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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 리뷰

허영 속에 진실을 심은 풍운아, 페터 파울 루벤스 ②

2010-12-13


그때나 지금이나 이른바 마케팅에는 유행의 파악이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루벤스가 올라탈 수 있었던 16세기 유럽의 유행은 무엇이었을까? 일단 루벤스 주위를 들춰보자. 그가 자라났던 고향 플랑드르(영어명 플랜더스) 출신 작가들의 화풍을 통해 유추해 보건대, 그들의 전통적인 신념은 바로 작가의 그림을 그리는 순간의 즐거움을 여과 없이 나타냄으로써 보는 관객들에게 그 재미를 전염시키는 것에 있었다.

글 | 남대남 일러스트라이터( statchs@hotmail.com)
에디터 | 이은정(ejlee@jungle.co.kr)


재미와 즐거움의 전파라. 꽤 그럴싸한 소리다. 이 정도 가치관이라면 목적이 뚜렷하지 않았을 성장기의 젊은이에게는 상당히 큰 설득력을 지니고 다가오기 마련. 이 플랑드르 화가들의 신념은 그 지방에서 젊은 날을 보낸 촌뜨기 환쟁이 루벤스에게 고스란히 전이되어 그의 평생 신조로서 자리잡았다.

그러므로 루벤스가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로 유학을 떠났을 때는 스스로의 목적도 모르는 채 구름 잡는 심정으로 어정어정 간 게 아니라 확실한 목표와 신념을 가지고 수단을 배우러 간 셈이라는 말이 된다. 그곳에서 웅장하고도 허세와 허영이 파도 치는 커다란 스케일의 바로크 미술을 배워 옵션으로 장착한 서른 살의 루벤스는 귀향하자마자 바로 홈런을 한 방 날리며 그 화려한 커리어를 시작했다.그가 촌티를 벗고 돌아왔을 무렵 당시 플랑드르 화가들이 그리는 작품들은 여전히 스케일이나 크기가 작은 대신 허세와 허영이 적은 정직한 그림들이었는데, 루벤스가 그려내기 시작한 초대형 스케일의 그림들은 그 바로크의 장엄한 허영과 능동 속에서 플랑드르 식의 전파력을 드러낸 거다.

능동 더하기 전파는 관객의 압도가 되는데, 압도적인 위엄으로서 자신의 권위를 돋보이게 하고 싶었던 가톨릭 계열의 군주들에게 이 뉴에이지, 그러니까 바로키안 플랑드르 미술을 구사하는 달변의 유학파 매력남이 눈 앞에 나타났다? 이미 유럽의 상류층 인사들은 적수를 찾아보기 어려운 이 신진고수의 등장에 미친 듯이 열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플랑드르 화가의 기본자세인 이 '재미의 전파'를 잊지 않고 간직하여 스스로의 작품생활에서 절대 흔들리지 않는 철학으로 삼았는데, 그것은 루벤스 자신이 인간의 무한한 감정 가운데 하나인 허영심을 아예 자기 내면의 에너지원으로 삼아버리고 그러한 허세의 파도를 진심으로 즐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림의 크기와 스케일이 커져갈 수록 내면의 허세에 충실하게 되어 점점 더 진실해 지면서 재미를 드러내기 용이해 졌고, 또 그럴 수록 타인에게 감명과 공감을 불러일으키면서 거대한 그림 속에서 폭출해 나오는 능동의 힘으로 관객의 감성을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송두리째 압도시켜 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작품의 크기나 등장인물의 스케일이 커져갈수록 루벤스의 그림은 그만큼 더 솔직해 지고 설득력이 커져만 갔는데, 그에 비례하여 인기는 높아만 간 것 역시 허영이 파도 치던 중세의 유럽에서 당연한 일이다. 급기야 베네치아 유학시절 뼈빠지게 배웠던 해박한 라틴어 지식까지 사용하여 외교 서 너 번 '즐기고' 나자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4세와 잉글랜드 국왕 찰스1세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양국의 기사 작위를 수여해 주었다. 화가가 기사 작위를 받는 게 별 소용이 없을 것 같은가? 천만에! 당장 주문자의 신분과 횟수, 보수의 액수와 지명도가 180도 달라진다. 그때는 작위 하나에 인생 꽃피는 시절이었다.

