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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 리뷰

일력에 대한 단상, 매일 365+1명의 인간군상을 만난다.

2003-12-03



7, 80년대까지만 해도 매일 아침 큰 숫자가 적힌 일력을 뜯는 것은 흔한 풍경이었다.
나이 지긋한 어른들에겐 일력의 습자지가 유용한 휴지 대용품이요, 추억의 메모장이었고 젊은 세대라면 고3 시절 교실 벽에 걸려 있던, D-100 일력이 친근할 것이다.

최근 일력이 경원대 시각디자인과 학생들과 서기흔 담당교수(I&I 아트디렉터)에 의해‘Identity 365+1’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부활했다. 감각적인 366개의 수묵드로잉으로 구성된 이 캘린더는 날마다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한다. 캘린더에 사용된 이미지는 ‘상상하는 인간’이란 주제로31명의 학생들이 저마다 다른 표정을 지닌 수 천점의 인간 형상으로 표현한 것이다.

나아가, 'Identity 365+1’캘린더는 추상적인 시간의 흐름을 좀더 구체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일력의 형태를 띄고, 단순한 캘린더의 역할을 넘어서 ‘정체성 찾기’라는 적극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인터뷰/정리 | 김미진 기자(nowhere21@yoondesign.co.kr)



캘린더‘Identity 365+1’은 통합 교육 형태로 진행되는 서기흔 교수(경원대 시각디자인과)의 커뮤니케이션디자인 수업의 결과물이며, ‘디자인문화운동작업전’ 두번째 프로젝트이다. 작년, 처음 시도되었던 디자인문화운동작업전에서는‘솟아오름에 대한 상상’을 통해 백서발간, 문화상품 제작, 홈페이지 구축, 전시회 등을 아우르며, 이른바 ‘디자인 교육의 반란’으로 많은 주목을 받은바 있다.

'디자인문화운동작업전’이란 이름으로 진행되는 이 프로젝트형 수업은 크게 세 가지 의미를 지닌다. 우선 전공 영역의 울타리를 넘지 못하는 디자인교육의 현실에 대한 반성이며, 둘째는 수업과 문화 콘텐츠를 연계해 학생들로 하여금 실무를 경험하게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디자이너들이 문화 담론의 생산자가 되어 사회 현상에 주체적으로 개입하고 적극적으로 메시지를 던진다.

캘린더로 제작된 이번 프로젝트의 화두는 '정체성(Identity)'이다.
현대사회에는 얼마든지 자신을 대체할 수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기에 공허하다. 그래서 타인과 차별되는 독특한 아이디어가 이 시대의 경쟁력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실상 그 주체인 인간은 미디어의 홍수, 끝없는 복제, 급변하는 사회환경 속에서 저마다의 색깔을 잃은 채 익명에 기대고 획일화 된 일상에 안주하며 살아간다.

'정체성' 에 주목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서기흔 교수는 ‘정체성'이야 말로 이 시대의 불확실성과 몰개성을 극복하는 창조적 상상력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내면의 언어에 귀 기울여 자신을 성찰하고, 그로부터 타자와 구별되는 자신만의 독특한 가치를 찾아내는 것. 그것이 진정한 경쟁력이요 이 시대의 구원이란 뜻이다.







단순히 예쁘게 포장하는 것이 디자인의 본질이 아니라면 우리 시대 디자인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자 가능성으로 시작되었던 첫번째 디자인문화운동작업전은 '솟대’라는 주제와 '디자인문화’라는 명제가 결합된 실험적 디자인운동이자 프로젝트형 대안교육이다. 2001년 9월부터 장장 10개월간 30명의 학생들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선배 디자이너 5명도 객원지도로 동참했다.

