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전체보기

분야별
유형별
매체별
매체전체
무신사
월간사진
월간 POPSIGN
bob

아트 | 리뷰

싱글 여성사진가는 무엇으로 사는가?

2011-09-20


구술 | 백지순
정리/사진 | 포토라이터 이상엽
기사제공 | 월간사진 2009년 4월호


봄에 대해 : 요즘 무얼하고 살았나?

2008년 12월에 'Single 1_Woman in the Big League' 전시를 끝냈고, 강원다큐멘터리사진사업 기금을 수령해 종부와 종가집 음식에 대한 사진작업을 마무리했다. 그동안 모델이 되어준 사람들에게 줄 기념사진을 정리 중이다. 사진을 정리해 전달하기도 했다.

최근에 작업한 종부와 종가음식은 2006년부터 작업하던 것을 강원도의 도움으로 마무리하게 된 것이다. 원래 대학에서 식품영양학을 전공해서 그런지 음식에 관심이 많았고, 한 때 월간지에 음식에 관한 사진작업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전에 하던 모계사회 작업의 연장선에서 강릉의 종부와 종가음식에 관심을 갖게 됐다. 사라져가는 종부를 기록해야 한다는 의무감은 부계사회 맏며느리, 수십년간 한 가정과 가문의 그늘막이 되어준 존재에 대한 예의가 아닌가 했다. 요즘 대부분의 종손은 집안의 얼굴로 잘 교육받고, 잘 교육된 여자를 만나 괜찮은 연봉의 직업을 얻어 도시에서 거주한다. 그러니 종가를 유지하고 4대조 제사를 봉사하며 장과 술을 담그며 백여 가지의 식품을 관리하는 종부를 볼 수 있는 시간도 그리 오래 남지 않았다.

이제 봄이 온다. 2009년을 새롭게 시작하기 전에 뭔가 정리해야겠다는 느낌이다. 당신이 집까지 찾아온다기에 부랴부랴 방 정리도 했다. 하지만 이번 종부 작업은 개인전 등으로 내보이지 않을 것이다. 먼 훗날 회고전 때쯤 내보일까?(웃음)


종부에 대해 : 음식과 종부는 무슨 관계인가?

내 스승인 김수남 선생의 수십년지기인 강릉의 황루시 교수(민속학)는 이번 작업의 큰 후원자다. 강릉에서 종가를 소개받는데 그의 도움이 컸다. 강릉시 노암동에 열두대문집이라는 별호가 있는 ‘김윤기 가옥’도 그의 소개로 작업이 가능했다. 열두대문집을 찾던 날 마침 종부는 메주를 띄우고 있었다. 그날 작업을 끝내고 설에 와서 차례지내는 것도 촬영하겠다고 하고 돌아왔는데 정작 설 며칠 전에 전화가 왔다. 촬영이 어렵다 했다. 열두대문댁의 종부인 심순옥씨는 바깥 어르신이 새해 첫날부터 객이 드나드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첫 손님으로 여자가 오면 재수가 없다던 나라가 아니었나. 당연하다 싶기도 했지만 종부에게 바깥 어르신이 좋아하시는 것이 무언지 알려달라고 해서 시내에 나가 전병을 사서 그 다음날 다시 찾아갔다. 그 정성이 통했는지 결국 촬영 허락을 받아 냈다.

일 년 동안 종부가 음식을 만드는 과정을 들여다보는 것은 그 종부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식품영양학을 전공한 나에겐 음식이 더욱 각별할 수밖에 없다. 음식을 보면 그 지역의 환경과 문화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에 음식에 관한 관찰은 내게 매우 큰 흥밋거리다.


싱글에 대해 : 왜 결혼을 하지 않았나?

나에 대한 이야기는 남들이 힘들다고 생각하는 ‘3종 세트’를 갖췄다. 여성, 사진가, 싱글! 페미니스트이기보다는 휴머니스트를 지향하는. 93년부터 직업 사진가로 살았고, 여성이기 때문에 불편한 것은 없었다. 카메라 가방이 무겁다는 것 빼고. 오히려 여성이었기에 취재 대상이 경계심을 늦췄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장점이 되었다.

