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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 리뷰

종로경찰서에 쫓기던 화가, 이하

2011-12-20


“예술은 살롱에 걸려있는 그림에 국한되기 때문에 공공장소에 붙이는 벽보를 포함하지는 않는다.” 지금은 오르셰 미술관의 한켠에 개인의 전시실이 상설되어 있는 어엿한 예술가 오노레 도미에가 국왕 루이 필립의 캐리커쳐 풍자화를 거리에 붙인 죄로 파리 법원에서 실형을 언도받을때 명시된 예술작품과 예술활동의 의미다.

물론 이는 오늘날 보다 많은 이들의 곁으로 다가오려는 예술, 특히 근현대 예술의 주류를 점하고 있는 팝아트 사조의 태생적인 본능에 대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한마디로 말도 안되는 소리이기도 하다. 그나마 이 선고문이 비웃음을 살 지언 정 욕을 들어먹지 않는 것은 이것이 인상주의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던 시절인 18세기에 선고되었다는 점이고, 세상에서 가장 불공평한 일 중의 하나가 바로 과거의 인간을 현재의 잣대로 재단하는 것이라는 바버라 터크만의 용인구를 되새기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이러한 잣대를 아직도 유지하려는 나라가 있다. 기아와 내전에 시달리는 아프리카의 이야기라면 일견 이해를 할지도 모르겠다만, 그게 아니라 올림픽과 월드컵을 개최했으며 지하철 역사마다 평면LCD가 즐비한 극동아시아의 어느 나라 이야기다.

글 | 남대남 일러스트라이터( statchs@hotmail.com)

지금은 미국 텍사스에 작업실을 가지고 있는 화가 이하, 신문의 기사에 따르면 재미작가 이모씨(43)가 경찰에 연행되었을 때 그에게 걸린 죄상은 이명박 대통령의 초상을 그려 묘동 일대의 버스정류장에 붙였다는 명목이었다.

일년에 두세 번 이상 정기적으로 한국에 돌아와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곤 하던 이하 작가가 일을 실행하기 전 G20 포스터의 훼손개작에 따른 판례를 미처 몰랐다고는 생각할 수 없으니 이는 현재의 대한민국 분위기를 감안할 때 어느 정도 각오를 하고 벌인 일일 것이다.

사실 이 일에서 유죄냐 무죄냐, 유죄라면 어느 법을 적용하여 형을 선도할 것이냐는 문제가 아니다. 그 작가가 감옥에 간다고 해서 내 앞날에 먹구름 끼이는 것도 아니고, 명예훼손 어쩌고 해 봐야 벌금 얼마쯤은 낼 수 있는 작가라고 알고 있기에 별로 걱정되지도 않는다.

심지어 실형을 선고 받는다 해도 화가로서 나름의 신념을 위한 철창 신세를 몇 년 진다고 하여 앞날에 먹구름 우장창 끼이는 직종군이 아니니만큼 이것의 진정한 의미는 이것이 G20 포스터의 개작사건에서 따라왔던 유죄판결처럼 공공비품의 훼손이냐 아니면 단지 포스터를 제작해서 붙인 것이기에 훼손이 아닌 만큼 사안이 다르냐는 표피층의 문제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의미는 기자회견에서 알 수 있듯이 이하 작가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처럼 이것이 과연 예술인가 아닌가의 의미일 것이고, 전시작에서 보아왔던 그의 작품 성향처럼 전시장에 걸린 그림들만을 예술만을 국한하며 예술을 감상할 여유가 생기기 전까지 스스로의 곁에서 떨어뜨리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인식에 대한 도전인 것이다.