솟대를 주제로 정한 것은 시각적인 요소가 강한데다 마을의 수호신이라는 정신적 의미가 담겨있어 한국의 전통디자인에 대한 발굴과 이를 현대화하고자 했던 취지가 잘 부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대한 자료수집과 장기간 진행된 과정 모두 첫 모험을 시작하는 이들에게는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서기흔 교수와 학생들은 각종 민속자료 수집과 현장답사를 거친 후, 솟대의 역사와 조형성을 토론했다. 그리고 각자 다른 형태의 나무솟대 53점을 제작했고 1천여점이 넘는 드로잉과 페인팅 작업을 통해 현대적이면서 예술적인 이미지의 솟대를 창조해냈다. 그 결과물은 곧 캘린더, 다이어리, T셔츠, 머그컵, 편선지, 아트그래픽 등 다양한 문화상품으로 제작되었으며, 단행본 <솟아오름에 대한 상상> 으로 출간되었다.

"학생들에게 스스로의 재능과 무한한 잠재력을 경험할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는 서기흔 교수는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디자이너의 한계를 극복하고 스스로 해답을 찾는 문화생산자로서 나아가는 통합교육의 가능성을 찾았다.




주제연구와 컨셉설정
'미치지 않고는 미칠 수 없다.' 서 교수의 이 주문은 어느새 <디자인문화운동작업전> 의 행동 지침이 되었다. 이는 ‘상상하는 인간'이란 광범위한 주제를 고민하며 작업에 몰두했던 학생들의 마음가짐이기도 했다. 31명 학생들은 상상력이란 나침반과 끊임없는 자기와의 대화를 통해 저마다 다른 감정과 표정을 지닌 인간 형상들을 드로잉으로 표현했다. 복도 끝에서 끝까지 도배한 수천 개의 인간 형상들은 학생들에게는 또다른 자아 성찰의 대상이었고, 대화 상대였으며, 때론 스승이었다.

'디자인문화운동작업'이란 프로젝트를 진행하기에 정규 수업 과정만으로는 부족했다.
강경구 교수(동양화)를 초빙하여 지필묵에 대한 이해와 형태적 인간에 대한 세미나를 갖고, 영화음악 작곡가로 유명한 조성우씨는 그의 음악적 세계와 서정적 인간에 대한 감정을 얘기했다. 또한 도각스님에게서는 불가에서 이야기하는 인간의 모습과 성찰을 배우기도 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인간'에 접근했다.

드로잉에 이은 조형 작업
지필묵을 통한 드로잉에 이어 부조와 입체 작업은 흙을 통해 관념속의 인간들을 3차원의 공간으로 불러내는 과정이다.
방학에는 대구의 토우도방에 내려가 직접 흙을 만지면서 각자가 생각해오던 ‘인간’을 구체화시켰다. 2박 3일간의 조형작업 워크샵에서 학생들은 흙을 통해 생각을 매만지고 다듬으면서 자신의 분신이라 해도 좋을 수 백점의 인간 형상을 만들었다.





수많은 드로잉을 선보일 수 있고, 가장 적합했던 것이 캘린더, 그 중에서도 일력이었다. 또한 소비자가 매일 뜯어야 하는 일상적 행위는 개별 인간 형상들과의 대화를 통해 정체성에 대한 지속적인 고민을 유도하려는 이들의 작업 컨셉과 딱 맞아 떨어졌기 때문. 드로잉 한점 한점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에 수천 점 가운데서 366개를 추려내는 것 또한 생각만큼 수월한 작업은 아니었다.






이번 교육 프로젝트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문화생산자로 나아가기 위한 통합적인 문제해결능력 육성이다.

'상상하는 인간' 을 주제로 한 드로잉과 조형작업, 그리고 여러 포스터와 제품결과물까지 그렇게 6개월의 시간이 지난 후, 학생들은 스스로의 가능성에 대한 확신과 디자인을 통해 문화 담론의 생산자가 되고 사회 변화에 유의미한 메시지를 던져야 한다는 희망찬 고민을 얻었다.

