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걷지 않는 눈 덮인 산 속에 조용히 발자국을 남기며 유유히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그가 남긴 발자국의 흔적들이 고요히 산자락을 감싸 돌며 감미로운 은율을 머금고 나지막이 울려 퍼진다. 마치 우리의 아름다운 산하를 향해 말없이 울려 퍼지는 메아리처럼…. 장충동 환경그룹빌딩에서 만난 곽영훈 회장과의 인터뷰 과정에서 전해져온 감성적 여운이다. 왜일까 왜 그가 풀어낸 한보따리의 인생여정이 그토록 가슴 시리도록 정겹게 느껴지는 이유가. 그의 희끗희끗해진 머리카락을 더듬어 몇 권의 책과 함께 전해진 그가 살아온 가슴 벅차고 울컥해지는 그의 드라마 같은 인생여정 속으로 들어가 본다.

취재_ 월간마루 김용삼 편집장
사진_ 월간마루 이종현

곽 회장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우선 그의 저변 깊숙이 자리잡은 철학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숨 가쁘게 달려온 언덕길의 중턱에서 잠시 자신의 철학을 되짚어간다는 곽 회장은 ‘말.글.일.삶.얼’이라는 다섯 가지 도덕률을 항시 오른손가락에 붙여놓고 산다는 자신의 철학을 되뇌인다. 중요한 말은 글로 옮겨야 하고, 글은 또 일로 구현되어야 하며 일은 삶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그 삶 속에는 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가 강조하는 오른손법칙이다.

즉, 바른 손이니까 바른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항상 마음에 두고 창작에 몰두한다는 왼손법칙도 그의 좌우명과도 같이 따라다닌다. 세계, 인간, 환경, 미래, 평화의 줄인 말인 세.인.환.래.평(世.人.環.來.平)은 무슨 일을 하든지 세계를 알고, 사람에게 궁극적으로 도움이 되게 하여, 환경 보전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작품을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또한 균형과 조화를 염두해 두며 항시 창작에 몰두한다는 그의 말에 그가 살아온 화려한 경력만큼이나 우리가 살아온 이 땅의 도시환경을 미리 예측하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한 그 이기에 더욱 친숙하게 다가온다. 가히 선구자적인 기질로 한국의 도시환경에 커다란 획을 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드라마같은 꿈의 여정은 1943년 충남 홍성에서 시작한다. 대천해수욕장의 풍경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오는 아름다운 풍경과 집 지붕에 걸쳐있는 살구나무의 추억을 머금고 무럭무럭 자라난다. 이후 1958년 종로구 견지동으로 이사와 한옥의 사랑방에 머물면서 사람들이 사는 곳을 아름답게 꾸민다는 꿈을 이어간다. 그러던 중 그가 고등학교 3학년 진급을 앞둔 1962년 초 미국에 방문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미국 백악관과 협력하여 미국적십자사가 주관하는 Operation VISTA(Visit of International Students to America)라는 프로그램에 한국 대표로서 선발되어 미국의 도시 전역을 둘러볼 수 있었고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면서 세계평화에 대한 메시지에 감동을 새긴다.
이후 당시 암울한 교육환경 하에 몇해 남기지 않은 고등학교시절 총학생회 대의원 의장을 맡은 그는 정학처분을 받게 되었고, 어렵게 단돈 200달러를 손에 쥐고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솔트레이크시티의 고등학교 입학, 잇따른 케네디대통령서거 소식, MIT공대의 입학 취소라는 시련을 겪게 되었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은 그는 워싱턴 D.C의 하워드대학 건축과에 전액 장학금으로 입학하였고 이후 1965년 겨울 오하이오주립대학으로 학적을 옮겼다. 그곳에서도 한국의 전통무예인 태권도를 손수 알리어 ‘징기스 곽’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하였다.

