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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이스 | 리뷰

비우고 비우다 보면 그 진실에 가까워진다. 디자이너 김백선

2005-06-14

디자이너 김백선을 만난 것은 오랜만에 시원한 빗줄기가 내리 붓던 어느 여름날이었다.
잠시 기다리라는 말에 나는 그 무엇에도 관심을 두지 않은 채 편안해 보이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가방 속 명함을 꺼내고는 문득 고개를 들어 앞을 보는데, 순간 이곳이 어디인가 하는 난데 없는 생각에 정신이 깨었다. 그를 기다리는 내 눈 앞에는 마치 어느 별천지에 와 있는 듯 커다란 나무가 나무답지 않게 두 팔 벌려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전날의 무더위를 씻어 내리는 빗줄기에 더욱 푸르른 나무 이파리 하나 하나와 인사를 나누고 있노라니 그를 기다리는 시간이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

인터뷰 | 호재희 정글통신원 (lake-jin@hanmail.net)

그를 만나자마자 ‘나무’의 정체를 물었다. 아니, 뜰 안에 나무들이 하나같이 너무 예쁜 모양을 하고 있어 꼭 물어야만 했다. 동양화과를 나온 탓인지 그 소재가 되는 것들이 가지고 있는 미학에 남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답한다. 곧으면서 단아한 느낌이 나는 대나무, 조악하지 않은 아름다움을 간직하는 백일홍. 무언가 조용한 아름다움이 좋단다. 그래서인가. 그의 디자인 또한 나서지 않는 잔잔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의 작품에는 그만의 스타일이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단번에 그 아름다움을 표현하자니 머뭇거려 지는 까닭은 무엇인지. 그에게 그 스타일을 물었더니, 자신도 스스로에게 묻고 있는 중이라며 웃는다. 그렇지만, 순간 웃음을 멈추며 하고 싶은 공간에 대한 생각은 분명하단다. 그 단호함이 바로 내 머리에 와 닿는다. 네트워크. IT시대라는 핑계로 미디어 상의 네트워크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공간을 살아가는 인간 서로의 관계성을 중시 하는 공간의 표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공간이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 인간과 현상, 사물과 사물……모든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으로 이러한 관계의 복합적인 문화가 녹아 들어야 좋은 공간이 나온다. 각기 다른 분야의 것이 네트워크를 통해 새로운 문화가 파생되어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공간 창조에 따른 또 다른 흥미거리.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 공간을 접근하는 방식에 대한 연구에 열심이다. 공간을 의뢰 받을 때마다 의뢰 받은 공간을 어떻게 해석하고 접근할 것인가에 대한 연구가 항상 그에게 던져진다.

공간은 모든 문화 현상의 관계를 포용해야 한다고 믿는다. 공간은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이다. 그렇기에 인간과 인간의 네트워크를 놓쳐서는 안된다. 무엇보다 이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사람이다. 사람이 가장 아름답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생각하고 서로 교감하는 것 또한 아름답다. 오히려 완벽하지 않기에 더욱 아름다울 지도 모른다. 요사스러운 감정에 휘둘려 그러한 인간의 아름다움을 놓친다면, 세상이 우울해지지 않겠는가.
이처럼 무엇이든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 또한 중요하다. 진실이라는 것도 시간이 지나면 변하기 마련인데, 그 모든 것을 이해하고 포용하다 보면 공간을 표현할 수 있는 그릇이 커지더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연이 있어야 만나듯 공간과도 연이 있어야 작업을 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사람을 골라 만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간도 싫다고 작업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 주거에 대한 관심이 많은 디자이너 김백선은 불특정 다수가 아닌 특정 누구를 향한 주거공간 디자인이 그리도 즐겁단다.
예를 들어, 지휘자는 커튼을 여는 손끝에서도 아름다움이 나온다고, 사람의 생활이 그 몸에 밴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하기에 무엇보다 공간 사용자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하다.

될 수 있는 대로 공간을 비우려 노력한다. 공간에 어떠한 물건이 존재한다면 공간 이용자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 물건과 대화를 하게 될 터. 디자이너가 공간에 불필요한 무엇을 만든다는 것은 공간 사용자에게 무의식중에 그것과의 의사소통을 강요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야기이다. 따라서 비워짐으로써 더 많은 것을 생각하고 느끼게 하기에 더 많은 것을 줄 수가 있다. 오히려 비워냄으로써 소유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그가 의도하는 디자인 아닐까 싶다. 이야기하는 내내 관조의 미학, 여백의 미학을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일은 재미있다. 재미가 있으니 이리도 사랑할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 그러나 현재 일에 대한 재미는 어릴 적 생각했던 그 재미를 넘어섰다. 무언가 성취하는 느낌이랄까? 팀 구성원들과의 협업을 통해 하나의 프로젝트를 끝마치고 나면, 재미를 느끼기 이전에 사람이 그 공간에 포함됨으로써 무언가가 완성되었다는 느낌이 참으로 좋다. 스스로의 디자인에 빠져 만족을 느끼기 보다는 내 디자인을 다른 사람이 이해하고 받아들여 줄 때 디자인 작업에 대한 그 이상의 행복은 없다.
온갖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협업하는 것이 즐겁다. 삶을 담는 공간이라는 자체가 그렇지 아니한가. 작게는 밥그릇 하나에서 패브릭까지 다양한 것들이 모여 집을 이룬다. 어찌 인테리어 디자이너 혼자 모든 것을 다하려 하는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함께 해서 완성해나가는 재미가 좋다. 결국에는 공간 뿐 아니라 라이프 스타일을 제안하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은 디자이너가 되기 참 힘든 환경이다. 그렇지만, 디자인이 좋은데, 환경이 좋지 않다고 포기할 소냐. 내가 힘들었다면, 나의 뒤를 따라올 후배들을 위해 내가 좋은 땅을 일궈야 한다. 어떠한 분야든지 함께 성장해 나가는 것이 올바른 문화가 아닐까. 저변에 기존의 문화가 굳건하게 깔려 있는 가운데 새로운 것 또한 도출되어 나와야 한다. 무엇보다 스스로 사랑하고 믿는 만큼 타인을 사랑하고, 스스로의 디자인을 믿는 만큼 타인의 디자인 또한 믿어주어야 한다. 무엇이든 비우고 이해하면 좋은 디자인이 나올 수 있다고. 그러한 환경을 개척해 나아가는 것이 디자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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