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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 리뷰

도시 속 부지런한 관찰자, 그래픽 디자이너 김형재 x 홍은주

타이포그래피 서울 (임재훈) | 2015-05-20


서울 도심 한복판인 을지로. 그래픽 디자인 듀오 김형재·홍은주의 작업실이 자리한 곳이다. "디자이너는 도시와 관련된 직업"이라고 생각한다는 두 사람은 "디자이너로서 도시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파악하는 것은 기본적 소양"이라고 덧붙인다. 도시라는 공간에 남다른 관심을 가진 그들의 철학과 작업이 궁금했다. 을지로에서 만난 도시 속 디자이너, 김형재와 홍은주는 부지런한 관찰자였다.

기사제공 ㅣ 타이포그래피 서울 (글·사진: 임재훈)
 

고정관념일 수 있겠는데, 디자인스튜디오라고 하면 홍대 앞이나 이태원에 있을 것 같은 느낌이거든요. 을지로에 스튜디오를 마련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일단 저희가 홍대 앞이나 이태원과 아무런 연고가 없어요. 을지로에 스튜디오를 장만한 데에는 제(김형재) 로망이 컸던 것 같아요. 어린 시절에 이 일대, 종로3가 쪽에 있는 서울극장, 단성사, 명보극장을 좋아했어요. 중고등학교 때 시험 보고 나면 오전에 일찍 끝나잖아요. 그러면 청계천을 가로질러 단성사와 명보극장을 오가며 영화를 세 편씩 한꺼번에 감상하고 그랬죠.


김형재 작가님은 지난해 가을에 '타이포잔치 2015 프리비엔날레'(이하 프리비엔날레)에 참여하셨었죠. 도시 속 문자들의 의미를 탐구해보는 기획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어떤 작업이었나요?
총감독을 맡았던 김경선 선생님께서 명확한 콘셉트를 갖고 계셨어요. 도시와 타이포그래피를 다루는 기획이기는 하지만 디자인뿐만 아니라 도시와 연결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자유롭게 다루어보아도 좋다, 대신 버스를 타고 도시를 탐험하는 프로그램만큼은 꼭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죠. 그래서 기자, 디자인 연구자, 건축가 등 다양한 이력의 작가들이 참여했고, 전시 베뉴(venue)가 될 문화역서울 284에서 청중과 함께 버스를 타고 각 참여 작가들이 선정한 도시 공간으로 이동하면서, 도시를 바라보는 여러 가지 맥락과 관점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참여 작가 중 제가 개인적으로 활동하는 팀인 '옵티컬레이스'는 이런 관점으로 접근해봤어요. 도시를 이루는 커다란 콘크리트 건물들은 모두 텍스트 정보로 환원될 수 있죠. 그 건물들 하나하나에는 사람의 가족관계부 같은 등기부가 존재하잖아요. 그렇게 문서화된 건물들의 정보만으로도 도시를 파악할 수 있고, 그런 정보들이 디자인의 중요한 재료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프리비엔날레 이후로는 두 분께서 어떤 작업을 하셨나요?
최근 작업이 그래도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영국 런던에서 올 초에 열렸던 행사예요. 국내 '젊은건축가상' 수상자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자리였고, 'Out of the Ordinary'라는 제목이었습니다. 이 전시의 기획자이자 지난해 베니스건축비엔날레 한국관을 기획하셨던 배형민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디자인 연구자 박해천 선생님과 함께 젊은 건축가들의 작업물을 설명해줄 수 있는 배경지식, 사회 경제적 지표 등을 전시장에 배치하는 등의 프로젝트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전시 아이덴티티와 포스터, 카탈로그 등을 디자인하기도 했고요. 여러 나라의 협업으로 전시와 출판이 이루어지는 것이 굉장히 재미있었어요. 서울에서 제작한 결과물을 런던 현지의 관계자한테 바로 보내는 게 아니라, 중간에 연계된 덴마크의 건축 전문 출판사와 소통하는 방식이었거든요. 그 출판사를 통해 또 여러 나라에 아웃소싱해 인쇄도 하고 제본도 해보는 경험을 했죠. 그 과정이 흥미로웠어요. 저희는 국내에서만 활동했기 때문에 다른 나라 인쇄 문화를 접해볼 기회가 없었으니까요.


