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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위한 빛나는 조연

2012-03-05


삼월이다. 아직 바람이 쌀쌀하지만, 쾌청한 오후엔 부암동 환기미술관에 가보자. 여전히 예스러운 멋을 자아내는 부암동의 살아있는 건축이다. 도심에서 가깝고 조용하면서 아늑한 화랑, 전시도 전시지만 건물 자체만도 하루 종일 감상하기에 충분하다. 자하문으로 더 잘 알려진 인근 창의문에도 올라보고 내친김에 북악 스카이웨이를 한 바퀴 돌아본다면 우리의 반나절은 삽시간에 쾌적하고 넉넉해질 것이다.

글, 사진 | 이은정 객원기자 (chunglyang1@naver.com)

환기미술관은 한국 추상화의 거목인 수화(樹話) 김환기(1913-1974)를 기린 부암동 북악산 기슭에 자리한 미술관으로 그의 부인이자 화가인 김향안이 1992년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미술관이기도 하다. 이곳의 설계는 김환기가 미국 뉴욕에 머물던 시절 친분을 쌓은 건축가 우규승이 맡았고, 구체적으로 준공되는 과정에서는 도미니크 보조(당시 퐁피두 센터 총관장)의 조언도 크게 영향을 끼쳤다. 한국 건축가의 작품으로는 유일하게 세계적인 미술관을 소개한 저스틴 헨더슨(Justin Henderson)의 ‘Museum Architecture’에 실리기도 해 미술학도들만큼이나 건축학도들의 가슴도 설레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건축가 우규승은 북악산이라는 배경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자연과 공간의 순환을 빌려, 화가의 정서와 예술에 어울리는 공간을 북악산 위에 버무려 놓았다. 이는 김환기의 작품 색과 맞닿아있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의 표현을 빌리면 김환기의 점화 작품에는 서구 모더니스트들의 냉랭하고 물질뿐인 미니멀아트에서는 느낄 수 없는 동양적 서정과 인생이 서려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환기미술관은 마치 내공이 쌓여 표정에 변화가 없는 ‘고수’처럼 느껴진다.

“나는 동양 사람이요, 한국 사람이다. 내가 아무리 비약하고 변모한다 하더라도 내 이상의 것을 할 수가 없다. 내 그림은 동양 사람의 그림일 수밖에 없다. 세계적이기에는 가장 민족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예술이란 강력한 민족의 노래인 것 같다. 나는 우리나라를 떠나 봄으로서 더 많은 우리나라를 알았고 그것을 표현했으며 또 생각했다. 우리들은 우리의 것을 들고 나갈 수밖에 없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는 김환기 화백. 그래서일까, 그의 그림에서는 산, 강, 달, 매화, 사슴 등 자연을 소재로 우리네 정서를 아름답게 조형화, 추상화한 작품들이 많다. 미술관에 대한 김환기의 요구 역시 한국적 정취와 현대적 세련미의 조화였다고 설계자는 말한다. 그래서 미술관의 외관은 포천석과 문경석 화강암과 같은 재료로 민족정서를 표현하려 한 흔적이 엿보인다. 납을 입힌 지붕의 돔과 미색의 화강암 벽면에서는 선생의 작품세계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또한 담장은 원래 이곳에 있던 산성의 형태를 그대로 본떠 만들었다. 서양식 건축이지만 북악산에 어우러지게 안착시켜 하늘을 받치고 있는 형국이다.

건물은 작품을 압도하지 않는다. 다만 최상의 상태로 보존하고 전시할 뿐이다. 공간의 주객이 전도되지 않고 미술 감상과 건축 체험이 서로를 감싼다. 즉 건물은 작품을 위해 존재하지만 건축 자체가 하나의 퍼포먼스로 변질되지 않기 위해 뒤로 물러서 제 몫을 다하는 것이다. 건축은 순수예술이 아니기에 뚜렷한 목적을 갖고 사용자의 편의성을 배려해서 지어져야 한다. 더군다나 전시공간인 미술관은 예술품을 만나는 행위가 단절되지 않고 연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곳이기에 관람자의 입장에서 작은 휴식과 호흡이 요구된다. 바깥에서 보면 화랑 전체를 빙 둘러싼 외부계단부터 관람자를 집안으로 초대한다. 전면도로와의 고저 차가 8m이상 나는 급경사 대지에 지었으니 어쩌면 계단은 불가피한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88서울올림픽 선수촌 설계 당선으로 이름을 떨친 건축가 우규승은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계단을 건물의 매력으로 바꿔놓았다.

