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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 리뷰

인생의 낙오자, 삶의 승자 빈센트 반 고흐 ①

2011-01-11


1890년 7월 29일의 맑은 날, 벌판 한 복판에서 사내는 방아쇠를 당겼다. 쇠뭉치로 맞은 것처럼 둔중한 충격이 가슴에서 퍼져나가 사내를 격렬하게 밀어붙였고,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는 왼발을 뒤로 디뎌 몸을 지탱해야 했다. 전쟁터에서 돌아왔던 퇴역군인 친구가 말해준 것처럼 화끈한 통증이 퍼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내는 약간 놀랐다.

- 그래, 하긴 그 친구는 원래 허풍이 좀 센 편이었지. 재미있는 친구였어..

사내는 조그맣게 툴툴거리며 자기 가슴을 내려다 보았다. 심장 옆으로 조그만 구멍이 뚫려있는 것이 보였다. 방아쇠를 당기면서 손을 떨었던 모양이다. 그것을 확인하자, 그제서야 다리와 팔에서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정확히 심장을 뚫지 못하면 고통 속에서 죽어갈 수 밖에 없다는 그 친구의 뒷말이 슬며시 떠올랐기 때문에, 사내는 문득 공포스러워 졌다. 자기를 수많은 세월 동안 배신해 왔던 용서할 수 없는 배반자는 반드시 죽여야 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글 | 남대남 일러스트라이터( statchs@hotmail.com)
에디터 | 이은정(ejlee@jungle.co.kr)

사내는 무릎을 꿇고 앉아있다가, 팔에 힘이 빠져나가기 전에 손을 들어 심장을 겨냥한 후 한번 더 방아쇠를 당길 심산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그가 사랑했던 것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눈을 들었다. 잡초와 잡풀이 우거져있는 여름의 벌판이 눈에 들어왔다. 자지러지는 매미소리에 맞추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태양광선이 그의 무릎을 꺾어놓고 있었고, 산들바람이 불어 머리카락을 흔들 때 사내는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음을 알았다. 동생과 친구, 동지들이 자기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사내는 미소를 지을까 말까 잠깐 고민했지만, 가슴에서 시작된 통증이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느끼자 더 이상 시간이 없음을 알았다. 어느새 권총은 재봉틀처럼 묵직해져 있었다.

정신병원에서 요양 중이던 사회주의자의 자살사건은 당시 별로 대수로운 화제거리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몇 년, 아니 몇 십 년이 지나자 상황은 전혀 딴판으로 변해 버렸다. 살아생전 만 여 점의 작품을 남겼지만 하나도 판매하지 못했던 그의 작품들은 가격을 따질 수 없는 명작으로 추앙 받았고, 사내의 화풍을 따르며 복습하는 사람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동양 어느 나라에서는 사내의 행적마저 하나의 우상으로 자리잡아, 내성적이고도 신경질적이었던 그의 모습은 소위 '예술가적인 행동'의 모델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사내가 살아 생전 누구를 배신했으며, 거의 동시에 누구에게 배신당해 상처 입은 나머지 마흔도 되지 않았던 자신의 생명을 끊어야 했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사내의 이름은 반 고흐, 빈센트 빌렘 반 고흐였다.

세상은 하나가 아니다. 무슨 판타지 소설에 곁다리로 끼워 나오는 겉핥기 식 다차원 이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세상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똑같은 자연 속에서 오랑우탄은 오랑우탄이 살아가는 세상을 바라보고 개들은 개판을 살아가듯이 인간은 인간들의 세상을 바라볼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

우리가 별의별 짓을 다하더라도 세상을 바라보면 어쩔 수 없이 인간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내로라하는 종교 지도자들 역시 금단의 사과를 베어먹고 낙원에서 추방당한 이래 신이 홧김에 그어버린 이 엄중한 한계를 돌파할 수는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굳이 돌파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거겠지만 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나 자연은 지극히 당연하지만 인간이 살아가는 곳이다. 그래서 세상을 바라보면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역설 또한 성립된다. 당연히 누구보다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이 된다. 실제로 그랬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이 바로 빈센트 반 고흐였다.

