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2-25
최초의 한글 소설은 허균이 쓴 ‘홍길동전’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현재 남아있는 인쇄본, 즉 19세기에 인쇄되어 알려진 ‘홍길동전’ 어디에도 허균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16-17 세기, 즉 조선중기의 인물인 허균은 대역죄인으로 몰려 그의 가문은 몰락하였고 그의 가문에 남아있던 그의 서적 또한 모두 불태워 없어졌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홍길동전’을 볼 수 있게 된 것은 2세기 넘게 지인의 집에 암암리에 보관되던 것이 19세기 한글 소설의 붐을 타고 인쇄되어 퍼져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글 | 박재옥 애니메이션 감독(okyi98@naver.com)
에디터 | 이은정(ejlee@jungle.co.kr)
그러므로 현재 남아있는 ‘홍길동전’ 인쇄본은 허균이 직접 쓴 필사본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확인할 수 없다. 어쩌면 왜곡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저자인 허균의 입장에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보다 더 슬픈 건 이런 훌륭한 문화유산이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빛을 보지 못하고 어두운 곳에서 숨죽이고 있었단 사실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런 얄궂은 운명은 ‘홍길동전’으로 끝나지 않는다. 신동헌 감독이 연출한 한국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 또한 40년간이나 그 필름을 찾아 볼 수 없었다. ‘홍길동’이 상영된 1967년만 해도 문화 컨텐츠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한번 상영하고 난 필름의 대부분은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1996년부터 ‘의무납본제’라는 제도가 시행되게 된다. ‘의무납본제’란 상영된 영화의 필름이나 원본데이터를 한국영상자료원에 의무적으로 제출하는 제도로서 이 때문에 1996년 이후의 영화는 빠짐없이 보관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전의 영화들이다. 특히 50~60년대의 영화는 16mm 복사본 필름조차 구하기 힘든 경우가 많아 그 작품의 자취를 영영 볼 수 없는 작품도 상당수 있다. 한국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 또한 40년 동안이나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사라진 작품으로 남아있었다.
다행히 잃어버린 ‘홍길동’은 우연한 계기로 인해 2007년에 우리의 곁으로 돌아오게 될 계기를 맞게 된다. 애니메이션 평론가 김준양 교수가 평소에 알고 지내던 오사카의 한 시네마떼끄의 관장에게 한국 초창기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는 곳을 알려달라는 메일을 받았다고 한다. 김준양 교수는 답신하길 ‘한국 최초의 장편 홍길동은 필름이 발견되지 않아 보실 수 없구요... 하지만 그 이후 작품들은 한국 영상 자료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고 했더니 오사카의 관장에게 ‘홍길동이 여기 오사카에 보관되어있습니다’ 고 답신이 왔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홍길동’ 복원 작업은 급물살을 타게 된다.
한국 영상 자료원이 오사카의 시네마떼끄에서 인계받은 16mm 필름 ‘홍길동’은 일본 내 상영본이어서 일본어 성우에 의해 믹싱이 된 상태였다. 다행히도 영상자료원에 ‘홍길동’의 사운드 네가 필름이 수집되어 있었기 때문에 영상과 사운드 필름을 합치는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또한 영상 내에 영화 제목과 크레딧이 일본어로 기입되는 등 원본과 다른 부분도 발견할 수 있었다. 신동헌 감독님은 영화 내에 몇몇 부분은 잘려나갔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어쨌든 왜곡된 형태나마 ‘홍길동’은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1967년에 개봉했던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은 4일만에 10만 명이 들 정도로 기록적인 흥행을 이뤄냈다. 결국 서울관객만 30만, 극장 수나 낙후된 시설, 홍보 등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던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봤을 때 그 파장을 가히 짐작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흥행보다 더 대단한 점은 ‘홍길동’이 한국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이다. 애니메이션 제작과 관련된 노하우가 전무하던 시절에 미국, 일본의 애니메이션 서적을 연구해가며 ‘진로소주’ 광고 등 CF애니메이션으로 노하우를 쌓아가던 신동헌 감독은 70분 분량의 극장용 애니메이션에 도전하게 된 것이다.
이는 현재 애니메이션 강국으로 군림하고 있는 일본 최초의 컬러 장편 애니메이션 ‘백사전’ (1958)보다 단 9년 밖에 뒤지지 않은 것으로서 당시 양국 간의 격차는 그리 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홍길동’의 흥행성공은 이후 신동헌 감독의 ‘호피와 차돌바위’를 비롯해 수많은 창작 애니메이션이 제작된 60년대 말, 애니메이션 르네상스를 이끄는데 초석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연이은 흥행 성공에도 불구하고 창작의 고통과 노력만큼 그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했던 신동헌 감독은 불행히도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에서 손을 떼게 된다. 어쩌면 이때가 한국 애니메이션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영상자료원의 도움을 받아 감상할 수 있었던 16mm ‘홍길동’ 필름은 43년이 지난 지금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제작된 장편 애니메이션에 전혀 뒤지지 않을 정도의 흥미와 완성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홍길동’은 허균이 쓴 ‘홍길동전’과는 내용상 다소 차이가 있다. 이는 신동헌 감독의 동생 故 신동우 화백의 원작 ‘풍운아 홍길동’을 원작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율도국이라는 이상국가를 건설하는 허균이 쓴 원작과는 차이가 있지만, 탐관오리를 숙청하고 정의를 지키는 ‘홍길동’이라는 캐릭터는 영화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었다.
2007년 ‘로보트 태권브이’가 복원되어 역대 극장용 애니메이션 흥행 1위를 기록했던 것처럼 ‘홍길동’ 또한 지금 상영된다고 해도 충분히 흥행성이 있을 정도로 탄탄한 스토리와 짜임새 있는 연출력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유머가 살아있고 스토리에 반전과 재치가 넘친다. 액션장면 또한 매우 뛰어나서 67년 작품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힘들 정도이다.
이런 훌륭한 영화가 40년 동안이나 어두운 창고 속에서 잠자고 있었다는 것, 또한 이렇게 훌륭한 감독님께서 애니메이션 제작을 그만두는 현실을 돌아보며 여전히 기지개를 펴지 못하고 있는 한국 장편 애니메이션의 현실을 돌아보게 된다. 만약 그들이 가졌던 창작의 노하우가 고스란히 후배들에게 물려지고 꾸준히 발전되었다면 한국 장편 애니메이션의 산업은 얼마나 달라져있을까? 미국이나 일본과 같은 애니메이션 선진국과 이만큼의 격차가 벌어진 것은 어쩌면 우리가 이미 이룩했던 것을 잘 지켜내지 못해서가 아닐까? 한국 애니메이션의 미래를 논하기 전에 우리는 과거부터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