이제 계단을 올라가자. 시점이 달라지는 주변 북악산과 인왕산을 바라보고 모퉁이, 뜰, 창, 내부와 외부의 들락거림을 다 음미하고 구경해야 한다. 맨 꼭대기 라일락 그늘 아래 잠깐 멈춰 서서 숨을 고르는 그 순간, 비로소 이곳의 미감은 제대로 발휘된다. 시설은 본관, 별관, 수향산방의 세 개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본관은 3층 건물로 전시실과 수장고, 관장실, 학예 연구실, 사무실이 자리한다. 별관은 1층의 카페테리아와 아트샵, 그리고 2층의 기획 전시실로 구성된다. 그리고 수향산방(김환기와 김향안의 호인 ‘수화’와 ‘향안’에서 딴 이름)은 1층은 강의실, 2층은 기념관으로 꾸며져 있다. 1~3층의 전시실은 천장의 막힘이 없이 뚫려 있어 각 전시실 역시 하나로 연결돼 작품을 감상하며 이동하다 보면 마치 미로를 빠져 나가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재미있는 것은 1~3층의 전시공간이 원형계단으로 둘러싸여 연결돼 있어, 이 계단을 따라 3층 꼭대기 옥상 정원에 오르면 다시 건물 외부를 휘감는 또 다른 원형 계단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원형계단은 밖은 안으로, 안은 밖으로 통하는 건축의 유연성을 한껏 드러내는 매개체다.

이제 안을 샅샅이 볼 차례. 부득이한 사정으로 3월 22일까지 전시는 쉬지만 그 이후로는 늘 본관 1,2층에 김환기의 그림이 상설 전시돼 그의 유명한 점묘 그림을 언제나 감상할 수 있다. 벽은 모조리 하얗다. 흰 빛은 수화(樹話)의 꿈꾸는 듯한 파랑과 분홍, 노랑을 상냥하게 떠받쳐 준다. 흰 바탕 위에 단조롭게 떠오르는 파랑, 분홍, 오렌지빛 점들을 가만히 오랫동안 들여다보는 즐거움, 그것이 미술관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행복의 핵심이다. 마룻바닥도 가벼이 지나칠 수 없다. 자잘한 단풍나무 조각들을 촘촘히 잇댄 세련된 마루판은 그 자체가 수화 그림의 점묘이미지를 넘나든다.

전시를 위한 조명은 미술품의 보존 및 조명조절이 쉬운 인공조명으로 하고 드로잉 전시실을 제외한 각 층의 전시실들을 공간의 폐쇄성을 극복하기 위해 천정과 벽면 곳곳에 자연채광 창을 냈다. 옥상 정원의 중앙에는 우물이 하나 있다. 중정(가운데 우물)이라 불리는 이 우물은 모든 공간을 한데 모아주는 건축의 핵이다. 또한 크게 뚫린 3층 창을 통해 왼편으로는 북악산이, 오른편으로는 인왕산 자락이 눈에 들어온다. 박미정 관장은 “도심을 벗어난 것 같은 미술관에서 작품도 감상하고, 창을 통해 들어오는 자연의 정취에도 마음껏 젖어 보라”며 봄에는 야생화들이 만발하는데 향기에 취해 잠깐의 낮잠을 즐기기에도 그만”이라고 설명했다. 밖에서 안으로 스미는 빛의 산란이, 안에서 밖으로 퍼지는 풍경의 확산이 김환기의 캔버스를 세상에 펼쳐놓는다. 환기미술관에는 김환기를 대하는 우규승의 마음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환기미술관은 다양한 레벨과 여러 개의 매스가 일련의 흐름을 만들어내어 보는 이로 하여금 다양한 공간감을 체험 할 수 있도록 한다. 또한 유기적인 리듬이 빛과 공간의 크기에 관한 감각적 경험을 제공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움직이지 않지만 움직이는 공간과도 같은 곳. 그 점은 채워짐과 비워짐, 가려짐과 보임, 그리고 사람 사이 움직임의 관계를 고려하는 한국 전통 공간을 닮아있기도 하다. 비워져 있음으로 해서 채움을 만들고, 내부에서 보이는 외부 풍경을 신중히 처리하고, 과장된 스케일을 배제하는 모습이 그렇다. 또한 빛을 통해 따뜻하고 밝은 미술관을 만드는 이곳은 전통의 공간이 가지는 요점을 추려 지금의 보편적 미감 안에 녹이는 해법에 관한 유용한 풀이다. 그림을 보다 길을 잃어도 좋은, 산책자에게는 더 없이 즐거운 곳이다.


http://www.whankimuseum.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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