실제로 그렇잖아도 잘나가고 있었던 루벤스의 작품은 본격적으로 이 다음부터 폭발적인 유행을 탔고, 이내 주문이 해일처럼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베네치아와 플랑드르, 에스파니아와 잉글랜드 등 각지의 군주들로부터 약 3000 점이 넘는 다량의 주문을 받았고 그것들을 모두 해결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이는 라파엘로의 로마 화실 이후 가장 거대한 공방이었던 안트워프 아틀리에를 열어놓고 풀가동한 댓가다.

아틀리에 풀가동이 무슨 소리냐고? 1960년대부터 1980년대를 주름잡았던 대한민국의 만화가게 열풍 속에서 히트작가들이 한 달에 100권이 넘는 신간을 진열할 수 있었던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바로 문하생 시스템이다. 히트작가의 이름만 빌린 채 문하생들이 그려낸 저급한 작품들에 진짜 히트작가는 서명만 날인함으로써 이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루벤스의 안트워프 아틀리에도 마찬가지 시스템이었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로는 이 3000점에 달하는 그의 작품 모두가 진작이라고 볼 수 없다. 주문을 받은 루벤스는 작은 스케치만을 그렸을 뿐, 실제적인 작업은 그의 제자들이 다 했다. 채색까지 마쳐진 그림에 대고 루벤스는 특정 부분을 완화, 혹은 강조한다거나 하는 식의 몇 번의 터치만을 집어넣었고,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수준의 작품이 나왔을 경우 비로소 서명하여 출고하였을 뿐이다. 요즘으로 치자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매장당해 마땅한 일이겠지만 일단 그의 제자군을 형성했던 젊은 화가들이 루벤스의 안트워프 아틀리에에 나가면서 그에게서 무언가를 배우고자 하는 열망에 불탔던 자발적 봉사자들이었으며 그의 아틀리에가 플랑드르 화가들의 수련장으로서 기능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만화가게의 히트작가들과 루벤스가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루벤스 본인부터가 자신의 터치에 대한 열렬한 신봉자였다는데 있다. 실제로 루벤스는 단지 터치 몇 개만을 '자신이 '직접' 추가함으로써 아무리 허접한 작품이라도 단번에 명화로 탈바꿈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생애를 걸쳐 남긴 3000 번의 시도에서 단 한번도 실패하지 않았다. 이쯤 되면 잘잘못을 떠나 그 재능에 혀를 내두르며 허탈하게 웃을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본인 역시 그것을 드러내어 보여주기를 원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그러한 '협잡'에 어떠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기 보다는 그의 후원자들이 그것을 볼 경우 작품의 가격이 하락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 즉 마케팅적 요인 때문이었다. 그래서 후원자들이 아틀리에를 방문하는 날이면 그는 여태껏 자기 대신 그림을 그리던 제자들에게 갑자기 원료를 합성하여 물감을 조합하거나 하는 허드렛일들을 시켜놓고 전망 좋은 베란다에 어느 정도 완성된 댓자 캔버스를 수 십 개 가져다 놓은 다음, 후원자들이 보는 앞에서 2미터가 넘는 붓을 휘둘러 그것들을 순식간에 완성시킴으로써 자신의 내면에 내재되어 있던 열정을 과시하는 '사기'를 치곤 했던 거다.

후원자들이 루벤스의 막강 포스에 압도되어 돈과 보석을 내놓으며 이 불세출의 에너자이저에게 경배와 찬탄을 아끼지 않았음은 두 말하면 잔소리.

