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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로 애니메이션을 뽑아볼까?

2010-12-17


한 달 전, 서울의 한 도서관에서 우연히 김진만 감독과 마주치게 되었다. 영화제에서 한두 번 뵈었던 게 전부였기 때문에 다소 어색할 수도 있는 사이였지만 서글서글한 김진만 감독의 성격 덕분에 우리는 쉽게 서로의 근황에 대해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국수로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요.” 최근 어떤 작업을 하고 있냐는 나의 질문에 김진만 감독의 대답이었다. 국수라... 원래 애니메이션이란 것이 움직일 수 있는 어떤 것이든 소재로 쓸 수 있다지만 국수로 애니메이션을 만든다는 것은 처음 들어보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 얇은 국수로 어떻게?“라는 의문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글 | 박재옥 애니메이션 감독(okyi98@naver.com)
에디터 | 이은정(ejlee@jungle.co.kr)

나의 의문을 예상이라도 한 듯이 김진만 감독은 핀 스크린(pin screen) 기법에 대해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원래 핀 스크린 기법은 러시아 태생의 애니메이션 작가 알렉산드르 알렉세이에프(Alexandre Alexeieff)와 그의 아내 클레어 파커(Claire Parker)에 의해 개발되었다. 핀 스크린이란 가로, 세로가 1.2m, 1m의 넓이의 하얀 판에 만개 이상의 가느다란 철심이 박혀있는 판을 말한다. 이 철심을 앞뒤에서 롤러나 손으로 밀어서 높낮이의 차이를 만들고 조명의 빛을 받은 철심이 만들어내는 그림자에 의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기법이다.

결국 국수 애니메이션이란 쉽게 말하면 핀 스크린 기법에서 철심의 기능을 국수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김진만 감독은 이를 위해서 가로 1.8m 세로 50Cm의 나무틀을 만들고 이 안을 국수로 빽빽이 채워 넣었다고 한다. 사용한 국수만 대략 20개 들이 8박스... 더욱 큰 문제는 한 봉지 안에 들어있는 국수도 길이가 조금씩 다른 불량품이 절반가량은 된다는 것이었다. 김진만 감독은 이 길이를 맞춰주기 위해 일일이 국수를 들고 가위로 길이를 맞추었다고. 결국 애니메이션을 위한 준비과정만 몇 달이 걸린 셈이었다.

그러나 험난한 과정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국수 애니메이션을 하기 위해선 조명의 역할이 필수적인데 이 조명의 뜨거운 열 때문에 맨 위쪽에 있는 국수들이 조금씩 휘기 시작한 것. 결국 김진만 감독은 이를 막아줄 나무판을 설치하고 조명에 트레이싱지를 둘러 이 문제를 해결했다고 한다.

이 날 나눈 이야기는 두고두고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그 커다란 국수 세트가 대체 어떤 모양새를 하고있을까도 궁금하거니와 애니메이션 작업은 또 어떻게 진행이 되는지, 그리고 김진만 감독은 어떤 사람이길래 이런 무모해 보이는 작업을 태연하게 하고 있는 건지... 이런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던 차에 칼럼을 핑계 삼아 김감독의 작업실을 방문하게 되었다. 김감독의 작업실은 외형적인 형태는 일반적인 집이었지만 여느 집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우선 거실에 TV가 없다는 점이 색다르게 느껴졌고 집안 곳곳에 김진만 감독이 직접 만든 인형이나 조소작품이 진열되어 있었다. 방문 하나를 열고 들어가면 그 곳에 비로소 국수 애니메이션 세트가 방 하나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김진만 감독이 나무로 직접 만든 세트에는 바퀴가 달려있어 트래킹(Tracking)을 할 때 유용하게 쓸 수 있고 그 위로 수 십 만개의 국수 가락이 촘촘히 쌓여져 있었다. 세트 위에 매달려 있는 조명의 빛은 앞 뒤로 튀어나온 국수에 부딪혀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러한 하나의 이미지는 손이나 각종 도구를 사용해 앞 뒤에서 국수를 밀거나 다듬어서 완성된다. 물론 애니메이션이기 때문에 이러한 작업을 수없이 반복해야만 한다. 한 장의 이미지가 완성되면 카메라로 촬영을 하고 이렇게 촬영된 데이터는 카메라와 연결된 컴퓨터에서 확인할 수도 있다. 여러 장의 스틸 이미지로 촬영된 데이터는 스탑 모션 전용 프로그램을 사용하면 동영상으로 확인해가며 작업할 수도 있다.

1장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걸리는 시간은 10분에서30분 정도이다. 1초에 15장의 이미지를 만들어야 하는 작업임을 감안할 때 1초를 만들기 위해 적어도 쉬운 장면은 2시간, 난이도 높은 장면은 2일 이상을 투자해야 하는 고된 작업이다. 10분이 넘는 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 본업이 따로 있는 김진만 감독은 하루에 5-6시간 정도 꾸준히 작업을 한다고 한다. 1년이 걸릴지 그 이상이 걸릴지 가늠하기 힘든 작업이다. 하지만 김진만 감독에게 국수 애니메이션이 처음은 아니다. 국수 애니메이션의 창시자로도 불릴 수 있는 김진만 감독은 2003년 제작된 단편 애니메이션 <볼록이 이야기> 로 그 가능성을 선보인 바 있다. 이때는 A4용지보다 약간 큰 사이즈의 나무틀에 국수를 넣고 제작했다고 한다.

<볼록이 이야기> 는 모두가 오목하게 들어간 세상에서 볼록하게 튀어나온 한 아이에 대한 이야기이다. 남들과 다른 아이에 대한 이야기... 그 이야기의 정신은 지금 제작중인 작품 <오목어 이야기> 로 계승되고 있다.

오목하게 들어간 물고기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김진만 감독의 거실엔 새끼 복어 세 마리가 어항 속을 헤엄치고 있었다. 평소 오래된 가구에 관심이 많았다는 김진만 감독은 주워온 오래된 서랍장 위에 합판을 대서 훌륭한 어항으로 재탄생 시켰다. 사소한 부분까지 정성을 기울이는 김진만 감독의 성격을 집안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남들과 조금 다른 공간에서 남들과 조금 다르게 살고 있는 김진만 감독. 실험 정신이라던가, 장인 정신 이전에 누구보다 자기답게 살고 있는 한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나 자신의 삶을 반추하게 된다. 손으로 꾸욱 누른 국수는 오목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뒤편을 바라보면 볼록 튀어나와있기 마련이다. 모두가 볼록 튀어나온 세상에 오목하게 들어간 물고기의 삶을 통해 김진만 감독이 말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다면, 볼록한 내 자신도 오목하게 변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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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정
잡지디자이너 과심은 여러분야에 관심은 많으나 노력은 부족함 디자인계에 정보를 알고싶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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