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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 리뷰

시인과 편집자에서 미학자와 사진가로

2011-09-06


추억을 머금은 질박한 옹기처럼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옛날사람’이 있다. 민병일(52)은 최근 자신이 수집한 옛 고릿적 물건들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한 권의 산문집으로 펴냈다. ‘나의 고릿적 몽블랑 만년필’에는 시인이자 출판인, 예술이론가이자 사진가이기도 한 그의 예술에 대한 관심과 문화에 대한 애정이 고스란히 담겼다.

글 | 월간사진 김보령 기자


민병일은 1993년 친어머니처럼 모시고 따랐던 소설가 고 박완서와 함께 소설 ‘토지’의 무대인 경남 하동 평사리를 찾았다. 그리고 소박하고 정겨운 농촌의 시골풍경을 사진에 담으며 처음 카메라를 손에 잡았다. 그때의 감흥은 ‘평사리에서’라는 시로 옮겨졌다. 그 자신이 두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면서, 고 박완서를 비롯한 대한민국의 유명한 문인들의 책을 펴냈던 출판사 편집주간이었던 민병일은 마흔을 코앞에 남겨둔 어느 날 예술에 대한 동경에 이끌려 문득 독일로 늦깎이 유학을 떠난다.

독일에서 시각예술이론과 사진미학을 공부하던 그의 손에는 언제나 카메라가 들려있었다. 그리고 ‘고려대장경’과 ‘신라왕릉’을 찍은 사진으로 책을 내고 전시를 열어 한국의 문화와 전통예술을 독일에 소개하기도 했다. ‘나의 고릿적 몽블랑 만년필’은 그 시절 민병일이 독일마을의 벼룩시장에서 만난 오래된 사물들과 평소 그의 편애를 받았던 고릿적 물건들에 대한 이야기다. 주말마다 벼룩시장을 순례하며 만난 오래된 사물들에는 세파를 견뎌낸 아름다움과 삶의 진정성이 배어 있었다. 천상 인문학도인 그의 눈에는 아무리 남루한 물건이라도 숭고한 삶과 예술적인 아름다움이 먼저 들어왔던 것이다.

민병일에게 사진은 자연스러운 끌림이다. 장터의 고릿적 물건들을 거두며 사진을 찍은 것처럼 2004년 독일에서 돌아온 후에는 평사리를 다시 찾아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수십 년간 찍어 모은 평사리 사진으로 2009년 첫 사진집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평사리를 추억함’을 펴냈다. 이듬해 독일사진가 호르스트 바커바르트의 ‘붉은 소파’를 번역하기도 한 그는 현재 대학에서 미술, 사진, 문학의 상호관계를 예술적인 관점으로 강의하고 있다.


20년 찍어온 평사리, 대장경과 왕릉 독일에 소개

평사리도 많이 변했다. ▷
변한 정도가 아니라 천지개벽했다. 편집주간을 지내던 1993년에 소설가 박완서와 이경자, 시인 곽재구 등과 함께 남도여행을 하며 처음 평사리를 찾았다. 그때는 어느 집 돌각담 너머로 삐죽 나온 앵두를 손으로 따먹어도 될 만큼 인심 좋은 시골이었다. 늦가을 추수가 끝난 빈 들녘처럼 아름다운 풍경뿐 아니라 악양뜰을 내려다볼 수 있도록 가옥 내에 만든 공루, 섬진강을 건너는 줄배 등 한국 마을의 전통적인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서울사람인 내게 매우 큰 인상이었고 위안이었다. 그리고 그때의 감흥이 계기가 되어 지금까지 사진을 찍고 시를 쓰게 되었다.

하지만 독일에서 돌아와 평사리를 다시 찾았을 때는 길조차 못 찾을 정도로 변해 있었다. 지자체에서 관광상품을 개발한다며 안목 없이 무분별하게 예전의 문화와 전통유산을 파괴해버린 까닭이다. 공루가 있던 자리에는 현대식 화장실이, 줄배가 다니던 강에는 다리가 놓였다. 물론 그곳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아쉬웠다. 그동안 찍은 평사리 사진을 모아 2009년 4월에 숙명여대 문신갤러리에서 전시하고, 이어 5월엔 평사리 마을에서도 전시했다. 이제 사진 속 노인들은 대부분 죽고, 사진 속 풍경도 간데없지만 추억 때문인지 마을 사람들 모두 좋아해주었다. 평사리 사진은 이후 독일 노르트가르트 국제전시회와 일본 삿포로의 전시장에도 걸려 본의 아니게 민족문화 성향의 사진가가 되었다.(웃음) 그저 좋아서 찍었던 사진인데 어느덧 전시까지 어영부영 물 흐르듯 하게 되더라.