결혼하지 않은 것? 20대에 ‘첫 개인전까지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했다. 결혼하면 가사노동으로 인해 꿈을 줄여야 한다. 못된 여자가 되어야 하는데 그것도 싫었다. 개인전도 하고 그 위치에 가면 내 일에 간섭받지 않고 활동할 수 있지 않을까 했다. 그런데 개인전이 좀 늦었다. 2003년, 37살에 첫 개인전 '아시아의 모계사회'를 열었다. 다 떠나갔다!(웃음) 그래도 좀 노력하면 될 수도 있었는데, 그때 내 몸무게는 피크였다. 사실 싱글 중에 ‘혼자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그저 자신의 것을 포기할 수 없을 뿐이다. 앞으로도 혼자 살 생각은 없다.


싱글 작업에 대해 : 싱글 여성은 무엇을 보여주나?

성직자나 노예를 제외하고 결혼에 의존해 생활이 가능했던 중세 봉건사회를 지나, 1879년 헨리 입센의 소설 ‘인형의 집’에서는 노라가 집을 뛰쳐나온다. 아직도 노라가 귀가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렇다면 노라가 요즘 시대에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애초에 가정으로 들어가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백지순의 아이디는 ‘노라지순’, 블로그는 ‘Norajisoon’s house’이다)

나의 카메라 앵글은 자연스럽게 현모양처로 살기보다는 자아실현을 위해 공부나 일을 선택한 여자 싱글에게 이동됐다. ‘싱글우먼’들의 이야기다. 정작 당사자들은 자아실현을 위한 당당한 싱글이 아니라 인연을 만나지 못해 결혼을 못한 싱글이라고 하지만, 그녀들이 미처 깨닫지 못한 사실이 있다. 인생이 매 순간의 크고 작은 선택으로 이어져 있다면 그녀들은 결혼을 위한 결혼을 선택하지 않았을 뿐, 결국 사회적 결혼 적령기에 자아를 실현하는 선택을 했다.

나는 꿈을 꾼다. 모계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조직의 미래사회를. 10년간 아시아의 모계사회 사진작업을 해오면서 내린 결론이다. 할머니와 어머니 중심의 모성은 그 어느 결집체보다 정서적 결속이 강하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다. 단단한 새의 둥지처럼 부부가 헤어지는 경우에도 아이들은 집을 옮길 필요가 없다. 이혼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 등 정신적 고통도 있을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중국 모계사회 출신인 한 수필가도 ‘모계사회 대안론’을 제시하고 있을 정도다. 모성만이 세계를 품을 수 있다.


사진에 대해 : 모계사회와 싱글은 다른 사진처럼 보인다

남들은 다르다고 하지만 별로 달라진 것은 없다. 전에는 잡지 같은 인쇄 매체를 염두에 두고 작업한 것이다. 물론 전형적인 다큐멘터리에 치우친 경향이 있다. 하지만 전시(모계사회)는 약간의 가능한 선에서 연출이 들어간 것이다. 마찬가지로 '싱글'전 역시 있을 법한 연출을 했다. 도시의 직업여성이자 싱글인 그녀들을 표현하는데 현대적인 감성이 필요했다. 결국 잡지의 르포 형식을 떠난 것이다. 전에는 많이 찍었지만 지금은 가급적 적게 찍고 싶다. 이야기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작업이 아닌 한 장 한 장이 독립적인 구조를 갖는 그런 작업을 해보고 싶다. 그것이 결국 사진의 형식 변화를 가져온 것이 아닐까?


카메라에 대해 : 형식의 변화를 원하는가?

장비에는 별 관심이 없다. 스승인 김수남 선생은 캐논 T90 한 대로 십수년을 작업했다. 장비가 사진을 만들지는 않는다. 지금은 캐논 1Ds Mark Ⅱ를 사용한다. 토마스 스투르스의 ‘숲’ 연작처럼 대형작업이 끌리기도 하지만 그러려면 조수도 있어야 하고 조명도 있어야 하고 이동할 큰 차량도 필요하다. 나로서는 불가능하다. 그냥 처지에 맞게 작업할 뿐이다. '싱글'전의 작업을 크게 인화해 봤다. 징그러웠다. 대형이 어울리는 작업이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디지털시대를 맞아 앞으로도 사진으로 밥을 먹으려면 뭔가 다른 것을 해야 한다.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누구라도 찍을 수 있는 사진이 아니라 백지순이기 때문에 찍을 수 있는 사진, 그것을 원한다.


