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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 리뷰

크리에이T브

2009-10-27


일러스트의 인기가 최근 하늘 높은 줄 모른다. ‘이 놈의 인기’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그 수요와 범용 사례를 비교해보자면 과연 ‘역대 최고’가 아닐까 싶다. 독창적인 스타일로 각광받고 있는 일러스트레이터 6인에게 만나자는 전화를 걸었다. 그들의 인기를 추적해보면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약속한 날, 그들이 차례차례 스튜디오로 찾아왔다. 제 그림이 프린트된 티셔츠를 입고서.

에디터 | 이상현(shlee@jungle.co.kr), 사진 | 스튜디오 salt



신혜경
드라마 <트리플> 의 한 장면. 마음을 몰라주는 이하나가 야속해 그 집 앞마당에서 윤계상이 분노의 덩크 슛을 날리던 장면. 그때 윤계상의 마음은 비록 시궁창이었을지 몰라도 그 모습을 텔레비전 모니터로 지켜보던 신혜경은 기쁜 마음을 어찌할 바 몰라 발을 동동 굴렀다. 땀으로 흠뻑 젖은 윤계상의 근육질 몸에 그녀의 그림이 프린트된 일러스트가 걸려 있었다는 것. “제가 계상 오빠 가슴팍에 대고 직접 그린 느낌이었어요. 으흐흐.” 단국대 시각디자인과 졸업 작품으로 선보였던 일러스트가 ‘톰보이’를 통해 티셔츠로 시판될 계약을 할 때까지만 해도 이런 상황을 예견하지 못했다. “<1박2일>에서 승기 오빠도 입었어요.” 일면식도 없는 타인과 제 그림이 만나는 짜릿한 느낌을 처음 알게 된 그녀는, 현재 대학 졸업 후 프리랜스 작가로서 가열찬 활동을 마음 먹고 있다. 시각디자인 전공을 십분 살린 일러스트로 승부수를 띄워볼 작정이다. 타이포와 일러스트가 결합된 신혜경의 이 ‘그래픽 아트’는 한번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탐 낼 만큼 충분히 매력적인 게 사실이니까(이미 톰보이 티셔츠가 그 사실을 보증하는 셈). “대학 동문인 부창조 선배가 제 역할 모델이에요. 그래픽적인 요소가 도드라진 일러스트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잖아요. 정체성이 분명한 작가주의적 일러스트레이터인 점이 특히 존경스러워요.” 제 포트폴리오로 작업을 의뢰 받고 싶다는 초보 일러스트레이터의 말이 염려스럽다가도 “지나가는 할머니가 봐도 재미있는 작업을 하고 싶다”는 말에 일단 파이팅을 외치고 본다.


김중화
김중화는 현재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일러스트레이터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그의 그림이 실리지 않은 잡지가 거의 없다 해도 무방할, 가히 폭발적인 작품 활동을 펼쳐 보이고 있다. 물론 작품이 갖는 뛰어난 완성도가 가장 큰 이유겠지만, 그림에 관한 그의 집중과 애정이 먼저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얘기인즉슨 (상투적이게도) 그가 얼마나 일러스트에 빠져 사느냐에 관한 거다. 패션디자인을 전공하다 우연히 일러스트라는 스스로의 재능을 깨친 김중화는, 거의 연애에 빠진 풋내기처럼 그 세계에 풍덩 몸 바쳤다고 한다. 잘 다니던 ‘에스모드’를 중퇴까지 하며 칩거하듯 방구석에 틀어 박혀 혹독한 습작생 시절을 자처했다. 그 시절, 가장 엄하고 무서웠던 선생님은 각막에 새기듯 탐독했던『아메리칸 쇼케이스(American Showcase)』. 미국적인 스타일이 살아있는 일러스트들을 선 하나 놓칠 새라 미농지를 깔고 따라 그렸던 김중화는, 황새를 따라가고 싶은 뱁새의 마음으로 가랑이가 찢어지기 직전까지 그리고 또 그리며 독학으로 스스로를 단련시켰다. 당시에는 선과 색깔, 터치와 구성 등 미국식 일러스트의 발끝이라도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국가대표 급 일러스트레이터로 활약하는 지금에 와서야 정작 그때 배우고 익혀야 했던 바는 따로 있었다고 털어놓는다. 가볍고 유쾌하게 대상의 본질을 꿰뚫는 재치, 일러스트는 뎃생 실력보다 ‘느낌’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지리산 자락에 콕 박혀 여전히 연마 중인 수준급 그림 실력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느낌이라는 녀석까지 제법 알아 챈 것 같으니, 그에게 더 무슨 말을 할까.


