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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 리뷰

공감과 상상, 현실과 환상 사이, 김민지의 일러스트

2006-01-06


보는 사람을 포근하게 만드는 그림이 있는가 하면, 생각하게 만드는 그림도 있고, 또 너무 예뻐서 주머니 속에 넣어 다니고 싶은 그림이 있는가 하면, 그냥 그 그림 속으로 빠져들고 싶게 하는 그림도 있다.

“이야기가 있는 그림이요.”
싸이월드 스킨, 네이버 SKY 방송, 동화 및 다양한 출판물에 일러스트를 그려온 김민지씨는 자신의 작업을 간략하게 말해달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었다. “음…그 중에서도 판타지가 있는 이야기죠.”
그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그림을 들여다 보고 있으면 몽롱해졌던 까닭. 자신도 모르게 훨훨 날아간 그녀의 그림 속으로 빠져들어가 헤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김민지씨가 그려온 세계는 그런 곳이다. 그녀를 만나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취재 | 김유진 기자 (egkim@jungle.co.kr)

그녀는 대뜸 동화도 쓰고 일러스트를 그리는 안느 에르보의 ‘파란 시간을 아세요’라는 책의 한 구절을 일러주었다.

-
파란시간을 아세요?
불을 켜기엔 아직 환하고
책을 읽거나 바느질을 하기엔 조금 어두운 시간.
생각에 잠기고. 꿈을 꾸는 시간.
펼친 책장이 희미한 어둠 속에서 하얗게 빛나는 시간.

늘 같은 모습으로 다가왔다가
돌아갈 때만 조금 달라지는,
슬프고 아름다운 시간.

그런 파란 시간을 정말 아세요?
-


한 구절 한 구절이 예쁘다. 조근조근 입으로 작게 소리 내어 말해보면 더없이 사랑스럽다.
마냥 예뻐서 사랑스러운 것은 아니다. 나 역시 언젠가 파란 시간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느낌, 바로 공감이 가능하기에 예쁘고 사랑스러운 것이다.
판타지가 있는 이야기, 환상이 가득한 동화를 그리고 싶다면서도, 그것이 현실에 기반한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김민지씨의 이야기는 ‘파란 시간을 아세요?’ 처럼 공감과 상상, 현실과 환상 사이에 존재하는 그림을 그리겠다는 말로 들린다.
아마도 그녀에 그림에 ‘나도 모르게’ 쉽게 빠져버리는 건 환상이 가득한 그녀의 그림에 내가 끼워져 들어갈 수 있는 공감의 틈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김민지씨가 이러한 자신의 환상세계를 발견하기까지, 그녀는 바쁘게도 다른 길을 둘러와야 했다.
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 디자인 회사에 입사하여 패션 카달로그 작업, 잡지 편집디자인을 해온 그녀는 학원에서 컴퓨터 관련 수업을 수강하면서 3D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그 후 게임회사에 입사한 그녀는 온라인 게임 제작에 참여, 캐릭터와 애니메이션 작업을 하게 된다.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2003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나서기 시작하면서부터다.
결심은 매우 현실적인 판단에서 비롯됐다. 2000년 애니메이션이 문화 컨텐츠로서 다양한 수익사업의 보고가 될 것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을 당시 많은 투자자들이 애니메이션에 거대자본을 투자했지만, 2002~3년에 나온 결과는 참담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그녀가 몸담고 있던 회사도 사업을 접게 되었던 것이다.
평생 그림을 그리면서 살겠다는 꿈을 가졌던 그녀는 그 꿈이 일상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았고, 그렇게 해서 시작한 일이 동화 일러스트였다.

처음에는 고민도 많았다. 그림에 대한 갈증이 항상 있었는데, 시작하는 방법을 몰라 헤매던 시간이 있었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해 조급함도 많았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고 나니, 몇 년씩 작업해서 손에 녹아있는 애니메이션 풍의 그림이 좀처럼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다. 이런 그림은 동화 일러스트랑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스스로를 괴롭혔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자신의 그림은 색다르고 새로웠다. 이것이 오히려 장점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림은 정직하니까, 내가 재미있고 즐겁게 그리면 사람들도 그렇게 봐줄 것이다’라는 확신과 자신감이 결국 그녀의 개성을 밀고 갈 수 있는 동력이 되었다.
이런 마음가짐은 이제 그녀에게 작업 철학이 되었다. 스스로의 능력에 한계를 두지 말자는 그녀의 생각이 왠지 든든하다.

