 경쟁력과 생산성을 갖추지 못한 양적 성장에 그치면서 90년대 후반 외환위기를 전후하여서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글 | 이옥분 디자인학 박사
에디터 | 길영화(yhkil@jungle.co.kr)

자동차산업의 위기를 가져온 근본적인 원인은 해외로부터의 기술도입에 의존한 성장 전략에 있었다. 한국의 자동차산업은 70년대 정부의 정책 산업으로 육성되면서 정책 자금의 지원과 해외 기술의 도입을 통해 생산력을 확장해 왔고, 이러한 태도는 자동차에 대한 요구가 크게 달라진 90년대까지도 계속되었다. 해외 업체로부터 기술이전을 많이 받았던 것은 도면을 사들여와 차량을 생산하는 것이 신차종을 개발하는 데 들어가는 노력과 비용보다 저렴했고, 빠르게 생산력을 확장할 수 있는 방편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제품을 개발하는 대신 기술을 이전 받는데 치중하다 보니 생산력의 증가만큼 기술과 디자인 개발 능력은 축적되지 못했다. 이러한 기술력의 문제는 자동차 모델의 종류와 생산량이 급격히 증가한 것에 비해 성공한 모델이 많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드러났다. 일반적으로 소형차는 최소 40만대, 중형차는 30만대가 판매되고, 5년 이내 수익이 생겼을 때 성공한 차량이라고 평가하는데, 90년대 초반까지 이러한 기준에 들어가는 모델은 현대의 엘란트라와 엑셀, 기아의 프라이드뿐이었다. 게다가 프라이드는 많이 팔렸을지라도 그만큼 수익을 내지는 못했다. 프라이드는 포드, 마즈다의 협조로 개발되면서 양사에 기술로열티를 내는 차였기 때문에 기아에 돌아오는 이익은 크지 않았던 것이다.

94년 한국의 자동차 생산대수는 세계6위를 점할 만큼 크게 성장했지만, 총 수출액은 선진국 대비 상당히 낮은 수준을 유지했다. 승상용과 부품을 포함한 전체자동차산업 수출액은 약 33억 달러로 전세계 수출액의 0.9%에 불과한 세계 14위였다. 또한 승용차의 평균수출 단가는 약 6천 달러로 스웨덴차의 30%, 독일차의 40%, 일본차의 60%에 불과했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세계경제 환경이 바뀌고 남에게서 사온 기술과 설비로 비슷한 재료와 인건비를 들여 만든 상품이 세계 시장에서의 경쟁력이 약화되면서 자동차 산업에 위기가 다가왔다.

게다가 한국의 자동차산업은 양적인 성장에 치중한 경영전략으로 생산력의 과잉 상태를 초래하고 있었다. 재벌들이 경쟁적으로 자동차산업에 뛰어들고 삼성자동차가 설립되면서 외환 위기 직전에는 8개 업체(대우, 대우조선, 기아, 아시아, 현대, 현대정공, 삼성자동차, 쌍용)가 경쟁하고 있었다. 외환위기를 전후하여 현대자동차의 평균 가동률이 50%미만으로 떨어졌을 만큼 자동차 판매량이 줄어들면서 자동차 업체 모두 심각한 경영난에 직면하게 되었다.

자동차 산업의 위기는 곧바로 한국 경제 전체의 위기로 파급되었고, 업계의 대규모 재편으로 이어졌다. 97년 기아자동차가 부도를 내면서 다음해 현대자동차에 합병되었고, 95년 닛산자동차와 기술제휴하여 승용차 생산을 시작한 삼성자동차도 2000년 르노삼성자동차로 재출범하게 되었다. 세계경영을 외치며 자동차의 독자 개발과 해외생산을 대폭 확충해 온 대우자동차도 2002년 GM대우로 편입되었다. 쌍용자동차도 2005년 중국 상하이자동차 그룹에 매각되었다.

기아 사태의 원인은 무리한 시설투자와 비자동차부문의 과잉 확장에 있었다. 기아는 87년부터 승용차생산을 재개하면서 대규모의 생산시설의 확장을 추진하였고 이러한 무리한 투자는 차량의 대당 생산 비용을 높이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유사한 정도의 기술력을 갖춘 상황에서 자동차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비용 절감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기아는 현대에서 운영하는 동일 규모의 공장을 건설하는 데 2배 가까운 비용을 투자하여 고가의 최신설비를 가동하고 있었다.

삼성은 70년대 중반부터 자동차사업에 진출하기 위한 준비를 했었으나, 기존 자동차업체들의 반발과 해외업체와의 기술제휴 실패 등의 문제로 미루어 왔었다. 95년 드디어 부산의 신호공단에서 첫 차 SM520(95년), SM525V(98년)를 생산하였으나, 과잉 투자 비용과 선투자 등의 문제로 출범하자마자 구조조정의 대상이 되었다.

대우자동차는 제휴관계를 맺어온 GM과 결별하고, 영국 워딩 기술연구소를 인수하여 라노스, 누비라, 레간자, 마티즈를 동시 개발하며 독자개발 능력과 해외생산능력을 대폭 확충해 왔다. 독자적인 발전 형태를 갖추려고 한 것이었지만, 기술 능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추진하면서 품질의 경쟁력이 확보되지 못했고, 대내외적 환경 변화와 과다한 차입 문제 등으로 경영이 악화되었다.

쌍용자동차는 트럭과 지프차를 생산하던 동아자동차를 인수하여 설립한 회사였다. 지프차 시장을 독점해 오던 쌍용은 90년대부터 아시아자동차(록스타)와 현대정공(갤로퍼)이 가세하여 경쟁이 본격화되자, 91년 벤츠와 기술제휴를 맺고 이스타나(95년)와, 체어맨(97년)을 생산하여 승용차생산업체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생산량에서 규모의 경제를 이루지 못하면서 쌍용자동차의 경영 상태는 IMF체제와 상관없이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1990년대 한국의 자동차산업은 신규기업의 진입과 국내외의 설비 확장, 생산차종의 확대 등 과잉 투자와 시장의 출혈 경쟁 속에서 IMF관리체제를 맞아 전반적인 구조 조정에 들어갔다. 구조 조정을 거쳐 한국의 자동차 산업은 국내 기업(현대기아)과 외국계 기업(지엠대우, 르노삼성, 쌍용)의 4개사로 재편되었다. 이러한 재편은 그간의 한국 자동차산업의 발전 모델이 깨지는 것이었으며, 외국계 기업의 역할이 국내 자동차업체의 합작파트너에 그치는 것이 아닌 직접적인 경영주체가 된다는 점에서 커다란 변화였다.


참고 문헌
강명한,『한국차, 브레이크가 걸렸다』, 정우사, 1998
정세영,『미래는 만드는 것이다』, 행림출판, 2000
조형제,『한국적 생산방식은 가능한가?』, 한울, 2005
「교통신문」, 1994/8/29, 1995/6/1
김재만 전 기아부사장과의 인터뷰 2009.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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