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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 리뷰

평범을 쪼개어 써나간 일기_신동민의 똥까페

2010-12-24


새천년이 밝아오기 이전, 프랑스 어느 중부도시를 얼쩡거리다가 재미있는 것을 본 일이 있었다. 그날은 장날이었고 전국적인 여름 세일기간이었는데 남대문 시장에서 흔히 보던 식의, 높이 1미터 가량의 목조 좌판대 위에서 카우보이 모자를 쓴 아저씨들이 무척이나 귀에 익숙한 리듬에 맞춰 박수를 치고 발을 구르며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 쿵짝 쿵짝 쿵짜라짝짝! 10프랑! 10프랑! 여기 전부 10프랑! 쿵짝 쿵짝 쿵짜라짝짝!

결국 사람 살아가는 모습이란 것은 결국 세상 어디나 다를 바 없다. 그리고 그 다를 것 없는 모습을 찾아 깨닫기 위해 나는 지구 반대편을 돌았던 거다. 이국적인 풍물과 신기한 건축물, 희한한 풍속에 가려져 있었을 따름일 뿐 사실 남대문 시장 그 아저씨나 보르도 생 캬트린 거리의 그 아저씨나 다를 바 하나 없었을 텐데. 곡조나 어투, 그리고 그러한 행위의 목적까지도 말이다.

글|남대남 일러스트라이터( statchs@hotmail.com)
에디터|이은정(ejlee@jungle.co.kr)


이렇게 지구상 어디를 가던 비슷한 마음씨를 가진 인간들이 살고 있다. 성선설과 성악설이 팽팽하게 겨루며 몇 천 년을 내리 흐를 정도로 변화무쌍한 사람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 이기적이면서도 사람이기에 서로 나눌 수 있는 정이 흐르고, 그렇게 착하면서도 적당히 찌질한 사람들.

그들에게서 무언가 공통점을 찾아낼 수 있다면, 그건 우리의 본질 그 자체가 될 터이다. 우리 역시 인간이라는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결국 본질이란 공통된 형질을 말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타인을 보아 자신의 본질을 깨달을 수 있다는 아주 기초적인 공식이 증명되는데 여기서 잠깐. 타인을 보아 자신을 알 수 있다면, 인간의 본질을 그려야 하는 사람은 타인의 모습에서 무엇을 찾아 어떻게 그려낼 것인가. 물론 거기에 대한 정답 같은 것은 없다. 타인을, 자신을,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세상을 보는 눈은 개인마다 모두 다른 법이니까. 하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세상을 재어보려 노력하면서 어느 정도의 가시적 성공을 가진 사람은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람들 중의 하나가 바로 똥카페의 주인, '신똥' 신동민이다.



일러스트레이터 신동민의 똥카페라는 작품집이다. 이것은 어른을 위한 그림동화와 카툰이 적절하게 혼합된 모습으로 출간되어 있지만 엄밀히 말해서 일러스트레이터가 웹 상에서 가끔씩 적어간 그림일기의 모음집이다. 웹 상에서 똥카페라는 키워드로 각종 포탈을 검색해 보면 그의 작품에 대한 평이 실려있는 글타래들을 볼 수 있는데, 그들 대개의 의견을 취합하여 공통점을 찾아 에누리하면서 추출하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타난다.



" 작가 신동민은 똘끼가 좀 있지만, 작품 자체는 부정하고 싶지 않다. "

한두 사람이 이런 글을 쓴 것이 아니다. 전반적으로 나이든 사람은 자신의 연륜만큼 읽어내고, 나이가 어린 사람은 작가가 펼치는 삶 속의 개그에 웃고 마는 식이다. 개중에는 큰 공감을 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지만, 적어도 부정한 사람은 적었다. 신동민은 단지 자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소소한 일상 속에서 스스로가 바라보는 세상을 그려나갔을 뿐인데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그의 작품 속에는 주인공 격인 "신똥"과 함께, 아주 어린 시절부터 함께 해 오며 그의 자아와 초자아를 대변하는 나레이터, 곰댕이와 곰식이라는 인물들이 조연으로 등장한다. 하얀 곰 곰댕이와 푸른 곰 곰식이는 항상 주인공 '신똥'의 내면을 대변하는 상상 속의 존재들이다. 똥카페는 이 세 인물이 신똥이 직면하는 인생의 세파 속에서 자신의 방식대로 각각 그것을 번역하여 보여주는 옴니버스식의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이어지는 방식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부터 대부분의 현대인이 동질의식을 느끼게 하는 내용이 시작된다.

무인도에서 외로움에 시달리던 주인공이 윌슨과 나누는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게 웃겨서 웃더라도 웃음이 아니다. 항상 착한 소리만 하는 곰댕이가 이성과 신중, 질서를 상징한다면 입이 험하지만 솔직한 곰식이는 감성,충동, 그리고 욕망을 대변한다. 그리고 대충대충 살아가면서 당면한 문제에 끝없는 외로움을 느끼는 주인공, 소심노총각 신똥은 현대인의 전매특허인 "소심하기 짝이 없는 우리들"의 그 모습이다. 그래서 작중 드러나는 그의 지각은 습관적이고, 간신히 '그녀'를 사귀어도 데이트를 건너뛰고 회사 생활에 고달픈 몸을 누이느라 끙끙대기 일쑤가 되며, 항상 곰댕이와 곰식이가 그를 위로하거나 안쓰럽게 챙겨주려 한다. 이 일인 삼역의 릴레이가 정신분열의 초기적 증상일까? 놀랍게도 답은, 그렇다.