습작으로 또는 개인 홈페이지 (www.ki204.com)를 통해 들어온 일로 그림을 시작한지 3년. 길지 않은 기간이지만, 그녀의 그림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적지 않다.
대중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지게 된 계기는 ‘원더랜드’라는 이름으로 커뮤니티 사이트의 미니홈피 스킨을 제작하면서다. 처음에는 일주일에 두 작품씩 완성해야 한다는 시간의 제약, 시의성을 고려해야 하는 일러스트의 내용 등 순발력을 발휘해야 하는 부분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처음에 작게 느껴졌던 레이아웃이 이제는 익숙하다고 말할 정도로 현재의 작업에 잘 적응하고 있다. 그림으로 사람들과 소통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어 만족스럽다는 것이 이 일에 대한 그녀의 생각이다.

대중들에게 노출이 적은 편이지만 출판 쪽의 일러스트들은 그녀의 주된 작업이다.
삼성출판사와 교원출판사, 대한교과서, 구몬 등에서 단행본, 캘린더, 캐릭터 등 일러스트 작업을 해왔던 그녀는 미국 스토리 퍼레이드사의 제의로 헨젤과 그레텔의 DVD 동화작업을 하였고, 최근에는 MBC 라디오 ‘옥주현의 별이 빛나는 밤에’의 코너 <청춘극장 1막1장> 의 이야기를 모은 단행본 ‘나무, 바람을 사랑하다’의 일러스트를 그렸다.
작업을 선택할 때는 작업의 개성이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가를 우선적으로 타진한다. 원고가 재미있다거나, 캐릭터가 매력 있다거나, 이유도 없이 확~ 끌리는 작품을 만날 때 그림이 잘나오는 것 같단다. 그래서인지 보통 의뢰를 받는 작업들을 보면 동적이고 밝은 작품들이 많다고.
가장 중요한 조건은 작업시간. 모든 조건이 좋아도, 시간이 촉박하다면 일을 받지 않는다.

지금 김민지씨는 생떽쥐베리의 ‘어린왕자’의 삽화를 작업 중이다. 이미 사람들의 눈에 생떽쥐베리의 삽화가 익숙하기 때문에 걱정스럽기도 하지만, 작업을 하면서 예전에는 몰랐던 ‘어린왕자’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되었다며 행복한 눈길을 던진다.


그렇다면, 스스로 얘기하는 작업 스타일의 특징은 무엇일까.
“제 그림은 항상 진행 중이에요. 운동성이 있죠. ‘바람’같은 것은 중요한 요소에요. 꽃잎이라던가 머리카락이 날리는 것은 정지되어있는 그림이어도 운동감을 부여하잖아요.” 그리는 대상에 움직임을 줄 때, 그런 모습을 그릴 때가 즐겁다는 그녀. 환상을 담은 그림 자체는 정적이라도, 항상 움직이는 느낌이 부여되기 때문에 김민지씨의 그림은 항상 차분한 생동감이 있다.
“그림 그릴 때 포토샵과 페인터 프로그램을 써요. 꼭 그래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제 그림에는 디지털 냄새가 나요. 딱 보면 예쁘지만 오래 두고 보기에는 어떤 그림일지 잘 모르겠어요.” 그녀는 자신의 작업이 잘 그려진 그림보다는 보면 볼수록 좋은 그림, 명확한 어떤 것을 제시하기보다는 생각의 여지나 상상의 토대를 마련하는 그림이 되길 바란다. “그래서 요즘에는 틈틈이 수작업도 연습 중이에요. 물감 느낌이 좋더라고요.”
“그림에서 따뜻한 감성이 전해졌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그녀는 인간적으로도 좋은 사람이고 싶다는 말을 덧붙였다.