밤하늘, 아니 작품 전체가 무언가 휘몰아치는 듯한 소용돌이로 가득 차 있다.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듯이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오르고 있는 사이플러스 나무의 어두운 실루엣부터, 밤하늘 전체와 검은 그림자 속으로 숨어버린 지평선의 야산들을 모두 채우고 있는 이 뜻을 알 수 없는 이 터치들은 무엇일까. 멍하니 주변의 대기를 응시하면 가끔 구경할 수 있는 공기 중의 미세한 먼지가 빛에 반사된 모습일까? 딴은 또 그럴 수도 있겠다. 일단 그것이 맞다고 가정한다면, 또 다른 의문이 생긴다. 고흐쯤 되는 화가는 사물을 '그냥 멋'으로 그리지 않는다. 필연적인 비유나 환유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흐는 무엇을 가리켜 이것을 묘사했을까. 그리고 왜 사람이 사는 마을에는 저러한 터치가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1800년대 중엽부터 말엽을 살아갔던 빈센트 반 고흐는 자본주의 체제에 호되게 당하는, 시쳇말로 별볼일 없는 예술가답게 찢어지도록 가난하게 살았다. 그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그의 그림은 당시의 유행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1800년대를 관통하며 흘러가던 유럽의 유행, 정확히 말해 고흐가 돌아다니던 벨기에와 프랑스의 유행은 사실적 자연주의와 아카데미 양식의 장중한 고전주의 어용예술이 치열하게 대립하던 시절이었다.

외젠 들라크루아로 대표되는 아카데믹 아트 양식은 장엄한 소재를 선택하여 거창한 주제를 드러내는 방식의, 프랑스 혁명예찬에나 어울리는 어용예술이었다. 이는 프로파간다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던 정-관계 등 상류층의 지지를 받았고, 그에 반발하여 바르비종이라는, 코딱지만한 시골마을 커뮤니티에서부터 시작된 쿠르베와 밀레의 사실적 자연주의는 고즈넉한 풍경화 같은 것을 토대 삼아 영혼의 안식을 추구하는 일파로서 사실상 아카데미 양식의 반동이었다.

이 상황에서 있는 그대로의 정신과 영혼의 안식에 몰두했던 빈센트 반 고흐가 어느 쪽에 더 끌렸는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목사였던 아버지를 둔 덕분에 어려서부터 고흐는 인간의 영혼과 정신을 관찰하고 사랑하려 들었으므로 어느 정도 성장하자 기독교의 목회자가 되어 인간의 영혼을 구제할 수 있기를 원했다. 그는 모든 것을 집어치우고 전도사가 되어 벨기에 시골 보르나 주의 광산촌에서 평신도를 상대로 전도사업을 시작했지만, 당장 목구멍이 포도청이던 광산촌의 사람들에게 영혼의 구제 같은 뜬 구름 잡는 소리가 먹힐 턱이 없었다. 자본주의에 착취당하던 광부들을 보며 괴로워하던 스물다섯의 내성적인 청년은 여기서 노동자의 모습을 만났고, 그의 정신 깊숙한 곳에 자리했던 신학은 현실참여적인 민중신학으로 슬며시 변화되었다.

그러나 종교의 기본적인 속성은 보수적이다. 정의구현사제단과 궤를 같이 하는 민중신학이 당대의 메인스트림에 합류될 까닭이 없었고, 전도사 자리에서 해고되어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온 고흐는 바르비종 계파의 풍경화가들, 그 중에서도 특히 당시의 전 유럽을 휘어잡았던 반동적 이론인 사회주의에 흠뻑 빠져들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계기를 항구도시 안트워프에서 찾았다. 서른이 조금 넘었을 무렵, 아카데믹한 미술에 대한 반동으로 미술학교를 퇴학당하기 직전의 일년 사이에 고흐는 일본의 우키요에 판화를 찾아낸 거다.

16세기 중반 덕천가강이 오랜 전국시대를 종식하고 일본을 통일한 후 또 다른 내란을 막기 위해 내놓은 정책이 바로 ‘참근 교대제’다. 지방 영주와 가신들을 일정기간 수도에서 정박시키는 이 정책의 실행은 수도 내의 인구를 항상 백만이 넘도록 유지시켰고, 늘어난 인구는 자연스레 ‘아랫도리 만족’의 사회적 욕구를 폭증시켰다. 이는 결국 사창가 ‘요시와라(吉原)’의 건설로 이어졌고, 매춘부 광고전단의 발달에서 우키요에(浮世繪)가 발전했는데, 당시의 그 내용은 나체의 남녀가 침실에서 성관계를 갖거나 여성이 말(馬)]이나 문어와 같은 동물과 수간하고 있는 장면 등이었다. 우키요에는 광고전단의 특색으로 인하여 강렬한 색상을 중시했고, 선풍적인 유행과 함께 수많은 명가를 탄생시켰는데 후대 일본 문인화의 정경묘사 역시 여기서 강렬한 영향을 받았다.