임진아
“곡식들이 대야마다 소복하게 담겨있는 모양새가 너무 예뻐 보여요.” 귀농한 젊은 농부가 뱉을 말한 이 대사는, ‘착한 농부’라는 한글이 착하게 적힌 티셔츠를 입은 일러스트레이터 임진아가 한 말이다. 쌀과 여러 잡곡이 담긴 대야, 농부와 농부가 흘리는 땀이 그냥 예뻐 보인다는 스물 네 살. 마크 제이콥스의 플랫 슈즈를 보고 쏟아대는 감탄사가 이보다 더 예쁠까. 어쩌면 임진아의 그림이 독특한 이유도, 이 ‘예쁘다’의 기준이 또래 친구들의 그것과 갖는 차이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그녀는 곡식이 담긴 대야와 농부의 땀을 부서진 나무 조각과 돌멩이, 그리고 쌀 포대 등에 마치 어린 애 낙서처럼 편안한 드로잉으로 그려왔다. 쌀 포대에 그린 그림을 티셔츠와 가방에 프린트해보자는 제안은, 예쁘다의 기준이 임진아와 상통하는, 마치 오래된 친구 사이 같은 브랜드 ‘쌈지’가 먼저였다. 사실 그간 쌈지가 아껴왔던 작가들, 이를테면 이진경이나 노석미의 작품과 임진아의 그것이 언뜻 유사한 느낌이 없지 않다. 하지만 그녀는 스타일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과 취향에서 이 선배 작가들의 영향 아래 놓이는 듯하다. 작고 하찮은 것들의 소중함, 먹고 마시고 일의 숭고함을 아는…. 현재 일상예술창작센터의 디자인그룹 ‘스튜디오 0.8’의 일원으로 활동 중인 그녀는, 그렇게 스스로 예쁘다고 여기는 것들을 이곳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욕심이다. 최근 스튜디오 0.8의 ‘신상’으로 업데이트 된 제품은, 군산 월명동의 오래된 적산가옥을 드로잉한 일러스트 배지다. 에디터는 그 배지가 참 예쁘다.


정원교
최근 출판물 일러스트의 큰 특징이라면 남성 일러스트레이터들의 활약이 도드라진다는 점이다. 권신아로 대표되는 여성 작가들의 선전이 여전하지만, 김시훈을 위시해 거칠면서도 섬세하고 힘이 느껴지면서도 아기자기한 일러스트가 크게 각광받고 있다. 정원교 역시 뜨겁게 떠오르고 있는 남성 일러스트레이터 중 한 명이다. 현재 <지큐 코리아> 와 <에스콰이어> , <씨네21> 등 유명 매거진에 정기적으로 작업을 발표하고 있으니 다른 일러스트레이터들의 견제를 한 몸에 받고 있을 터. 해당 기사의 컨셉트를 똑똑하게 해석하고 색깔 있게 표현하는 발군의 일러스트로도 무리에서 유독 눈에 띄지만, 그보다는 일러스트의 영역을 한 뼘 아니 세 뼘 정도 확장시켜보려는 정원교의 실험 정신이 과연 ‘군계일학’이다.『새크리파이스』와『실격사원』, 그리고『디자인 생각』등의 단행본 표지 뿐 아니라 티셔츠와 공연장 등 다양한 매체에 자신의 일러스트가 쓰일 수 있다는 열린 생각. “계속해서 이 일을 하려면 스스로 납득할 내적 동기가 끊임없이 필요한 것 같아요.” 특히 지난 프린지페스티벌에서 있었던, 무용 공연과 더불어 진행되었던 그의 즉흥 드로잉은 그 자유로운 선만큼이나 일러스트의 매체 한계가 끝이 없으리라는 점을 상기시켰다. 궁극적으로 『지미 코리건』의 크리스 웨어, 『혜성을 닮은 방』의 김한민 등과 같이 오롯한 독자적 세계관을 가진 ‘그래픽 노블 작가’로 성장하고 싶다는 정원교. 지금 이대로 그의 행보가 이어진다면 그 꿈이 몇 년 후에는 꼭 이뤄지리라 생각한다.