실제로 루벤스는 허영과 사치, 허세와 권위를 드러내는 장대한 스케일의 그림을 즐겨 그렸고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길을 마다한 일이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단지 바로크 시대를 살다 간 하나의 속물이라고 부르지 못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근본적으로 그 자신의 끝없는 포용력을 에너지원으로 삼아 끝없이 변화하며 스스로의 재미를 추구함으로써 그 즐거움을 타인에게 전파하려는 신념을 꾸준히 지켜나갔던 진짜배기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유학하던 애송이 시절부터 한창 뜰 무렵이 되어 외교관으로 각지를 방문하는 동안에도 한결같이 고대부터 당대에 이르는 수많은 화가들의 작품을 미친 듯이 모사하며 익혀나갔다. 당시를 휘어잡고 선도하는 유명화가로서 평생을 살았지만 자신이 주도하지 않았던 어떠한 미술적 사조에 대해서도 무시하거나 시기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익히고 자신에게 보태는 것에 손톱만큼도 인색하지 않았다. 비록 그 자신은 어떤 미술적 운동이나 사조에도 가입하지 않았지만 마찬가지로 반동도 보이지 않음으로써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꾸준히 응시해 나갔고, 그렇게 외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스스로에게 보탬으로서 그것을 또 다른 자아 변화의 원천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는 근본적으로 끝없는 정열과 정보의 파도 속에서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놓치지 않고 자신에게 덧붙여 스스로를 풍요롭게 만드는 인간이었고, 스스로의 위치에서 만날 수 있는 모든 것을 포용하여 가급적이면 크고 장대하게 노출할 수 있기를 염원했다. 그러한 노력의 댓가로 무언가가 그의 내면에 덧붙여질 수록 허영심과 허세의 크기 역시 이루 말할 수 없이 늘어났지만 그것이 어색하거나 추해 보이지 않는 이유는 본인 스스로가 그러한 허영을 마땅히 가져야 할 작가적 욕심으로 생각하여 자랑스러워 하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는 스스로의 기본성향에 허세와 허영을 기본 옵션으로 덧붙임으로써 단순히 부와 명예를 쫓는 천박한 속물이 아니라 진정한 예술가로서의 자신을 단 한번도 잃지 않을 수 있었고, 스스로의 놀라운 재능에 힘입어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바로크 예술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보았는가? 그저 그런 속물과 진정한 예술가는 이렇게 종이 한 장만큼의 차이라는 것을.


이 루벤스 마케팅의 절정은 끼워팔기에서 드러났다. 평생 그린 그림은 3000점뿐이지만, 그는 눈 여겨 보고 있던 젊은 화가들의 작품을 사들인 후 그것을 '불세출의 거장 루벤스가 눈 여겨 보았던 유망한 젊은이의 그림들'이라는 명목으로 자신의 작품에 끼워 팔았다. 물론 싼 가격일 리가 없다. 그건 루벤스의 눈에 띄어 보증을 받는 순간, 듣보잡에서 유망주의 그림으로 파워업되기 마련이니 즉. 보증수표나 다름없는 루벤스의 이름을 사는 셈이라 루벤스가 미치지 않고서야 자기 이름에 절대 싼 가격을 매길 리가 없는 것이다. 이로써 별볼일 없던 가난한 화가는 순식간에 불세출의 화가 루벤스의 안목을 만족시킨 유망주가 되어 주목을 받으며 뜨게 되고, 루벤스는 돈을 벌고. 꿩 먹고, 알 먹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실제로 그 유망주 가운데 쓸만한 작가는 더러 루벤스의 화실로 스카웃되었고, 그의 아틀리에에서 그림을 배우는 작업 속에서 기술을 발전시켰다. 루벤스에 버금간다는 평가를 받는 천재 안토니 반다이크 역시 루벤스의 안트워프 아틀리에에서 5년간의 노가다를 통해 태어날 수 있었다.

모든 사고의 주체는 언제나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 끝나는 순간 세상 또한 끝장난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는 모든 것을 주재하는 절대적인 존재, 즉 우리 자신이 더 이상의 사고활동을 정지시키기 때문인데, 생각이 정지하는 순간 세상도 정지한다는 식의 논리를 살짝 뒤집어 말해 보면 곧 내면 깊숙이 품고 있던 생각의 변화 한 자락에 세상은 얼마든지 다른 얼굴을 보여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아주 오래 전 누군가는 말했나 보다.


" 세상을 사랑하는 자만이 세상에게 사랑 받을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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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정
잡지디자이너 과심은 여러분야에 관심은 많으나 노력은 부족함 디자인계에 정보를 알고싶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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