대화가 무르익자 곽 회장은 1964년 여름 미국 적십자사로부터 연례회의에 연설을 요청받은 기억을 중요한 에피소드라고 떠올린다. 뉴욕 힐튼호텔에서 수백 명의 적십자 대표들이 모인 가운데 자신의 인생과 자신이 한국을 위해 무엇을 할까라는 연설을 하였고 우레와 같은 갈채를 받았다. 연설을 마치고 회의장을 나서던 중 블론드 머리에 하얗고 갸름한 한 미국 여학생이 찾아와 그의 연설에 감명을 받았다며 손을 잡고 이끈 곳이 뉴욕 만국박람회장이었다. 여기서 곽회장은 건축과 조경이 한데 어우러진 조화로운 지구촌 전시장을 보고 이는 93대전엑스포의 꿈을 영글게 한 씨앗이 되었다. 곽회장은 그 여학생을 블론드 머리를 가진 천사라고 나지막이 되뇌인다.
1966년의 겨울을 곽 회장은 자신의 인생에 또 하나의 날개를 다는 해로 기억된다고 토로한다. 그가 그토록 원하던 MIT 입학허가를 받은 것이다. 이후 밤낮의 구분없는 열정으로 학업에 몰두하는가 하면 태권도장을 열어 한국무예의 자부심을 실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68년 하버드 정부대학원에서 정책과정을 배우게 되었고 자신이 제안한 케네디 정부대학원이 하버드대학 행정대학원의 정식 명칭으로 확정되기도 하였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믿음이 깊은 사람에게 찾아오는 시련은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고나 할까. MIT에서 학사와 석사학위를 동시에 받게 되기 열흘 전쯤 그가 잠자던 건물의 화재로 인해 졸업논문이 모두 불타게 되었다. 이후 3개월이 더 지나 MIT 도시설계 석사학위(M. Arch.)를 취득하였고 졸업후 곧바로 MIT 건축 및 도시환경설계 최고과정에 동양계로서는 유일하게 입학하여 1971년 MIT로 편입한 지 4년 만에 최고과정을 수료하였다.
이후 한국에 돌아가 비무장지대 근처에 평화교육도시를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하버드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73년 교육학 석사학위(M. Ed)를 취득하였다. SDDA라는 조경회사에 입사해 조경설계를 배우던 중 결국 부친의 폐암으로 급히 귀국하여 임종을 보게 된다. 실로 진한 감동과 흥미진진한 소설 같은 한 인간의 험난한 여정이었다.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오랜 건물을 헐고 새 건물을 지을 때, 우리는 단지 낡은 건물을 잃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세월의 의미를 잃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 안에 살던 사람들의 존재 가치와 흔적, 그것이 주는 의미까지 잃게 되는 것이다.” 곽 회장은 미국 유학생활이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3개월간 미국과 캐나다 대륙횡단을 하였고 아르바이트로 유럽배낭여행을 함으로써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오스트리아, 독일 오랜 역사와 함께 숨쉬고 있는 세계의 도시환경 디자인을 몸소 체험하기도 하였다. 이때 뮌휀에서 직접 돌아본 올림픽시설들과 운영방식을 통해 향후 88년 서울올림픽 계획을 실천하기에 이른다.

미국에서 귀국한 곽 회장은 한국종합조경공사에서 초대 상임고문을 맡게 되면서 한국의 조경개념을 다시 정립하기 시작하였다. 남산의 수려한 산세를 최대한 자연상태로 되살리고 한강을 조망할 수 있는 도시공원을 계획하고자 한 것이다. 이후 안동댐으로 수몰위기에 처한 도산공원과 강릉 오죽헌 등에서 한국의 전통유산을 되살리는 작업을 통해 전통을 해치는 몰상식과 부조화를 막기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당시 국내 사정은 사대문안을 21세기 서울의 도심이라고 간주하고 아무 대책없이 개발하고자 하는 주된 흐름이었다. 마치 남산을 통째로 없애자는 도시계획가의 말처럼….