김민지씨는 계획이 많은 사람이다. 하고 싶은 것이 많아서다. 자신만을 위한 개인작업을 해서 그 결과물로 전시를 하고 싶기도 하고, 자신의 일러스트를 상품화해보고 싶기도 하다. 자신의 일러스트가 담긴 간단하고 보기 편한 다이어리를 올해 꼭 갖고 싶었는데, 그 바람도 이루고 싶다고 한다. 이야기를 담은 동화책을 그리는 것도 그녀가 꼭 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하지만, 온라인 작업이든 책 작업이든 작업의 구분을 특별하게 두고 싶지 않다는 그녀는 그림스타일이 맞는다면 어떤 작업이든 즐거울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제 그림에는 소통의 개념이 들어있데요. 누가 제 그림을 보고는 그림 속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 뭔가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을 것처럼 보인데요.”
김민지의 그림 세상을 돌아다니다 보니, 그녀가 인터뷰 첫마디에 꺼내어 놓았던 말로 다시결론이 지어졌다.
지금 그녀와 그녀의 작품들을 보고 있는 당신 역시 김민지씨의 그림에 대해서 대답할 기회를 가진다면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김민지씨요? 이야기가 있는 그림이죠.”

Jungle : 작업의 영감은 어디로부터 얻는가.
책, 사진, 영화, 음악, 잡지, 연극, 뮤지컬 등 각종 문화생활이다. 공연 보는 것을 즐기는 데 그 인상이 강렬하게 남아있을 때면, 그것을 그림으로 직접 표현하기도 한다. 잡지 중에는 <오뛰 꾸뜨르> 를 즐겨본다. 꽃이나 나비 등 의상 디자인에 활용한 다양한 표현들에서 아이디어를 얻는다.

Jungle : 작업시 징크스라던가, 작업을 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 있다면.
작업할 때 음악이 없으면 안 된다. 그래서 라디오를 꼭 켜놓는다. 음악 자체로만 보면 애시드 재즈 같은 류를 좋아한다.
밤샘 작업을 잘 못하는 편이다. 건강 때문이다. 요즘에는 밤 12시에 잠들고 오전 8시30분에 일어나는 스케쥴을 지키려고 한다.

Jungle : 작업할 때 가장 괴로운 점이 있다면.
내가 그려야 할 그림의 방향은 이쪽인데,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다.
본격적으로 일러스트를 시작한지 얼마 안되었을 때는 이런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러면 작업기간 내내 괴롭다. 그리고 책이 완성되면 남한테 보여줘야 한다는 심리적인 부담 역시 그림을 그리기에 힘든 점이었다.

Jungle : 자신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정직하고 단순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더 단순해져야 된다. 그래야지 자신감이 더 붙을 것 같다.
홍명보 선수가 한국 선수들한테 “건방져지라”고 했다던데, 내 그림이 어떻게 보여질까,와 같은 부담에서 벗어나 보다 더 제 개인적인 성향을 드러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Jungle : 홈페이지에 대한 소개를 부탁한다.
www.ki204.com인데, 현재는 아쉽게도 리뉴얼 중이다. 2002년에 오픈 하였다.
작업에 있어서 홈페이지는 중요하다. 단순히 일이 들어오는 통로라서가 아니다.
작업을 홈페이지에 업로드 해보니, 내 작업의 일관된 스타일이나 색깔이 보였다. ‘나는 이런 그림을 그리고 있었구나’ 새삼 깨닫게 됐다.
물론 홈페이지를 방문하는 사람들의 피드백도 많은 도움이 된다.

Jungle : ‘이렇게 살고 싶다’라고 꿈꾸는 삶이 있는가.
물론이다. 항상 그림을 그리고 싶다. ‘일’로서의 그림보다는 그림 자체였으면 좋겠다. 내 그림에 대해서 고민하던 초반의 2년간은 그림이 ‘일’처럼 느껴졌었기 때문이다. 여행도 많이 다녀야 한다. 머리 속에 설계도 대로 집도 짓고 싶다.

Jungle : 현재 이쪽 분야를 준비하고 있는 후배들에게 한마디.
본인이 그리고 싶은 그림이 어떤 것인지 분명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잘 그릴 수 있는 그림이 그리고 싶은 그림과 같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일일 것이다.
나 스스로도 내가 꿈꾸는 그림을 그려가기 위해 노력 중이다.
방향이 보이면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색깔과 매력을 충분히 살리되, 길게 보고 꾸준히, 그리고 즐겁게 그려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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