단순한 툴테크닉만으로는 디자이너의 생명력이 짧을 수밖에 없다. 보다 지속적이고 근본적인 활동을 위해 디자이너에게도 다양한 분야의 교양과 지식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현대사회에서 디자이너가 전문성을 인정받을수 있고 나아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조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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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 : 디자인문화운동작업전을 시작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오늘날과 같이 급변하는 사회에서는 미래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총론은 무성한 반면 구체화된 각론이 나오지 않는 현상이 초래된다. 이처럼 우리 사회에는 각론이 시급하지만 반면 디자인계에서는 총론 부재의 측면이 더욱 절실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문제의 해결책은 통합적인 디자인 교육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풀고자 했다.

디자인문화운동작업전 프로젝트는 그렇게 국내 디자인 교육의 문제점을 인식하는데서 출발한다.
오늘날 디자이너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다. 과다인력이 공급되면서 경쟁이 심각한 수준이고, 경제적 불황은 디자이너를 생계의 문제로까지 몰고 간다. 특히 한국에서 ‘디자인’이란 실상 기업의 서비스 수준에 머물러 있기에 디자이너는 ‘전문성’이란 명목 하에 기술중심으로 편입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 디자이너들에겐 넓은 안목이 부재하다.

이러한 때에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나는 ‘정체성’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정체성이란 철학적 화두는 추상적 낭만이 아닌 구체적 지향점이자 나침반이다.

결국, 디자인문화운동은 오늘날 디자인교육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제고하고, 직접 교육현장으로 나아가 교육개혁이자 변화를 모색했던 프로젝트형 대안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정글 : 학생들과 함께 했던 새로운 시도였기 때문에 진행과정에서 상당한 시행착오를 겪었을 것 같은데…어떤 방식으로 학생들을 지도하였는가?
가장 크게 문제라고 느꼈던 것은 표현 매체가 다양한데 반해 학생들이 컴퓨터에 집착하면서 표현방식이 툴이용에 국한돼 있었다는 점이다.

컴퓨터 작업은 상상을 축소시킨다.
작업이 깔끔하고 속도가 빠를지언정 그만큼 생각의 여유가 없고, 손맛과 재료에서 오는 깊이감이 사라진다. 그림이 갖는 가치와 매력은 내면의 생각을 표현하기 용이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드로잉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거진 3달 가까이 엄청난 분량의 연습을 강행했다. 붓 한번 잡아보지 않은 학생들에게 지필묵 드로잉이나 조형작업은 상당한 연습과 손놀림을 필요로 했다. 매주 수업 때마다 한 학생이 몇 백장의 작업물을 가져올 정도니 모두 살펴보려면 교실안도 부족해 모든 복도를 점령할 지경이었다. 또한 깊이 있는 드로잉을 도출해내기 위해 학생들은 토론을 통한 텍스트 연구과정에서 자기존재를 고민하고 몰입하여 고된 훈련을 경험했다.


정글 : 올해 두 번째 디자인문화운동작업전을 진행해오고 있는데 앞으로의 계획은?
작년‘솟대' 와 올해 '상상하는 인간' 에 이어 내년에는‘개' , 그리고 내후년에는 '에로티시즘' 의 주제를 계획하고 있다. 체력이 되는 한 그리고 재정확보가 되는 한 지속해나갈 것이다. 재정확보를 위해 해외대학과의 전시 등 연계점을 갖고자 교류를 시도하고 있다. 진행하는 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가 따르겠지만 지향점이 그릇되지 않았기에 계속할 각오이다.

디자인교육의 자극제로서 성공신화를 쓰고 싶다.