독일에서는 시각예술이론을 전공했다. ▷ 독일의 학제는 학생이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공부할 수 있게 자유롭다. 그래서 시각예술이론을 전공하면서 평소 관심 있던 사진미학을 부전공으로 공부했다. 사진미학을 전공하며 한국문화의 가치를 학술적으로 연구한 두 권의 책을 냈다. 독일에 살면서 항상 내 나라의 문화와 예술을 소개하는 일이 중요하겠다고 생각하던 참에 고려대장경에 관심이 많은 지도교수를 만났고, 방학 때 한국에 들어와 곧장 해인사로 찾아갔다. 외부인은 절대 들어갈 수 없는 장경각 안에 갖은 수를 써서 겨우 들어가 숨도 안 쉬고 고려대장경을 찍었다. 학술적인 용도의 사진이었기 때문에 바닥구조와 환기통, 통풍을 위해 대장경을 서로 엇갈리게 세워놓은 모습, 대장경판으로 찍은 인쇄물까지 사료적 가치가 있는 것은 모두 찍었다. 당시만 해도 고려대장경에 관한 사진과 관련 자료가 턱없이 부족했고, 내가 찍은 사진과 글은 ‘Tripitaka Korean’이라는 책으로 엮어져 구텐베르크 뮤지엄의 그룹전에 전시되기도 했다. ‘신라의 왕릉’(Die Konigsgraber von Shilla)은 사진미학 교수가 이전에 내가 찍은 경주왕릉 사진에 흥미를 느끼면서 시작된 작업으로, 역시 그 결과물도 책으로 펴냈다. 독일에는 중국과 일본에 대한 자료와 관심은 많지만 한국이라는 나라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진에 인문학도의 감성이 느껴진다. ▷ 사진학과에서 정식으로 사진을 배운 적은 없지만 상관없다. 사진을 찍는 것은 테크닉이 아니라 찍는 사람의 마음 속 인문학적인 총화이기 때문이다. 문학적 소양, 음악적 감수성, 미술적 형상능력, 건축적 시각 등 한 인간의 내면에 축적된 교양으로서의 바탕이 좋은 사진을 찍게 만든다고 믿는다. 그래서 문학을 하던 나 같은 사람도 사진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980년대 이후 한국문학에서는 장르 확산 내지는 해체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군사독재 밑에서 기존의 문학적 양상만으로는 대응하기가 무력했기 때문에 문학 자체가 진화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다른 예술과 문화에서도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사진도 오직 작가들만이 찍을 수 있다는 개념에서 벗어나고 있다. 뷰파인더를 통해 어떤 시각으로 대상을 바라보고 담아내는지의 문제는 누구나 고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사진가라는 타이틀은 내게 무색하다. 마음의 눈으로 세상의 무엇을 어떻게 볼 것인지가 문제다. 아마도 시를 썼기 때문에 카메라를 가지고도 시를 쓸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웃음)


오래된 사물들이 말을 걸어오는 순간

아무래도 전시보다는 책의 형태로 사진을 보여주는 방식이 더 편할 것 같다. ‘나의 고릿적 몽블랑 만년필’은 어떻게 쓰게 된 책인가? ▷
원고의 일부는 독일 유학 시절에 쓴 뒤 서랍 속에서 잠자다가 일년 전 원고를 본 시인 정현종 선생의 격려로 세상 빛을 보게 되었다. 그동안 수많은 책을 만들어왔지만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정작 내 책은 손도 대지 않게 되더라.(웃음) ‘나의 고릿적 몽블랑 만년필’에 나오는 사진은 마치 열애를 하듯 슬라이드 필름으로 찍은 것이다. 사물과 연애를 하듯 찍었기 때문에 사진에 어떤 감성이 묻어날 것이라 믿는다.(웃음) 독일 사람들은 100년 가까이 된 오래된 물건들도 쉽게 버리지 못한다. 주말이 되면 독일 전역에서 들어서는 벼룩시장에서 문화가 순환되고, 삶이 축적되는 깊이를 느낄 수 있다. 독일 문화만의 힘이다. 반면 한국은 새 아파트로 이사를 가면 멀쩡한 물건도 내다 버린다. 한국 현대문화가 천박한 이유다. 마치 문화를 순환시키는 환기통 역할을 하는 벼룩시장이 한국에는 없다는 점이 슬프다. 평사리의 변하는 모습을 사진에 담는 것처럼 한 시대의 문화가 사라지는 모습을 잡고 싶은 마음에서 찍은 사진이고, 쓴 책이다. 난 항상 늦다. 첫 산문집도 오십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서야 나오지 않았는가. 늦은 시작이니만큼 내 안에 오랫동안 축적된 어떤 것이 마치 오래된 사물 속의 감성처럼 다른 이들에게 전해졌으면 좋겠다.

고 박완서 선생과의 인연도 각별하다. ▷ 독일로 유학가기 전 출판사 편집주간으로 있으면서 ‘세계문화기행’이라는 도서시리즈를 기획했다. 먹고 즐기기만 하는 관광이 아닌 문화와 예술을 만나는 기행을 하자는 취지로, 한국의 문학성과 대중성을 모두 확보한 작가들을 국가별로 보내는 프로젝트였다. 그때 만난 인연이 박완서 선생이다. 티베트와 네팔을 함께 여행했는데, 선생의 글과 내 사진을 모아 엮은 책이 ‘모독’이다. 고산지대에서 수차례 코피를 쏟아가며 열심히 찍었다. 선생과는 선후배라기보다는 모자 같은 관계였다. 어머니가 없는 나를 친어머니처럼 챙겨주셨고, 나도 아들을 잃은 그분을 친아들처럼 따랐다. 지금 생각하면 부재의 틈을 서로 메워준 게 아닌가 싶다. 첫 산문집이 나오면 책을 들고 달려가 어린애처럼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럴 틈도 없이 갑작스럽게 돌아가셔서 가슴이 아프다. 나처럼 박복한 사람이 또 있을까.

요즘은 무엇을 찍고 있는가? ▷ ‘마음의 은유로서의 창’을 찍고 있다. 유학시절에 저녁 무렵 백열전구의 따뜻한 느낌이 밀려오는 유럽식 창이 그렇게 좋아보였다. 외로우니까 그랬을 것이다. 그때부터 어딜 가든 창을 찍었다. 바이칼 호수 주변부터 몽골과 체코, 서울과 지방까지. 창이 인간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미학적으로 풀어 보았다. 올해 안으로 ‘나의 고릿적 몽블랑 만년필’ 두 번째 책과 함께 ‘창’에 대한 작업으로 새 책을 내고 싶다.



* 본 기사는 <월간사진> 2011년 4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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