한국의 작업 환경과는 어떤 차이가 있었나요?
일단 시간이 좀 더 걸리고요. 전시 준비를 담당하는 런던의 건축과 공간 디자인 관련 시행사, 그리고 인쇄를 담당하는 덴마크의 출판사, 두 군데 모두 재미있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전시장 벽면을 꾸밀 때 일반적으로 시트를 붙이잖아요. 예전에는 칼라이즈(ColorEase) 작업이 많았지만 지금은 거의 안 하죠. 그런데 런던 쪽 관계자 분들은 아직도 칼라이즈를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전시 준비에 필요한 모든 부분에 대해서 완전한 계획이 짜여 있기를 원했어요. 그 계획에 맞춰서 일을 진행하고 싶어 했죠. 연말이기 때문에 긴 휴일이 예정되어 있어서였던 것 같아요. 작업 시작 몇 달 전부터 계속 독촉을 해왔거든요. 계획을 달라, 계획을 달라, ···. 하지만 한국에서는 아직 준비가 안 돼 있고. 일하는 방식의 차이였던 것 같아요. 한국은 보통, 짧은 기간 안에 인텐스하게 일처리를 한다면, 런던 쪽에서는 수 개월 전부터 미리 계획이 나와 있어야 하는 거죠. 그런 차이를 조율해나가는 과정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덴마크 출판사의 경우는 런던과는 또 달랐죠. 인쇄 기술에 대한 지식으로 치자면 우리나라도 덴마크 못지않다고 보거든요. 다만, 덴마크는 그런 지식을 체계화시켜놓았더라고요. 정확하게 매뉴얼로 만들어놓은 거죠. 용지와 출판 장르별 프로파일도 다 갖고 있고, 카메라 종류별 컬러 매니지먼트도 갖추고 있고. '우리 인쇄소에서는 이러이러한 프로세스를 거치니까 여기에 맞춰서 파일을 보내주세요'라고 명확하게 요청이 와요. 나중에 저희가 함께 작업하는 인쇄소 관계자 분께 덴마크 쪽 이야기를 들려드리니까 한숨을 쉬시더라고요. 한국도 기술력과 장비 모두 충분하지만, 시간이나 비용 문제 때문에 체계적인 매뉴얼에 따라 일 처리를 하기가 쉽지 않다고 하셨어요. 노하우와 '감'만으로 우수한 결과물을 뽑아내는 한국의 인쇄 문화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지더라고요.

 

김형재와 홍은주는 2007년 <가짜잡지>라는 제호를 붙인 진짜 잡지를 창간했다. 디자이너를 비롯하여 여러 분야의 아티스트, 학생 등이 어울려 함께 만들어가는 잡지였다. 2011년에는 동인 체제로 제작하는 비정기 문화잡지 <도미노>를 선보이기도 했다. 편집도 하고 글도 썼다. 월간 <디자인>, <씨네21>, <스트리트H> 같은 매체에서 '독립잡지'라는 주제로 인터뷰도 몇 차례 했다. 책(잡지) 만드는 일이 크게 부각되다 보니, 상대적으로 다른 작업들에 관해 이야기할 기회가 적었던 것 같다며 두 사람은 쑥스러운 웃음을 짓기도 했다.

