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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 리뷰

서기흔이 엮은 국내 최초 디자인 명언집 - 사유

2008-09-17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데카르트는 말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의 아포리즘(aphorism: 널리 인정받는 진리를 명쾌하고 기억하기 쉬운 말로 나타낸 것)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 인류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인간은 생각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생각은 단순한 사고의 흐름이 아니라 깊이 있는 통찰을 뜻하는 사유의 다른 이름이다.
이러한 사유 안에서 35년여 동안 그래픽 디자이너로 활동해온 서기흔 아이앤아이 대표가 ‘디자인에 대한 사유’를 시작했다. 2년에 걸쳐 작업한 500페이지 분량의 책 안에는 디자이너에게 도움이 될 만한 650여 개의 격언과 명언 등이 담겨 있다. 디자이너들에게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키워주고자 했다는 그의 집념이 대단하다.

텍스트를 통해 사유하는 디자이너로 거듭나다
그는 집필을 위해 문학, 예술, 디자인, 철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되는 경구를 2년여 시간 동안 모은 후 이를 가두고 있다고 여긴 장르를 우선 없앴다. 철학자의 깊은 성찰 아래 세상에 알려졌다 해도 문학적이고 음악적인 메타포가 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이는 누가 말했는지에 초점을 맞춰 장르를 나누었던 기존의 방법에서 벗어나 왜 만들었는지, 무엇을 전달하고자 했는지의 목적을 기준으로 새롭게 분류한 것이다. 그런 다음 이를 디자이너의 관점에서 또다시 크리에이티브한 콘텐츠로 재구성했다. 예를 들어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이 말한 “변화는 새로움이고 발견이다. 그 속에 새로운 세상이 있다”는 “작품이라는 결과보다도 예술가가 선택하고 결정하는 정신 세계가 진정한 예술의 본질이다”라는 마르셀 뒤샹의 경구와 함께 디자인과 예술을 총체적으로 아우를 수 있는 말로 새롭게 분류했다. 이러한 분류가 바로 서기흔이 말하는 탈경계이며, 본질을 탐구하는 방법이다. 이를 통해 진정한 의미의 사유가 가능케 된다.
그가 이처럼 깊이 있는 성찰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 것은 편집 디자이너로 활동하면서 자연스럽게 텍스트를 만나고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말하는 텍스트와의 만남은 눈으로 읽고 머릿속으로 다시금 생각한 후 나의 것으로 만드는 일련의 과정을 뜻한다. 이는 부끄러움에서 시작되었다. 심미적으로 더 아름답고 멋지게 디자인하는 데 열중한 나머지 텍스트가 전달하려는 본질을 잊어버렸던 시절, 본인 스스로 무지함을 느꼈을 때 비로소 텍스트가 지닌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사유하는 디자이너’로 거듭났다고 한다. 따라서 <사유> 는 디자이너로서 그가 걸어온 발자취의 또 다른 모습으로 볼 수 있다. 책에서 만날 수 있는 그만의 아포리즘, “아이디어는 영감이 아닌 생각의 축적이며, 사유의 과정 끝에서 만나는 논리의 업적이다.”라는 말이 그것을 입증한다.

느린 디자인으로 깊은 사유와 성찰을 가능케 하다
그는 짧은 문장만으로 완성도를 극대화하고 동시에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 아포리즘을 시와 같다고 표현했다. 그렇기에 경구 역시 눈이 아닌 마음으로 읽고 그 뜻을 음미해야 한다고 한다. 이를 위해 디자인에서도 차별점을 두었다. 그 중 하나는 뒤에서부터 읽는 방식이다. 앞에서부터 읽기 시작하면 빠르게 페이지가 넘어갈 수 있는 반면 뒤에서부터 읽기 시작하면 시선이 페이지에 머무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길어지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경구는 우측에 세로쓰기로 써 독자 스스로 글자 하나하나를 천천히 읽어 내려가면서 생각할 수 있게 했다. 급하게 책을 읽는 독자를 위한 배려이다. 빠르게 읽는 것보다는 천천히 읽어야 진정한 사유가 가능해진다.
우측 페이지를 지나 독자의 시선이 좌측으로 움직이면 가로로 쓰인 경구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비주얼 이미지에 익숙한 독자들이 경구만 적힌 페이지를 읽으면서 혹시나 지루함을 느끼지 않을까 해 500쪽이 넘는 페이지를 미묘하지만 각기 다르게 디자인했다. 이는 글자만으로 500가지가 넘는 디자인을 선보였다는 것을 뜻이다. 또한 색을 철저히 배제했다. 화려한 색으로 장식한 경구는 자칫 본래의 뜻을 왜곡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서이다. ‘왜?’라는 질문에 대답하려면 반드시 사유가 있어야 하고, 그래야만 디자이너가 사회를 밝히는 빛이 될 수 있다. 표지를 누군가의 발자국처럼 표현한 것이 마치 깊은 성찰 후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는 이러한 형식으로 천천히 사유하면서 깊이 있는 성찰과 반성을 할 때 사회와 공공의 편리를 위한 진정한 의미의 디자이너로 거듭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사유> 의 집필 배경과 엄청난 양의 아포리즘을 모은 과정이 궁금하다 디자이너로서 자신의 뿌리를 찾고 공공을 위한 디자인을 하려면 무엇보다 사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가치관처럼 디자이너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경구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늘 명언을 찾고 그에 대해 학생들과 함께 이야기했었는데, 이런 시간이 쌓이고 쌓여 한 권의 단행본으로 출간하게 됐다. 또한 집필을 시작하면서 각계각층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디자이너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경구, 또는 함께 공유하고 싶은 아포리즘에 대한 자료를 요청했다. 책에도 썼지만 <사유> 를 디자이너 모두가 함께 만들었다고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 책을 읽는 이들에게 <사유> 가 어떤 의미가 되길 바라는가? 디자인이 단순히 장식적인 요소나 산업 수단이 아니라 사회 흐름을 만들고 문화를 이끌어가는 분야가 되길 바란다. 이는 디자이너 스스로 사유할 수 있을 때 가능해진다. 아포리즘의 종합선물과 같은 <사유> 가 깊은 성찰을 돕는 안내서가 되었으면 한다. 또한 <사유> 는 앞으로도 계속 진화할 예정이다. 더 좋은 경구를 찾아낸다면, 이는 2쇄, 3쇄를 거듭할 때마다 <사유> 안에 반영시킬 생각이다.


글/한경아
담당/최태혁 기자
사진/이재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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