하지만 병원에 갈 일까지는 아니다. 과연 우리 중 몇 명이나 이런 정신분열증을 겪지 않을 수 있을까. 작가의 이성의 상징인 흰 곰인형 곰댕이와 감성의 상징, 푸른색 곰인형 곰식이는 작가의 바깥에서 작가를 바라볼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실행한다. 이게 그의 작품이 가진 공감대의 열쇠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쉽사리 설명이 되지 못한다. 자아분열은 설명을 위한 하나의 장치일 뿐이지 설명하고자 마음먹는 대상은 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곰댕이와 곰식이의 모습, 그리고 신똥의 그림체나 화풍에 공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마주하는 사건과 나누는 대화에 동조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신동민이 자아를 분열시켜가면서까지 지키고 싶어하는 주제는 무엇일까.

우리는 세상이 따뜻하다는 사실을 믿고 싶어한다. 소름 끼치도록 외롭고, 퍽퍽하게 지나가는 하루 속에서, 다람쥐 쳇바퀴 같기만 한 같은 세상의 모습도 결국 받아들이기에 따라 얼마든지 따스할 수 있다는 사실. 거기에 위안을 느끼고 동의하고 싶어한다. 신동민이 보여주는 세상의 모습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러나 그냥 세상은 따뜻한 거라며 들입다 미담만 잔뜩 그려 보여주면 독자들은 갑자기 부담을 느끼고 부처님 같은 소리를 한다며 외면하기 쉽다. 그래서 신동민은 '배려' 내지는 '사기'를 치기 시작하는데, 그게 바로 그가 바라보는 세상을 제삼자의 시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신똥이 무슨 꼴을 당하던 간에, 그의 이성과 감성은 가슴 아파할지언정 그걸 자신의 직접적인 문제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렇기에 한 겹 걸러 바라볼 수 있는 것이 되고 그렇게 바라보는 것은 놀랍게도 제삼자의 시각이 되는 것이며, 그렇게 전면에서 한발 후퇴하여 바라봄으로써 작가 신동민은 본인이되 본인이 아닌 '신똥이 당면한 세상'을 제삼자의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아무런 이유 없이 제삼자의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그건 병원에 가 보아야 할 일이지만, 천만 다행히도 신동민은 그림을 그리는 작가 아닌가. 그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직접적으로 당면한 냉엄한 세상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그려내면서 대책 없이 독자에게 그걸 들이대어 부담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한 겹 걸러 승화시킨 세상의 모습을 조심스레 독자에게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다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동민의 똥카페는 편안한 책이 되었다.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강요하는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 만사는 대개 기브 앤 테이크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그렇게 배려 받은 독자는 그 댓가로 중요한 것을 작가에게 주기 쉬운데, 그것은 바로 일러스트레이터가 목숨처럼 찾아 헤매는 그것. ‘공감’이 된다. 그의 그림책에 대해 공감을 느끼고 무언가를 생각하려 드는 사람은 십중팔구 적어도 아직은 여유가 있는 사람일 테고, 그 여유 속에서 작가 신동민의 배려 섞인 따스한 마음을 느끼고 동조하려 들 테니까 말이다. 신동민이 그려낸, 자신의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그 자신부터 배려를 하며 받아들이기 때문에 한 겹 걸러진 상태가 되어 따뜻하다. 그는 외로울 지 모르지만 세상 모든 것이 신똥을 공격한다 해도, 적어도 곰식이와 곰댕이는 자신의 편일 것을 알기에 여유로운 마음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 그렇게 스스로 바라보는 따뜻한 세상이 세월과 함께 서서히 흘러가는 장엄한 모습 속에서, 신똥은 주말마다 비를 즐기며 스스로에게 걸린 저주를 만끽하려 들 것이다.

물론 결국 이것은 신동민이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의 그림에 동조를 느낀 사람 가운데 몇이나 그것을 부정하고 싶을까. 그것들은 각박하게 돌아가는 대한민국 서울에서 이제 삼십대 후반에서 사십대에 접어든 사람이 살아가며 마주칠 수 있는 일들의 나열이다. 그리고 신똥이 바라본 세상의 모습은 결국 사람이 살아가며 마주할 수 있는 일들의 모습이고, 그 일들은 결국 어딜 가나 동일하다. 사십대 디자이너가 대한민국 서울에서 고되게 일한다면, 지구 반대편 서유럽의 사십대 직장인도 피곤해서 코피 터지고 있기 십상이고 브로드웨이의 사십대 일러스트레이터도 다리를 후들거리며 일할 수밖에 없다. 서울의 직장인이 이기적이기 짝이 없다면 맨하탄의 디자이너도 약삭빠르기로는 빠지지 않을 것이고, 런던의 일러스트레이터도 부지런히 자기 밥그릇을 챙길 것이다.

그렇게 사람은 어딜 가던지 공통적인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무작정 미담만 기대하며 따스하게 바라본다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세상은 얼마든지 따뜻하지 않을 수 있다. 이기적이고, 냉혹하며, 잔인하기조차 한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자세에 있다. 따스하게 바라보려 노력한다는 것. 찌질하고 추잡한 것조차 따스하게 바라보려 든다는 것은 관객을 배려함으로써 공감을 얻으려 노력하는 일러스트레이터가 찾아내어야 하는 정답 중 하나이다. 이것에 있어서 실제로 따뜻한가 아니면 차가운가의 사실 여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세상이 만화경이어서 요지경같이 돌아가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다는 반야심경의 구절 불구부정(不坵不淨) 그대로라면, 결국 공(空)에 불과한 세상의 모습이란 것은 따지기조차 우스운 노릇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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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정
잡지디자이너 과심은 여러분야에 관심은 많으나 노력은 부족함 디자인계에 정보를 알고싶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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