어느 인터뷰에서 책의 '물성'에 대해 언급하신 부분이 인상적이었는데, 물성이라는 게 손에 잡히고 만져지는 거잖아요. 비단 책뿐만이 아니라 두 분의 디자인 결과물의 지향점도 그런 '물성'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두 분이 생각하시는 물성, 디자인 결과물에 대한 철학이 궁금해요.
저희가 아마도 다른 팀이나 회사들에 비해 인쇄소에 있는 시간 자체가 상대적으로 많은 편 같아요. 작업을 하는 시간도 시간이지만, 제작 과정 면면을 일부러 쫓아다니면서 챙기는 측면이 좀 있죠. 그걸 또 재미있어 하고요. 당연한 이야기인데, 화면에서 보이는 이미지보다 실제로 만졌을 때 생기는 경험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제작 비용을 꽤 들여요. 작업료 일부를 떼어내서 제작에 보태는 경우도 워낙 많다 보니까 주변에서 충고도 적잖게 들어요. 돈을 너무 들인다고, 정신 차리라고, ···. 하하. 그런데, 다 해보고 싶으니까, 재미가 있으니까 이렇게 할 수 있는 거죠.

예전에 물성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만졌을 때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지금은 아무래도 그때보다는 시간이 흘렀고, 이런저런 작업들도 해보고 이것저것 많이 봤으니까 생각이 좀 달라졌죠. '처음 머릿속에 구상했던 걸 어떻게 최대한 비슷하게 구현할까?'라는 부분에 더 집중하게 돼요. 디자인의 목적과 기능에 적합한 형태, 그것을 만들어내기 위한 제작 방식을 어떻게 하면 좀 더 잘 운용하고,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잘' 나오게 할 수 있는지. 이런 부분이 예전보다 훨씬 더 중요해진 거죠. 그때 생각했던 물성과 지금 생각하는 물성은 차이가 있어요. 태도가 달라졌으니까요.


두 분의 책과 잡지 작업을 보니까 '저자로서의 디자이너(Designer as Author)'라는 말이 떠오르더라고요. 에디팅과 라이팅 둘 다 하시니까요.
그 표현에 대해서는 마이클 락(Michael Rock)이 쓴 글도 있죠. 한동안 디자인계에서 많이 이야기되었던 주제이기도 하고요. 오늘 킥스타터(Kick Starter, 미국의 소셜 펀딩 사이트)에서 책이 한 권 왔거든요. 그래픽 디자이너 마시모 비넬리(Massimo Vignelli)의 1972년 뉴욕 지하철의 노선도와 사인물을 포함해 모든 시각물의 디자인 작업을 담은 책이에요. 이런 거장들의 시대는 아마 다시 오기 힘들지 않을까 싶어요. 디자이너로서 자기가 펼칠 수 있는 거의 모든 분야를 관장할 수 있고, 그런 활동(작업) 자체의 목적성과 기능성이 당대의 시대성과도 부합할 수 있는 시대. 이런 시대에 굳이 디자이너의 저자성을 언급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지 않을까요? 이런 시대에는 작업의 규모가 크기 때문에 분업화가 필수적이었고, 편집자는 편집의 영역, 저자는 저자의 영역, 디자이너는 디자인의 영역, 이렇게 각자의 영역을 전문적으로 수행해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 저희가 참여하는 일들은 여러 분야들이 서로 혼합되기도 하고, 디자인 자체의 역할 역시 단독적이기보다는 다른 요소와 연계되어 기능하는 경우가 많다고 보거든요. 디자이너가 디자인만 잘하면 되는 시대는 아닌 거죠. 이런저런 것을 두루 수행할 수 있어야 하는 상황인데, 그런 걸 즐기는 저희로서는 좀 더 재미있게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인 것 같기도 합니다.
 

 


두 사람은 '연구'와 '관찰'이 자신들의 활동 영역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말한다. 특히 도시에 대한 관심이 다른 분야보다 "쎄다"라고 설명한다. 이들의 작업실이 자리한 을지로가 '서울의 을지로'이듯, 김형재·홍은주 역시 '서울의 디자이너', '도시의 디자이너'라고 부를 수 있으려나. 두 디자이너들은 어떤 시선으로 이 서울, 이 도시를 바라보고 있을까.
 