그런 와중에 만들어진 것이 ‘사람과 환경’그룹인 것이다. 사람들이 잘 살 수 있도록 더 좋은 환경을 만드는 전문가들이 모여 있는 회사를 통해 사람을 위한 환경, 아름다운 삶터를 만들기 위한 곽 회장의 끊임없는 도전이 시작된 것이다. 서울대학교의 캠퍼스 이전으로 자칫 주택과 아파트로 변해버릴 수 있던 대학로를 문화예술의 거리로 탈바꿈 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문화와 예술과 지성이 담아내고 보행자 전용환경을 통해 살아 숨쉬는 문화거리를 강력히 주장했고 그것이 서울시에 반영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동숭동 일대에 새로운 문화예술의 거리의 공연장과 미술관 프로그램과 입지가 정해졌고 건축은 고 김수근 건축가가 맡았다. 그것이 현재 대학로와 마로니에 공원이고 곽 회장은 현재 문화공간보다 요란한 술집들이 기승을 부리는 거리행태에 씁쓸함을 표한다. 그래도 주택과 아파트로 둘러싸인 콘크리트 장벽이 들어서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지금도 곽 회장은 창신동입구에서 혜화동 로터리를 산보하곤 한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미국 SDDA 조경회사에 몸담을 즈음 김대중 납치사건 당시 구명운동에 앞장섰던 사람, 그로 인해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강의를 하였지만 교수로 임용되지 못하였고 이후 1977년 홍익대학교 도시계획학과 부교수로 임용되어 건축, 조경, 도시계획, 교육행정의 강의로 학생들과 생각을 나누는 교육을 실천하였다. 즉 “배워서 남 줘라”는 자신의 소신을 올곧게 실천한 것이다.

“서울은 많은 구릉과 산으로 지형지세가 다채로운 곡선을 가진 참으로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북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 우면산, 응봉산 등 수많은 명산들이 서로 어울리고 또 견제하며 자리를 잡고 있고 수량이 많고 평균 1km 이상의 폭을 가진 수려한 한강이 흐르는 곳, 600년 조선의 도읍다운 면모를 갖춘 아름다운 도시가 바로 서울입니다.”
대학로 설계를 성공적으로 마친 곽 회장은 그 축을 남산과 장충단공원까지 연계하고자 하였다. 동대문과 광화문을 되살리는 동시에 동서를 가로막는 장벽같은 건물을 없애고 종묘에서부터 남산골로 연결되는 자연스러운 녹지환경 축을 만들고자 하였다. 그저 높은 건물을 세우려고 하던 건축가들에게 10년 후나 100년 후의 도시가 미치는 영향을 미리 제시한 것이다. 나아가 서울, 경기 그리고 인천을 하나의 메타폴리스 개념으로 보고 21세기 지구촌 문명의 철학을 담아낼 광역적 구상을 구현하고 있다.

그런 과정에 서울의 생명줄인 한강을 서울시민의 생활환경으로 활용하고 동서로 흐르는 한강의 녹지축과 북한산, 남산, 용산기지, 동작동 국립묘지, 관악산으로 이어진 녹지축을 그 골격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인왕산, 낙산, 우면산 등의 산세를 살리고 탄천, 수색천, 중량천, 청계천, 안양천 등의 지류를 한강에 연결시켜 보행자 전용도로의 맥을 살리고자 한다는 제안을 하였고 이는 향후 한강종합개발사업의 효시가 되었다.

나아가 88서울올림픽유치와 함께 시작되었고 세계의 이목을 서울로 끌어들였던 올림픽경기장 올림픽공원 마스터플랜과 올림픽도로건설 등 곽 회장이 그려온 한강개발계획은 서서히 구현되기 시작하였다. 이즈음 한강개발 자문위원으로 위촉된 곽 회장은 서울시민의 휴식공간으로서의 도시조경학적 측면의 한강종합개발을 실현하였고 한강 쪽으로 규모가 큰 건축물들의 배치를 유도하였다.
그것이 바로 63빌딩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곽 회장의 발걸음은 93대전엑스포로 옮겨졌다. 가운데 중심축으로 엑스포탑을 두고 서쪽으로는 ‘세계, 인간, 환경, 미래’의 여러 테마관을 두고, 동측으로는 과거, 현재, 미래의 테마를 배치하였다. 과거에는 우리 문화의 뿌리를, 현재에는 경제성장의 현황을, 그리고 미래에는 참여국가와 국제조직이 모두 함께 환경의 미래를 보여주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때 그가 붙였던 ‘도우미(道 友美) 역시 행사진행 요원을 널리 통칭하는 용어로 현재까지 쓰이고 있다.