2차대전 와중에 뉴욕에서 팝아트가 생성되었을 때 예술가들은 그들의 전공종목, 즉 음악이나 무용, 회화나 조각을 막론하고 일제히 열광했다. 앤디 워홀의 수프 깡통이나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만화 콜라주에서는 더 이상 예술이 실내음악이나 풍경화 따위만 그리며 갤러리 안에서 대중을 기다리는 존재로 느껴지지 않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팝아트, 즉 대중적인 예술의 기본적인 취지는 어딘가의 구름 속에 몸을 숨긴 채 인간을 굽어보며 여유 있는 자만이 자신의 존재를 엿볼 수 있게 하는 미지의 존재처럼 느끼지 않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이었고 그것은 종교와 정치의 시녀에서 탈피하여 자유와 평등, 그리고 시장과 자본에 몸을 기댄 예술가들이 그들의 가장 큰 고객이자 정신적인 어버이나 다름없는 존재인 대중의 품에 안길 수 있는 하나의 쿠폰이나 다름없었다.

최소한 이 팝아트를 실행한다면 사람들은 자기들을 어딘가 신비로운 고독에 빠진 별종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예술가들을 용기 백배시켰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누구나 예술을 가까이 하며 스스로 예술을 실행할 수 있는 예술의 대중화는 팝아트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방향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팝아트의 실행과 변천과정 속에서 오히려 역효과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대중에게 충격을 던져주어 자신의 말을 보다 효과적으로 들려주기를 원하는 예술가들은 점점 더 또라이 정신병자 같은 짓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음악을 보자. 연주가 끝나면 바이얼린을 때려부수는 행위는 그나마 양반 축에 속한다.

똑같은 단음을 15분간 들려주고 5분간 침묵, 다시 단음을 15분간 연주하는, 듣다보면 내가 나비인지 아니면 나비가 나인지 모르게 되어버리는 이른바 전위음악이 등장했고, 조각이나 회화는 도무지 무엇을 만든 것인지, 혹은 왜 만든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괴이한 것들이 묘사되기 시작했다. 예술은 당연히 일반인에게 이해되어야 한다는 필수적인 조건이 작가들의 예술 대중화에 대한 욕망과 작품팔이를 위한 쇼킹효과 연출에 희생되기 시작하면서 일어난 일이다.

따라서 다시 사람들이 예술가를 어딘가 이해할 수 없는 외계인 바라보듯 하는 시각이 생겨나기 시작했을 때, 팝아트는 이제 낡은 것이라 생각하며 팝아트 이후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필연적인 일이었다.

그들은 팝아트라는 사조가 사실 인간이 달나라에 첫 발을 디딘 시절의 산물일 뿐이고, 전세계가 인터넷으로 연결되면서 새로운 패러다임의 급격한 변화를 경험하는 21세기에는 예술 역시 시대를 앞서나가기 위해, 혹은 뒤쳐지지 않기 위해 또 다른 변신이 필요하다 느낀 사람들로서 이번에 잡혀 들어간 재미작가 이모씨. 즉 이하 역시 그 중 한 명에 해당한다. 작년 인사동에서 두 번 열렸던 이하의 전시회 캐치프레이즈는 포스트 팝아트였고, 거기 걸렸던 그림들은 대중에게 익숙한 얼굴들. 즉 오사마 빈라덴이나 부시같은 굵직한 네임밸류를 가진 인물들이었다.

이하의 그림을 보면 그가 이것을 왜 그렸는지를 이해하기 쉽다. 그는 예술의 대중성보다 오히려 그 본연의 목적인 일반적인 이해도에 집중한 작가로, 그의 갤러리에 걸려있던 그림들 대다수는 중학생이 그냥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직관적이었다. 고 박정희 전대통령과 김일성이 왜 한 그림에 나란히 인공기와 태극기를 교환한 채로 그려져 있는지,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왜 헐리우드 복싱영웅 록키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박지성과 김연아는 왜 그렇게 파이팅과 정열이 넘치는 모습으로 그려졌는지, 그리고 이번에 포스터로 나붙은 이명박 대통령의 초상과 한 셋트를 이루는 김대중 전대통령의 초상과 노무현 전대통령의 초상은 왜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냈는지를 한 눈에 읽어낼 수 있다.