'연구'하고 '관찰'하는 일에 무척 적극적이신 것 같아요.
2006년 진행된 'dna_R 도시문화 디자인 리서치, 안양'이라는 프로젝트에서 박해천 선생님과 함께 작업을 했었어요. 그러고 나서 이듬해 10월 문을 연 '디자인리서치학교(바로 가기)'에서의 참여를 계기로 연구하고 관찰하고 분석하고 해석하는 일련의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죠. 디자인리서치학교는 박해천 선생님, 공공문화기업 티팟(바로 가기)을 운영하시는 조주연 선생님 두 분께서 만드신 교육 프로그램이에요. 디자이너의 관점으로 도시를 바라보고, 그 시선을 통해 발견한 내용과 가치들을 시각화하여 출판 혹은 전시의 형태로 발표하는 프로젝트였죠. 2007년부터 약 4년간 연례화된 형식으로 1·2·3·4기까지 이어졌어요. 그렇게 한 해씩 경험을 쌓아가고 있던 중에, 2014년 제4회 안양공공예술 프로젝트를 총 지휘하신 백지숙 예술감독님께서 저희에게 본격적으로 작가로 함께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하셔서 참여하게 되었죠. 안양을 중심으로 한 신도시에 관하여 책도 만들고 전시도 했어요. 같은 해 아르코미술관에서 '집'이라는 주제로 열린 '즐거운 나의 집' 전시에도 참여했고요. 저희에게는 웹사이트 디자인이나 책 만드는 일 등 일반적인 작업 이상으로 이런 활동이 대단히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김형재 작가님은 그래픽 디자이너 정진열 작가님과 함께 <이면의 도시>(2011, 자음과모음)라는 책을 쓰기도 했죠.
디자인리서치학교에서 비슷한 주제로 진행했던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박해천 선생님께서 계간 <자음과모음>에 '콘크리트 유토피아'라는 글을 연재하고 계셨거든요.(2011년에 같은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간되기도 했죠.) 그쪽 편집위원이신 문학평론가 복도훈 선생님과 박해천 선생님이 도시에 대한 면면을 시각 디자인의 관점으로 풀어내보는 아이디어를 의논하셨어요. 그때가 2008~2009년 촛불시위로부터 한두 해가 지난 시점이었거든요. 그런데 사회학, 공공안전 등 어떤 학문 분야로부터도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던 거예요. 언제 어디에서 무슨 사건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자료와 종합적인 분석을 찾아보기 힘들었던 거죠. 예를 들면 이런 촛불시위처럼 도심 한복판에서 일어나는 일들, 그것들에 대한 정보를 디자이너가 시각적으로 기록해나간다면 어떨까 하는 인식에서 아이디어가 출발한 거예요. 연구는 연구자가, 디자인은 디자이너가 분업해서 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런 전반의 과정을 디자이너가 모두 해보자는 취지였어요. <자음과모음>에 매 호마다 다른 주제로 연재를 했는데, 정진열 선생님과 제가 주제를 정해 글을 쓰고 각 호의 주제와 맞는 디자이너나 연구 그룹 몇 분을 선정해서 함께 의논해가며 진행을 했어요. 첫 호에는 그래픽디자이너 신덕호 씨의 촛불시위 지도를 담았죠. 좋은 작업이었습니다. 딱 연재만 하는 걸로 생각했는데, 단행본으로 출간된다고 하니 깜짝 놀랐어요.

홍은주 작가님은 2013년 샘표식품의 '샘표 갤러리 프로젝트'에도 참여하셨죠. 연구소라는 공간을 갤러리의 형태로 꾸미는 작업이었잖아요. 디자이너로서 두 분의 관점과 활동이 굉장히 전방위적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형식과 내용을 동시에 고민한다는 점에서 공간과 관련된 작업이나 전시 프로젝트가 재미있기는 해요. 그래도 기본적으로는 저희 둘 다 디자이너이기 때문에, 다루는 매체는 책이나 웹사이트 같은 일반적인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 편이에요. 전시에는 전시의 맥락이 있고, 다른 작업에는 그것만의 맥락이 있죠.
 