스승에 대해 : 무엇을 배웠나?

20년 전이다. 대학 3학년 때, 맨날 시위대 후미에서 도망 다니는 일보다 맨 앞에서 뭔가 하고 싶었다. 그것이 사진이었다. 그래서 대학연합으로 사진을 하는 팀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찍으면 찍을수록 똑같았다. 단지 사진에 담긴 구호만 달랐다. 4학년 때 교양강좌가 하나 생겼다. ‘사진촬영과 감상’. 사진가 김수남이 강의하는 전교생 상대의 교양과목이었는데 처음엔 40명이 안돼 폐강하면 어쩌나 걱정하며 신청했다. 그런데 첫 강의시간에 가보니 500명이 신청한 대형 강의였다. 수업의 반은 김수남 사진 슬라이드 쇼였는데 너무너무 재미있었다. 소수민족의 의례, 축제, 의식주 등 우리 잡지에서는 볼 수 없는 이야기로 넘쳤다. 그래서 ‘이거다!’ 싶었다. 눈이 황홀했고, 내 관심의 지평은 확장됐다. 선생님이 불러 모은 금주회(금요일마다 술 먹는 모임)는 사진으로 행복했다. 술값은 선생님이 냈고, 우리는 졸업 때 양모 스웨터를 선물했다. 졸업하고 과외를 하며 돈을 모아 카메라를 사고, 렌즈를 모았다. 1년 만에 한 세트가 장만되었고, 선생님을 찾아갔다. 조수를 자청했다. 그러나 아무나 조수가 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조수가 되기 위해 포트폴리오를 들고 나타난 나에게 선생님은 “여자라서 힘들다”고 했다. 아시아의 오지를 집처럼 드나드는 분이라 이해는 됐지만 여자라서 못한다는 말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오기로 버티니 선생은 하는 수 없이 암실 사용을 허락했다. 조수가 된 것이다. 93년부터 98년까지 조수 일을 했다. 물론 내 일도 병행했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환경이나 기아, 전쟁 등 인류가 직면한 문제와 공공의 선을 위한 작업을 하고 싶다. 하지만 한국여자로서 마음 한켠에 넘어서야 할 것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우리 가정에 여전히 저며 있는 남존여비 사상으로 인한 딸과 아들의 차별, 며느리와 아들의 불평등 대우 등에 대한 문제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가정문제를 미시적 세계문제라는 관점에서 모계사회를 그 대안으로 주목하기 시작했다. 93년 베트남의 소수민족 에데족을 취재해 사진과 글을 한 사외보에 팔았다. 50만원이었다. 그것이 내 첫 번째 작업이었다.


꿈에 대해 : 당신의 미래는 무엇인가?

먼저 내 작품이 고가에 팔리는 것! 그리고 황혼결혼이 꿈이다.(웃음) 내 작품이 고가에 팔리기 이전에 불후의 명작을 남기고 싶다. 뭇사람들의 가슴에 남을 그런 사진을 남기고 싶다. 그리고 싱글이 지속된다면 황혼에는 결혼을 하고 싶다. 10년 전에는 청소하고 빨래할 수 있는 가사분담이 확실한 남자가 필요했는데, 그런 남자는 이제 없고, 세 가지의 요리를 할 줄 아는 남자면 좋겠다.

애초에 나는 싱글의 외로움을 모른다. 일찍 결혼했고 아이가 셋이다. 그런 내가 백지순의 사정을 이해한다면 완전 오버다. 나는 그저 모른다고 생각하고 받아 적었다. 수년간 친구로 지낸 것은 인터뷰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저 김수남 선생과 마지막 술을 함께 마셨다는 것. 함께 그분의 명복을 빌 뿐이다. 아니, 선생님! 백지순을 위해 괜찮은 남자 하나 점지해 주시길.






facebook twitter

월간사진
새롭게 떠오르고 있거나,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다양한 분야의 많은 사진가가 월간사진을 통해 매달 소개되고 있습니다. 월간사진은 사진애호가와 사진가 모두의 입장에서 한발 앞서 작가를 발굴하고 있습니다. 심도 깊은 사진가 인터뷰와 꼼꼼한 작품 고새로 국내외에서 주목받고 있는 대표 사진잡지입니다.

당신을 위한 정글매거진