최소한 지난 2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내가 그의 전시회를 다니면서 주목한 바에 따르면 비록 아직까지는 세계의 모든 다른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그의 시도들이 팝아트를 넘어서지 못한 채 머물러있는 일종의 아류에 해당했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가 집중하는 역사의 추억이라는 주제였다. 이번의 포스터 사건으로 경찰서 신세를 지기 직전까지 홍대에서 개최했던 전시회의 주제 역시 그것의 하나이다. 개인적으로 간직한 역사의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대중을 찾는 것이 그의 예술활동에 있어서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다만 지나친 이해도 집중으로 인하여 누가 봐도 다 알 수 있는 그림을 그리게 되자 상대적으로 대중성이 떨어지는 결과를 낳을 수 밖에 없었고, 그러한 결과는 당장 이번 전시회부터 갤러리 선정의 열악함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작년 인사동 갤러리의 전시회는 비교적 큼지막한, 이른바 접근성이 괜찮은 곳이었지만 당장 올해의 그림들부터는 갤러리 대관부터 어려워 지기 시작한 것이다. 우는 애도 울음을 그친다는 공안정국을 방불케 하는 시국 속에서 한 여름의 된서리를 맞고 싶지 않았던 갤러리들은 다들 몸을 사리기 시작했고, 어렵사리 자리를 잡은 전시공간조차 홍대에서도 좀 외진 구석진 곳, 공항철도 인근에 떨어져 있어 접근성이 형편없었다.

결국 이하는 자신의 예술활동에서 결여될 수 밖에 없었던 대중성을 커버하고자 자비를 들여 포스터를 인쇄했을 것이고, 버스 정류장으로 나갔을 것이다. 그의 행동이 예술이냐 아니냐는 사실 논란을 일으키기도 창피한 문제다. 예술가가 하는 행동 모두가 예술이냐는 질문은 무엇이 예술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포함되어 있으며, 단 세 가지의 형성요건만 맞아떨어지면 뭐든지 예술이 될 수 있다는 모범답안이 이미 몇 십 년 전에 나와있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조건의 첫 번째는 그것을 알아보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것이 예술계에서 공신력을 가지는 일군의 평론가 집단이나 예술 후원조직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 가이며, 마지막 조건은 그것이 예술의 밑바탕이 되는 인간 사회의 영속을 위협할 범죄. 즉 살인이나 강도질, 혹은 도둑질이나 그에 준하는 범죄를 내포하고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이하가 저걸 왜 그렸는지는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명료하며, 그가 뉴욕의 AHL 파운데이션이 주최하는 seventh annual visual arts에서 4위를, Artscenetoday art competition에서 동일한 주제의 작품들을 출품하여 2위를 수상했다는 사실은 앞선 두 조건을 모두 충족하기에 족하다. 그리고 그가 종로 일대에 붙인 포스터가 인류 사회의 존속을 위협하는 반인류적 범죄가 아닌 다음에야 그의 활동은 예술이다.

이하가 고 노무현 대통령의 옷을 벗긴 다음 코 끝에 빨간 칠을 하든, 이명박 대통령의 얼굴을 나치의 삽질 좀비로 그려놓든 포스터의 내용은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그의 포스터 자체가 예술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해도 예술가로 공인된 이가 포스터를 붙이는 행위 자체는 예술이라는 뜻이다.

사망으로 인하여 예술활동에 종지부를 찍지 않는 작가에 대해 평을 하는 것은 행여 그의 작품에 무언가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으로 인하여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지만 내가 지금 그의 행위에 대해 가지는 불만은 하나뿐이다.

왜 그는 백주대낮에 당당하게 걸어가 그것을 붙이지 못했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필연적으로 거기에서 이어지는 또 다른 결론을 던져주기에 또 하나의 예술이 된다. 우리는 아직도 예술이 살롱이나 전시회에서만 잠깐씩 존재한다고 믿는 18세기적 인식을 가진 나라에 살고 있다는, 창피하지만 비웃음을 사기 딱 좋은 자각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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