김가영
굴러가는 개똥만 봐도 웃음이 나는 나이. 스물 넷 김가영을 만나서 옛 어른들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말을 시작하면 1분도 채 못 참고 웃음을 터트리는 그녀. 입을 가리기도 전에 이미 얼굴부터 웃기 시작하는 김가영은 구김살 없이 해맑은 그녀의 그림과 닮아있다. 자유롭게 흘러 드는 드로잉이 그렇고, 알록달록 다채로운 컬러 팔레트도 그렇다. 그렇다고 말하자 되려 그녀는, 바로 그 점이 최근 가장 큰 고민거리라고 털어 놓는다. mqpm의 소속 작가로 활동 중인 이가영이 많이 받는 지적이 “너무 프리하다”라는 것. 일러스트레이터 지망생 시절, 경복궁 앞 돌의자에 앉아 해가 다 지도록 그림을 그릴 정도였으니 생각보다 손이 먼저 나가는 이 습관을 어떻게 고칠 수 있으랴. 걱정은 또 있다. 모 베이커리 브랜드의 의뢰로 배달 상자에 삽입할 그림을 그려줬는데 몇 달째 프로젝트가 연기되고 있다고. 이야기를 거듭할수록 금방 울상이 된다. “아마 슬럼프가 찾아온 것 같아요.” 이럴 때는 무조건 칭찬이 필요한 법. 일러스트가 참 좋다고, 그래서 우리가 만난 거라고 말하자 또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는 그녀. “싸이월드 미니홈피 다이어리에 힘들다, 슬럼프 같다 적어놓으면 힘내라고 쪽지 보내주시는 팬 분들이 계세요. 친구들도 항상 응원해주고. 열심히 해야죠.”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포토그래퍼가 덩달아 티셔츠 속 그림이 예쁘다고, 작가를 닮은 것 같고 말한다. “원래는 토끼 그림 티셔츠 입고 싶었는데, 친구가 이거 입고 가라고 해서…” 또 1분을 못 참고 웃음을 터트린다.


김형일
snailti. 달팽이(snail)와 이(tooth)의 합성어인 ‘스네일티’는 김형일의 대표 캐릭터이자 그의 닉네임이다. 연약한 달팽이라도 밟으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다는 뜻일까. 상반되는 두 가지 요소가 뒤엉켜 만들어내는 뜻밖의 어울림을 추구하는 그는, 스스로를 ‘그래픽 일러스트레이터’라는 조어로 소개한다. 컴퓨터 그래픽과 일러스트레이션이 결합된 제 작업의 독특함을 이렇듯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 그는 “표현보다 의미와 개념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아이콘그래픽(iconGraphic), 아이콘그램(IconGram), 모듈그램(ModuleGram) 등 김형일이 만들어낸 이 조어들 역시 제 작업의 의미와 개념을 적확하게 구분 지으려는 의도다. “다르게 가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커요.” 그리고 이것은 나는 누구이며, 내 작업은 어떤가 라는 스스로에게 던진 진중한 질문을 통해 얻은 해답이다. 대학 3학년 때 열 차례가 넘는 크고 작은 전시에 참여했던 그가, 대학 졸업반 시절에 접어들어 GUI 디자인을 열심히 공부한 것도 바로 그 질문 때문이었다. 현재 (주)코원시스템의 GUI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 김형일은, 현장에서 배운 것들이 그의 그래픽 일러스트 작업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리라 기대하고 있다. 먼 미래를 위해 자기 앞의 생을 차근차근 준비하는 청춘. 앞으로 김형일은 “아이콘을 통한 풍경을 통한 아이콘” 작업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아직은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또 금새 명쾌한 조어로 우리를 설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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