어떻든 반드시 그런 이유 때문에 그랬는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에 의해서인지는 알 수 없어도 고흐는 이 우키요에에 열광했다. 그는 우키요에 판화를 미친 듯이 수집해 나가며 거기에 사용되었던 채색의 색감과 구도, 선의 느낌을 들입다 배워 나갔다. 고흐의 작품에서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색채의 광기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시기부터라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의 촛점은 여전히 사람들과 세상에 머물러 있었다.

색감이 어떻게 변하던, 구도를 어떻게 잡던 관계없이 그는 인간에 대한 관찰을 잊지 않았던 거다. 모든 관찰의 기준은 한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가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은 그가 없이는 무의미하다. 따라서 모든 사고 활동의 기준은 자기 자신이었고, 자기 자신의 감성을 순수하게 지켜나가는 한 세상은 그에게 순수하게 보일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모름지기 돈을 벌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타협이 필수적이다. 당시 화가로서 할 수 있는 세상과의 타협 가운데 가장 일반적인 돈벌이는 바로 누드화였는데, 고흐는 이 누드화를 평생을 통틀어 단 한 점도 그리지 않았다.

하기야 말초적인 누드화를 사랑하는 일단의 구매계층에게 인간의 근원적인 영혼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던 고흐의 그림이 팔리기야 했겠냐만은 그는 뭔가 대단한 의미를 가지고 누드를 경멸한 것이 아니라 돈을 손에 쥐고 달라질 자신을 두려워했던 거다. 그는 타협이야말로 그가 쌓아 올린 감성의 둑에 조그마한 상처밖에 안 되겠지만 필연적으로는 패배를 불러오고야 말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타협을 거부한 대신 그는 동료들을 만났다. 모든 노동자 계급, 즉 프롤레타리아를 규합하되 뜬금없는 부르주아 타도는 신께서 바라는 바가 아닐 테니 집어치우고, 그냥 노동자들끼리 뭉쳐서 주의 이름으로 된 공동체를 구성하자는 사상에 깊게 빠져든 것이다. 이건 바로 공상적 사회주의, 혹은 생시몽주의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일종의 사회주의로, 이때 만났던 그의 동반자이자 라이벌이던 폴 고갱의 어머니는 바로 이 생시몽 주의의 전사로 더할 나위 없이 극렬한 지지자였다. 어린아이를 상대로 한 치맛바람의 위력이야 동서고금을 통틀어 무소불위의 힘을 자랑하는 법. 가련한 고갱이 무슨 생각을 하며 자라야 했는지는 안 봐도 뻔한 노릇이다.

폴 고갱을 만남으로서 고흐는 생시몽주의 노선에 깊게 빠져들었다. 그가 제시하는 모든 청사진은 선명한 노란빛으로 물들어, 그의 앞길을 휘황하게 빛내고 있었다. 자신과 같은 고독한, 그리고 외로운 작가들을 모아 공동체를 구성한다! 이것은 불특정 누군가에게 이해 받기 위해 죽어라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기약 없는 노동과는 차원이 달랐다. 웬만한 사람은 누구나 한번쯤은 사회주의를 꿈꾼다. 모든 친한 친구들과 함께 같은 건물에 모여 살고 싶다는 꿈. 다름이 아니라 바로 이게 사회주의의 시초다. 그리고 고흐에게는 이게 더 강렬한 꿈으로 다가왔다. 눈에 보여주기 위한 가시적인 목적, 자신의 그림을, 그리고 더 나아가 자기자신 그 자체를 이해해 줄 수 있는 누군가와 함께 생활하며 그림을 그린다! 이게 가능하다면 다른 누구도 자신들을 이해해 주지 않아도 좋았다. 그때가 오면 그는 이미 그 작은 사회 속에서 외로움을 벗어 던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고흐는 생시몽주의의 사회주의적 유토피아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반공교육에 열을 올렸던 대한민국에서는 그리 알려지지 않았겠지만, 사상적으로 나눌 때 고흐는 사실 더할 수 없이 극렬한 골수 사회주의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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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정
잡지디자이너 과심은 여러분야에 관심은 많으나 노력은 부족함 디자인계에 정보를 알고싶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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