곽 회장의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은 강북의 서북측에서 강남의 동남쪽으로 새로운 지하철 선형을 잡아 서울의 선형을 잡는 개발을 제안하였고 현재와는 다소 차이점이 있으나 그것이 바로 서울의 동맥이 된 지하철 2,3호선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곽 회장은 도시장기종합발전계획을 제안하였고 각 지방의 도시들이 21세기 꿈을 가진 계획된 도시로서의 계획적인 개발방향을 수립하게 되었다.
이미 충청도 행정수도 이전문제가 본격 논의되기 전인 1977년 한국의 새로운 행정수도건설을 위한 도시계획과 도시설계 작업에 중추적으로 참여하였던 그였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나는 영종도가 서울과 국역의 사랑방 역할을 수행할 날이, 그리하여 세계가 한국과 한국이 세계와 교류하고 융화하는 공간이 될 날이 오리라고 믿습니다.” 전국의 균형적인 발전계획을 추진하던 곽 회장은 영종도와 용유도, 무의도 일대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한국인의 얼이 서린 강화도 마니산은 개성의 송악산과 서울의 북악산과 거의 정삼각형을 이루고 있고 그 지역이 바로 영종도이며 동북아의 공간적 중심위치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곽 회장이 강조하는 영종도의 세계시 건설구상으로 이미 1995년 ‘수도권 신공항 주변지역 개발구상 및 타당성 조사연구’와 ‘세계시 계획 기본구상’으로 나타났고 인천권과 경기도, 그리고 서울의 구조를 서로 호흡하도록 한다는 의미에서 메타폴리스(Metapolis)라고 명하였던 그다. 그리고 그곳에서 환경그룹은 우리네 전통가옥의 사랑방처럼 손님과 주인이 교류하는 곳이자 토론과 융화가 이루어지는 공간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의 올림픽평화운동과 올림픽평화의 문 등의 인생여정에서도 잘 나타나듯 곽 회장은 우리민족을 갈라놓은 DMZ 근처에 남북이 합의하여 세계인들이 모여 살 수 있는 통일평화시를 제안한다. 지구촌 문명을 화이부동(和而不同)하게 하기위해 지속적으로 환경그룹과 곽 회장이 만들어가는 의미 있는 도시계획인 것이다. “사람이 환경을 만들고 환경이 사람을 만듭니다.”

국운의 날개, 천리안과 동북아 중심 한반도, 통일한반도 국역환경계획, 국립경기장활용방안구상, 올림픽공원실시설계, 대전둔산 행정타운 기본계획 및 설계, 영종도 세계시 개발구상, 수도권 신공항 주변지역 개발구상 및 타당성 조사, 목포신도심 택지개발사업기본계획 설계, 필리핀 수빅만 이코노폴리스 개발구상, 일반 쿠시마해안 관광개발구상, 이집트 시나이반도…. 그의 집무공간에 빼곡히 채워진 마스터플랜에서 곽 회장의 도시건축가로서의 힘 있는 드로잉과 피땀 어린 순수 열정을 읽어본다.

매사 긴장된 격동의 세월을 몸소 겪어온 곽 회장의 도시 건축가로서의 삶은 이제 중경(Metapolis)이라는 개념으로 차분히 진행되고 있다. 600년을 넘어선 서울 정도의 역사가 소중하듯 50년, 100년, 나아가 다시 600년 후인 2594년 이후의 서울의 모습을 나아가 전 국토의 모습을 그려나가고자 하는 것이다. 점차 우리의 숨통을 조여들고 있는 수많은 대기오염물질, 흡사 동맥경화증에 걸려있는 듯 누더기화 되고 엉켜진 동선체계에 혼잡을 드러내는 우리의 도시 공간구조의 암울한 현실. 작금의 시점에서 우리는 곽영훈 회장이 그동안 가슴으로 보여주고 몸소 실천한 ‘서울이 얼이 살아 숨쉬고 화이부동과 우리위분성의 깊은 철학을 곱씹어 보아야 할 때가 아닌지 생각해본다. M 문의 02-2275-6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