'도시'와 '공간'에 대한 두 분의 고민이 작업 안에 많이 묻어나는 것 같아요. 디자이너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맥락으로도 이해해도 될까요?
'사회'보다는 '도시'에 더 가까운 것 같아요. 도시에 대한 관심. 그리고 사회적 책임이나 사회 참여의 의미라기보다는 기본적인 소양의 차원이라고 하는 게 맞는 것 같네요. 디자이너들이 거의 도시에 살잖아요. '디자이너'는 이를테면 도시와 관련된 직업이죠. 대량생산 될 결과물들의 계획을 세우는 사람이니까요. 도시를 벗어나서는 디자이너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도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 도시가 구획되고 구성되는 방식, 도시 사람들의 생활 양식 등등을 파악해서 자신만의 관점을 갖는 것은 디자이너의 기본 소양, 혹은 교양이라고 봐요. 이런 생각 때문에 저희의 경우는 연구와 조사를 바탕으로 한 전시나 출판 작업을 좀 더 적극적으로 하는 편이고요.

'디자이너는 도시와 관련된 직업이다'라는 명제가 인상적이네요.
뭐,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데요, 하하. 여러 가지로 도시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는 거죠.

만약 도시라는 공간을 하나의 거대한 웹사이트로 보고, 신이 두 분한테 리뉴얼을 해보라고 말한다면 어떨까요?
음, 도시의 좋은 점을 생각해본다면, 다양한 사람과 다양한 일과 다양한 기능 등등이 복합적으로 연계돼 있다는 것이겠죠. 그런데 요즘의 도시는 비슷비슷한 경험들을 양산해내고 있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획일적으로, 집단적으로 비슷한 경험들을 하게 되면 재미가 없어지죠. 저희가 어렸을 때만 해도 모래내면 모래내, 대조동이면 대조동, 약수동이면 약수동, 어느 지역이든 각각의 특색과 역사가 뚜렷했거든요. 지금은 시각적으로 봤을 때 거의 대동소이하더라고요. 건물이 지어지는 양태, 간판 등등 많은 것들이 평준화되고 있다는 느낌이에요.

지방 소도시로 가면, 이러한 '재미없음'에 약간의 우울함이나 열패감 같은 게 더해져요. 실은 도시들은 다 비슷한데. 겉모습은 다 비슷한데 말이죠. 비슷한 형태의 모듈을 크고 비싼 것부터 작고 우울한 것까지 쭈-욱 나열해놓은 형태로 보이기도 해요. 그래도 도시라는 공간에서 사람들은 어떻게든 자기가 하고 싶은 바를 추구하면서 살아가고 있잖아요. 어쨌든 '앞으로'가 더 중요한 거죠. 이런 서울이 되어 있고, 이런 도시가 되어 있다면, 이 안에서 뭔가 재미를 만들어가야겠죠.

그렇다면, 도시에서 디자이너로서 살아내려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저마다 다르겠죠. 다만, 학생들에게는 이렇게 말해주는 편이에요. 자기 경험을 하나하나 따져보는 것이 중요하다고요. 현재 20대인 학생들의 경우, 아마 성장하면서 경험한 것들이 서로 엇비슷할 거예요. 그동안 살아온 집의 형태나 구조, 비슷한 유행 시기의 먹었던 음식, 수학여행지 등···. 획일화된, 혹은 유사한 형태의 경험을 했다는 인식을 먼저 해보는 거죠. 그 인식을 전제로, 표면적으로 차이가 없어 보이는 나의 경험들을 하나씩 다시 들여다보면서 독자적인 관점을 찾아보는 거예요. '아, 나는 몇 년도에 어디로 수학여행을 갔는데, 다른 아이들도 똑같은 장소로 갔었구나. 그렇다면 그때 나의 경험은 다른 아이들과 어떻게 다를 수 있을까? 그때 나의 경험을 지금 시각 정보로 남기려면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이런 식의 연습이 필요하죠. 자기 관점이 없으면 아무런 변별성도 갖출 수 없거든요. 여러분은 어차피 똑같거나 비슷한 경험들을 다 했다, 그런데 그걸 다시 한번 찬찬히 살펴보면 또 다르다, 라는 점을 학생들에게 강조하고 싶어요. 획일적인 것을 자신만의 관점으로 어떻게 만들어내느냐가 중요하다는 뜻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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