정글 : 각 분야의 전문가 초청특강이나 주제도출 토론, 수묵드로잉/조형 작업 등 상당히 광범위한 프로젝트였는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무엇이었나?
첫 수업시간, 모두가 조용히 선생님의 첫마디 지령을 기다리고 있을 때, 전장에 나가기 전 고요한 긴장감은 아직도 생생하다. 현실적으로 학교에서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첫 번째 프로젝트의 성공적인 밑바탕이 있기에 그 결과물들을 보며 결코 해내지 못할 일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번째 난관은 주제를 표현하는 과정이었다.
우리는 꽤 오랜 시간동안 어떤 방향으로 인간을 상상할 것인가 고민했다. ‘솟대’처럼 특별한 문화적, 주술적, 형태적 의미가 강한 오브제가 아닌 ‘인간’이란 주제는 너무 광범위했다. 그것은 타인이자 본질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정체성이기도 한… 범위에 한계를 둘 수 없는 대상이었다.
고민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집이나 학교에서 머리를 혹사시켰다. 수업시간마다 지필묵으로 그려나가는 인간의 형상은 몇 백점의 드로잉, 매주 수 천점이 넘었다. 한 주동안 각자가 상상한 인간의 모습을 토의하다 보면 수업은 끝나는 시간을 예측하기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힘든 과정 만큼 보람도 컸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가운데 학생들은 하나가 되는 모습들이었다. 서로를 믿고 즐겁게 작업하던 그런 모습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정글 : '상상하는 인간'이란 주제를 이해하고 표현하기 위해서 어떻게 토론했고 자료 조사는 어떻게 이뤄졌나?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가…
앞서 언급했듯이 첫 번째 주제인‘솟대’와는 그 범위부터 다른 '인간' 의 대상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먼저 우리는‘인간’을 많은 분야로 구분하고 (예를 들어 철학적, 생물학적, 문화적, 사회적, 이데올로기적, 감정적 등)그 안에서 세부적으로 회의를 갖고 조사해나갔다. 여러 전문가들의 특강을 통해 다양한 인간의 모습을 접하기도 했으며 전시회를 관람하며 수많은 자료를 분석했다.

"인간을 상상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인간이 되라!”
언젠가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했던 얘기인데 한참 '인간' 이란 주제를 고민하면서 각인된 말이다. 이것이 이번 프로젝트의 진정한 목표가 아닐까.


정글 : 시각디자인과 학생들에게 생소한 드로잉과 조형작업을 경험하면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면?
사실 시각디자인과 학생들에게는 조형 작업은 생소하기 때문에 작업하기 전 우리는 흙이라는 재료와 조형작업을 연구했다. 먼저 지금까지 드로잉했던 그림 중에서 조형적 미가 보이는 작품을 골라낸다. 그리고, 기존 도조 작품들을 조사하면서 우리가 최종적으로 만들 작품의 느낌을 분석한 이후, 흙의 특징과 도조 작업에 있어서 특히 마지막 유약을 바르는 단계에 대해 철저히 익힌다.

한편 조형작업을 위해 여름에 방문했던 대구 ‘토우도방’은 아담했지만 주변에 과수원과 산딸기가 널려 있는 무척 아름다운 곳이었다. 도방의 아름다움과 정겨움… 그리고 매일 아침, 천번씩 절을 하는 도방 선생님과 그들에게서 불교의 교리를 들었던 것은 또한 의미있는 기억이다.


정글 : 이번 프로젝트를 마친 소감은?
스스로 문제를 풀어가는 방법과 자신감을 얻었던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기존의 디자인교육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문화를 만들어가는 주체자로서 보다 적극적인 디자이너의 역할을 모색해보았던 작업이다.
'Identity 365+1’ 캘린더는 기획의 일부분이다. 아직도 우리들의 프로젝트는 진행 중이며 전시회 기획과 컨셉북 제작으로 우리가 보여주지 못한 ‘상상하는 인간’을 선보일 것이다. 계획대로라면 올 해에 전시회를 열어야 했지만, 내외적 영향으로 늦춰지는 게 아쉽다.

마지막으로 프로젝트와 캘린더 제작에 참여한 서기흔 선생님과 경원대학교 4학년 학생들, 선후배들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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